27 Bloch 저술

서로박: (3) 블로흐와 자연 주체

필자 (匹子) 2024. 11. 4. 10:17

(앞에서 계속됩니다.)

 

8. 조르다노 브루노가 파악한 자연과 물질: 아베로에스는 중세의 아라비아 철학자, 아부 술라이만 알-시지스타니 (Abu Sulayman al-Sijistani, 832 – 1000)에게서 적극적 특징을 지닌 물질 개념을 찾아내었습니다. 그의 『두 편의 물리학 해설 Commentarium in II librum physicorum』에서 산출하는 자연의 개념이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BWB: 379). 여기서 아베로에스는 스코투스 에리우게나Scotus Eriugena가 처음 언급한 창조적인 물질이라는 개념을 과감히 도입하고 있습니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점에 착안하여 어떤 적극적 물질을 구명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왜냐면 절대적 신의 존재가 그에게는 더욱 중요한 관건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토마스는 물질의 적극적 창조의 특징을 싫든 좋든 무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스콜라 철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아라비아 철학자들이 추적했던 창조적 물질의 중요한 핵심 사항을 밝히려고 했습니다. 물질은 브루노에 의하면 항상 같은 존재로 그리고 항상 결실을 안겨주는 존재로 머물러야 합니다. 그것은 유일한 실체의 원칙으로서 항상 존재하는 존재로서 이해됩니다. 이에 비해 모든 형태는 오로지 물질의 다양한 개별적 특징으로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브루노에 의하면 출현한 다음에 사멸하고, 중단된 다음에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따라서 모든 형태는 물질에 관한 하나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몇몇 개체들은 자연 속에서의 형태적 관련성을 숙지하고 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이후의 사상가들에게서 유사한 내용이 발견된 바 있듯이- 자신을 차단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예외적 사항을 용인하려고 했습니다. 가령 형태들이 물질 가까이서 드러나는 우연적인 특성이며, 행위자 내지는 “엔텔레케이아”로서의 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것들은 실체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며, 오히려 실체 그리고 자연에 근접해 있는 사물들이라고 합니다. (Bruno,: 60). 물질과 형태의 근본적 특징을 밝히는 과정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신의 개념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중세 아라비아 철학자들을 비켜 가지는 못했습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 좌파에 속하는 아비케브론은 이러한 것들 역시 물질이라고 천명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아비케브론에 의하면 하나의 “필연적이고 영원한 신의 원칙이고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원칙”이라고 합니다.

 

9. 스피노자가 추구한 실체의 개념: 중세 아라비아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재정립한 이후에 실체에 관한 논의를 방법론적으로 “무엇이 세계에 합당한 것인가?” 하는 물음과는 별개로 이해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브루노는 물질을 논할 때 “실체”, “원리”, “물질” 그리고 “자연” 등의 개념을 정교하게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나중에 물질에 관한 브루노의 이론이 여러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입니다. 블로흐는 브루노의 이론을 하나의 확정된 폐쇄성으로 파악하는데, 이러한 주장이 오늘날 유효한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물질을 그 자체 주어지며, 그 자체 개념화되는 무엇을 파악했습니다. 만약 인간의 오성 속에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가정하면, 그 하나는 다른 하나에 의해 인식될 수 있을 텐데, 실체란 스피노자에 의하면 오로지 하나로 파악되는 “신 혹은 자연”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스피노자는 물질과 정신을 이원론적으로 파악하는 데카르트의 존재론을 거부하였습니다.

 

나중에 스피노자는 자신의 윤리학에서 물질과 관련되는 실체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정의 3: 실체란 스스로 내재하는 무엇이며, 이로써 스스로에 의해 파악되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물질은 어떤 다른 사물의 개념을 요청하지 않는 무엇인데, 자의에 의해 형성되는 무엇이다.” “정의 4: 나는 실체의 등가물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즉 오성 (지성)이 하나의 실체 곁에서 실체의 정수로 인식하는 무엇이라고 말이다.” “정의 5: 나는 방식을 실체에서 비롯하는 촉발이라고 이해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실체는 어떤 무엇 속의 다른 무엇에 의해서 개념화된다.” “정의 7: ‘자연의 법칙성으로부터 독자적으로 벗어나는 ex sola suae naturae necessitate’ 무엇이 있다. 이러한 무엇은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규정한다.” (Spinoza 35).

 

가령 인간은 신의 필연성으로부터 벗너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쟁취할 수 있는 것은 강제성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러한 자유는 수동적인 한계를 지닙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신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습니다. 인간은 신의 필연성으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윤선구: 132).

 

10. 라이프니츠가 파악한 실체: 이러한 자유의 개념은 존재론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라이프니츠는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가령 물(水)을 바라보면, 우리는 실체 그리고 (하나의 방식으로서의) 세계에 합당한 특징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물은 실체이지만, 얼음, 혹은 수증기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라이프니츠는 나중에 실체의 구분 불가능성을 인정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자 이론으로 이를 해명하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이를 철회하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물질의 “개별화의 원칙principium individuationis”은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어디서도 요청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Leibniz: 613).

 

라이프니츠의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1P29: ‘산출하는 자연’은 내적으로 존재하는 무엇 내지는 그런 식으로 파악되는 무엇, 혹은 ‘실체의 등가물Attribute der Substanz’이다. 적어도 그것이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한 그러하다. 그러나 ‘산출되는 자연’은 신적인 자연 내지는 신의 모든 등가물에서 비롯하는 필연성이다.” “2P7: 이념의 질서가 연결되는 것은 사물의 질서가 연결되는 것과 같다. Ordo & connexio idearum idem est ac ordo & connexio rerum.” “2P11: 인간 정신의 실질적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어떤 실제 존재하는 개별적 사물의 이념이나 다름이 없다. 인간의 정신은 신 그리고 무한한 오성의 부분이다.” (BWB: 381).

