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4) 블로흐와 자연 주체

필자 (匹子) 2024. 11. 8. 09:28

(앞에서 계속됩니다.)

 

11. 헤겔이 파악한 자연과 변증법 이론: 헤겔 역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대적 태도는 자연법칙에 대한 지배를 낳게 하는데,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자연의 “소재Stoff” 속으로 파고드는 일보다는, 오히려 “지략List”을 통한 이용 가치의 의미가 강하게 내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블로흐는 자연에 대한 자본주의자들의 일방적 시각이 자연을 무조건 정복하려는 의향을 증폭시킨다고 비판합니다. 이때 제기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고입니다. 어쩌면 자연 속에 이미 무언가 생산 해내는 경향적 잠재성이 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엥겔스가 지적한 자연의 변증법적 결과로서 자연 주체의 가능성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물질은 시간 개념 없이 무제한으로 존재하다가, 단 한 번 짧은 순간 자신의 운동을 구분하고, 운동의 모든 풍요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견지하게 된다. 이로써 물질은 덧없으며, 그 운동 역시 사멸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Engels, 1962: 325). 인용문에서 언급되는 영원성 그리고 시간 개념 없는 존재라는 표현은 그 자체 명징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기계적 물질 이론과 변증법적 물질 이론은 실체 그리고 기체 사이의 차이점을 제각기 달리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Zimmermann 1996: 52). 부언하건대 기체는 형상의 배후에서 자리하는 불변의 토대, 즉 히포케이메논입니다. 여기서 기계적 물질 이론은 이를 추론할 수 있으나, 변증법적 물질 이론은 기체를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처음부터 세계의 변화를 질적 변화의 모순성으로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헤겔은 과연 실체 또한 능동적으로 주체의 역할을 행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당황했습니다. 자연을 주체의 관점으로 파악하려면,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정신 현상학의 논리를 부분적으로 파기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추구하는 자신이 구축한 정신의 시스템은 자연 주체의 논리에 의해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헤겔은 자연을 주체로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헤겔이 생각하는 자연은 자립적 주체가 아니라, “이념의 외화”에 불과합니다. (이광모: 183). 자연은 인간 정신이 가리키는 무엇이 외부로 화해 있는 무엇이었습니다. 그것은 헤겔에 의하면 오로지 정신의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12. 블로흐가 파악한 세계의 실험 속의 싹으로서의 실체: 이러한 문제는 블로흐에게는 “완성되지 않은 엔텔레케이아”로서의 물질에 관한 문제점으로 다가왔습니다. (Gespräche: 288). 실체는 블로흐에 의하면 “세계의 실험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싹이며, 동시에 최종적 물질의 유토피아적 전체”입니다. (Bloch, EM: 246; MA 450; Gespräche 288). 실체는 역사적 과정에서 실현 가능한 무엇으로서 어두운 순간 내지는 외연과 내포 사이의 동일성이 밝혀지는 빛을 통해서 마지막에 이르러 객체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헤겔은 실체가 어떤 식으로 객체로 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게 아니라, 실체의 개념을 파기하는 문제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헤겔은 “살아 있는 실체는 주체이거나, 현실적으로 일컬을 수 있는 무엇”이라고 합니다. (Hegel, HW 3: 23). 여기서 헤겔은 실체의 개념을 자신의 논리로 이해하면서, 현실의 영역과 연결지웠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의 영역은 근본적으로 개념상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을 뿐입니다. (Hegel, HW 8: 279). 실제 현실은 이성적으로 상정해낸 개념상의 현실, 즉 변증법적 현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헤겔은 1802년에 자신이 찾으려던 학문적 결론에 근접합니다. 이때 그는 절대성의 인식 가능성을 선택하려고 했는데, 이 문제는 스피노자가 밝히려고 했던 실체에 관한 과제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물질 이론으로써 실체 그리고 주체/기체 사이를 수월하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헤겔과 블로흐의 견해 차이가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블로흐는 헤겔이 실체를 현실의 영역에 적용하려는 태도에 의구심을 느꼈지만, 이를 명징하게 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헤겔의 핵심 사항으로서 주체의 객체화, 스스로 깨닫는 자기 인식이라고 믿었습니다. 주체는 헤겔에 의하면 결코 실체로 변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인식이 기껏해야 세계에 합당한 방식으로서의 현존성의 형태를 함축할 뿐, 현존성에 기초하는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Bloch, SO: 35).