 

요약하건대 라이프니츠는 “모나드monad”라고 부르는 물질의 무한한 다양성을 가정합니다. 세계 개념의 기본 개념과 상호 호환 가능한 물질은 어떤 가능한 세계를 형성하며, 신은 그중 하나에만 작용하고 있습니다. 모나드는 생성되더라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자신의 법칙에 따라 모든 속성을 독자적으로 생성합니다. 모든 현상은 이러한 모나드라는 원자 물질로 구성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유기체적 생명체로 가득 찬 연못”이라고 합니다. 물론 라이프니츠의 이론은 물체적 실체 그리고 실체 사이의 모호성을 부분적으로 드러내지만, 그럼데도 라이프니츠는 다음과 같이 해명합니다. 즉 실체는 무한히 이어지는 등가물로 표현될 수 있는 유일한 무엇인데, 인간은 자신의 방식에 의해서 여기에 두 가지 사항으로 접근이 가능할 뿐이라고 합니다. 그 하나는 확장된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인식된 사실을 가리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세상에는 (관찰 불가능한) 진정한 영역이 존재하며, (관찰이 가능한) 인간에 의해서 접근이 가능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11. 물질의 공간 개념과 숨어 있는 세계: 우리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게서 물질의 어떤 시스템 이론에 대한 첫 번째 출발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확장된 사실로서의 물질적 공간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공간은 마치 하나의 조직체처럼 개별적 부분으로 축조된 게 아니라, 스스로 분화된 무엇입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실체의 등가물이라고 말하는데, 그 자체 시스템으로서 스스로 의도하는 바를 관철한다고 합니다. 시스템은 절대적으로 현존하는 질적인 특징을 지니는데, 이러한 특성은 무엇에 관한 어떤 현실적 조건으로 대답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적인 생명을 통해서 자신을 증명해내려고 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내면으로 향해 발설되는 모든 발언은 고유한 술어로 표현되는 게 아니라, 사물에 관한 선험적 지식 전체를 해명하게 됩니다. 시스템으로서의 세계는 미래에 밝혀지게 될 자연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Rombach: 365).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공간은 힘을 고려할 때, 확장, 즉 밖으로 나가는 힘이며, 논리적 중개 작업을 고려할 때 병렬적 질서와 다를 바 없다.(Bloch, LdM: 275). 세계는 블로흐에 의하면 확장된 현실로 발현하는 주체이며, 운동의 과정으로 체계 잡히는 질서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실체는 17세기에 신학적 관점이 득세했기 때문에, 현세를 초월하려는 세계관이 주류였습니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신학적 초월의 관점으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그는 그리스 철학이 전체적 차원에서 어떤 관념으로 구조화되어 있거나, 최소한 관념적 핵심 가까이서 물질을 이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체는 스피노자에게는 저세상으로 이전되지 않고, 그 자체 세계 전체에 내재하는 무엇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실체의 부분으로 접근이 가능할 뿐입니다. 사상가들은 지금까지 세계의 실체를 성급하게 밝히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방식의 세계에 국한될 뿐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인식에서 멀어져 있는, 은폐된 세계가 진정한 세계인지 모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모사될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하는데, 생명체들은 기껏해야 어떤 종(種)이든 간에 대용물로서의 세계만을 인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인간 존재는 물질 이론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사고 행위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요약하건대 실체의 개념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 이르러 오성 중심주의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고 있습니다.

 

12. 셸링의 세계영혼과 엥겔스의 자연 이해: 셸링은 나중에 스피노자의 관점을 받아들여서 이를 자신의 고유한 현대적 언어로 개진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스토아 철학에서 언급되는 자유에 관한 관점은 새로운 방식으로 중요성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블로흐는 자연 주체의 개념을 도출해냅니다. 이를 위해서 제기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하락한 인간 존재에 대한 신랄한 비판입니다. (Zudeick 1980: 68).“사용 가치가 교환 가지로 변화된 것은 오래전이다. 그런데 교환되는 모든 재화는 자본주의로 인해서 추상적 상품 내지는 자본으로 변질했다. 인간뿐 아니라, 사물에 의해 소외된 계산 역시 이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재화의 내용뿐 아니라, 자본의 액수가 중요한 무엇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시민 사회의 기술은 순수한 상품과 연결되어, 보편적으로 자연력을 활용하려고 했다.” (Bloch PH: 778).

 

그렇지만 제반 사물이 추상적 상품으로 파악되는 경향은 그 자체 하나의 결핍 현상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추상적 계산만을 중시한 나머지, 자연의 산출하는 기능, 이를테면 결실과 같은 자연의 작용 능력을 좌시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모든 법칙성은 과정 사이에 도사린 객관적 현실적 관련성을 정교하게 반영하며,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무엇을 직접 알려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이러한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은 자본주의의 시각으로 인해 무시되고 말았습니다. 자연을 활용하려는 의식은 자연법칙을 이해하는 일보다도 더 강하게 맹목적으로 자연을 지배하려 합니다.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은 자연을 다만 외부적 환경으로 인지하면서, 자연법칙의 필연성에 대해서 적대적 자세를 취합니다. 나아가 그는 객관적 현실적으로 진행되는 법칙에 대해 주관적 관점으로 대응합니다. 이로써 자연법칙의 필연성은 인간에게 오로지 활용한 다음에 파기되어야 하는 대상 내지는 일회적인 도구로 각인됩니다.

 

엥겔스는 『반 뒤링론Anti-Dühring』에서 자본주의의 일방적인 시각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연법칙을 깨뜨리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자연법칙을 이해하고, 계획에 합당한 특정한 목표로 작용할 가능성을 찾는 데 있다.“ (Engels, 1948: 148).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