 

이러한 성향은 자연 지배의 과업과 관련하여 칸트 그리고 젊은 셸링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Zudeick 1980: 272f). 그러나 이들은 자연과 세계에 관한 완전한 인식의 불가능성을 충분히 천착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블로흐에 의하면 주체의 개념 자체가 경험적이고 생물학적 관점에서 여전히 자연에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Bloch, PH: 764).

 

13. 창조적 물질과 자연 주체: 가령 칸트는 물리학의 법칙으로서 어떤 초월적인 주체의 토대를 공고히 하려고 했습니다. 이로써 자연의 동력에다 하나의 주도적인 주체적 기능을 부여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Bloch, PH: 785). 왜냐면 자연에 적용될 수 있는 물리 역학은 아무런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무기물에만 동원되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어떤 경험적이고 유기물과 같은 주체로 막연하게 추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자연 속의 어떤 역동적인 주체의 개념은 블로흐에 따르면 마지막 심급에 있어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외연 충동과 다를 바 없습니다. 블로흐는 “산출하는 자연”을 모든 것을 실제 현실에 드러나게 하는 근원으로 규정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세계와 지성을 명시적으로 연결하는 현실적 변증법을 실행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Bloch, EM: 74f).

 

만일 “산출하는 자연”이라는 오래전의 개념이 자연 주체를 의미한다면, 어떠한 물리적 무엇도 이보다도 더 우선으로 설정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산출하는 자연은 –아베로에스가 처음으로 언급한 중세의 시기부터- 창조적 물질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로써 자연은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주체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역사에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자연사의 축을 직접 흔들 수는 없습니다. 자연 역사의 축은 여전히 중개되지 않은 채 인간 외적인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가설적 동인입니다. 그것은 추상적인 자연의 힘으로서 범신론적으로 산출하는 자연으로 명명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의지 밖에서 작용하는 자연력은 어느 순간에 이르러 인간의 인식으로 접근 가능한 구체적인 무엇으로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노동하는 인간이야말로 우주의 물질적 동인 가운데에서 가장 강력한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그 자체 자연으로부터 결코 일탈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통합적 에너지 이론Synenergismus”을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Jäger 1969a: 313). 여기서 물질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 관련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얼마든지 희망의 기능과 유사하게 수행될 수 있습니다.

 

14. 물질의 근원 구조와 자연의 뿌리: 블로흐는 현대의 자연과학 가운데 특히 물리학을 은근히 비판하였습니다. 물리학은 모든 것을 추상화시키는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물리학의 수학적 계산이라는 특징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수학적 계산은 자연 속에 객관적으로 자리하는 질적 특징이라는 특별한 행동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Zudeick 1985: 303). 블로흐는 자연과학이 산출하는 자연이 과연 무엇을 생산해내는가? 하는 문제를 무시하고, 양적 측면에서 오로지 계량적 특징만을 중시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표명했습니다. (Bloch, PH: 804).

 

그렇지만 물리학은 변증법적 차원에서 마치 산출하는 자연과 같은 에너지의 핵심에 얼마든지 관여할 수 있습니다.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셸링 그리고 헤겔의 역동적이고 질적인 자연 철학은 어쩌면 파라켈수스Paracelsus의 부호 속에서 어떤 물리적 생산력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물리 역학의 바깥에 있는, 중개된 자연의 부호와 다름이 없다. 이러한 중개 작업이 없이는 물리적인 것은 추상적 오성의 시신(屍身)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만약 자연 속에 무언가 생산하는 아궁이가 존재한다면, 이러한 근원적 구조는 원자보다 미세한 무엇의 모델, 혹은 우주의 장(場)이라는 법칙과 함께 소진하지는 않을 것이다.” (Bloch, PH: 804),

 

블로흐는 셸링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근원적 구조에 관해 논의를 개진합니다. 셸링은 현세의 인간이 역사적 시작이라는 판매 장소에서 자연 출현의 역사에 근접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헤겔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객체의 다양하고도 함축적인 모노그램” 속에서 최소한 아직 풀리지 않는 의미를 고찰하려 했습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정신 속에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정신 현상학의 관념론이며, 자연이 부분적으로 주체로 전환될 가능성을 현저히 낮게 판단했습니다. 셸링은 블로흐에 의하면 헤겔에 비해서 자연주체의 핵심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뿌리는 모든 사물을 찬란하게 꽃피우지 않으며, 파기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