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서로박: (1) 블로흐와 자연 주체

필자 (匹子) 2024. 11. 2. 11:00

당신을 위해서 블로흐와 자연 주체에 관한 사항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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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원의 근거와 물질의 운동: 에른스트 블로흐의 자연 주체의 개념에 관해서 고찰하기로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블로흐가 수미일관 추적하던 물질의 존재론이 어떻게 과정으로서의 유토피아의 인식론과 마주치게 되는가? 하는 점을 간파하게 될 것입니다. 자연은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지엽적 사항으로 논의되었습니다.  자연의 개념은 그 자체 다양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세계의 근원을 밝히는 과업에서 물질 그리고 실체의 개념이 중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연 주체는 오늘날 생태학적 사유와 관련하여 의미의 중요성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블로흐는 자연을 근원의 근거로 투시합니다. 근원의 근거는 블로흐에 의하면 안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모든 현존재를 지탱합니다. 이것들은 언제나 불안정하게 유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정의 경향성은 근원 근거의 핵심에서 계속 유동하는데, 그 자체 어떤 주체에 합당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운동은 움직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어떤 “즉자존재 Fürsichsein”로 향하려는 의향을 가리킵니다. 모든 현존재는 지금 여기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혹은 다른 자극을 통해서 움직이거나 발효하는 과정에서 꿈틀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한편 인간은 자기중심적 일방성이라는 의지를 지니기 때문에 다른 관점, 가령 자연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가설을 통해서 “자연의 주체적 핵심”을 그저 막연하게 추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 속에는 분명히 하나의 변증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연이 인간에게 드러내는 것은 기껏해야 자신의 일부, 즉 아직 완결되지 않은 장(章)에 불과합니다. “변증법적 운동은 그 자체 새로운 무엇에 의해 이행되는 움직임이다. 그것은 주체의 내재적인 자기모순에 의해서 언제나 새롭고 참신한 무엇을 세상에 출현하게 한다. 적어도 주체의 이루어지지 않은 형태가 궁극적으로 규정하고 질적으로 적절한 경우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자연 철학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역사를 산출하는, 노동하는 주체라면, 자연의 변증법을 추동하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Bloch, EM: 218).

 

2, 고대 철학에서 나타난 소재: 자연은 철학적 논의의 핵심 사항으로 제기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실체 그리고 물질이라는 개념을 도외시해서는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가들 그리고 플라톤은 실체의 개념을 중요한 관건으로 수용하지 않고, 철학적 사고의 부수적 측면에서 간략히 해명했을 뿐입니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에 관한 모든 사항을 체계적으로 고찰하고 이를 명시적으로 밝힌 바 있습니다. (Bloch, MA: 479f). 이전 사상가들이 경구라든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방식으로 개진한 경우와는 달리, 그는 학문에 합당한 산문으로 모든 것을 서술하였습니다. (Zimmermann 2001: 151).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은 향후 100년 동안 소요학파의 이론적 출발점으로 작용했습니다.

 

3. 무(無)와 진공(眞空): 그런데 우리가 주시해야 할 사항은 많은 철학자가 “무nichts” 그리고 “아님nicht”을 존재론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Jäger 1969:320). “아님”은 “없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아님”은 결핍과 부정(否定)을 지칭하기 때문에, 존재론적인 무(無)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무(無)”는 주지하다시피 서양 철학자들의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컨대 동양에서 말하는 공(空)은 진공(眞空), 즉 우주의 비어있음과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진공은 한마디로 진공이라는 물질이기 때문이지요. 진공은 우주 과학에 의하면 원래 우주에 골고루 퍼져 있어야 하는 물질이 응집하여 별이 된 다음에, 남아 있는 잔여의 물질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진공은 “얇은 막 내지는 미시적인 두께로 이루어진 무엇”이라는 말인데 (브라이언 그린: 49),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동양학에서 말하는 무(無)와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일치하는지, 실증적으로 밝힐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재hyle”의 특징을 무라고 단언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밀히 말하면 고대 그리스의 사상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라는 개념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소재에는 어떤 부족하고 결핍된 무엇이 자리할 뿐이지요. 이러한 특징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변화를 추동하는 엔텔레케이아에서 발견됩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소재 가까이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라, 무언가 결핍되어 있을 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암시한 소재의 가능성이라는 특징은 -나중에 언급되겠지만- 당대에는 첨예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습니다.

 

4.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개념, 실체, 기체: 아리스토텔레스의 몇몇 개념들은 어떤 의미론적 혼란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실체οὐσία”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개별적 사물과 연결되는 주체를 가리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 사물 속에 깃들어 있는) 본질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주체의 개념은 “히포케이메논ὑποκείμενον”으로 표현되는데, 개별 사물로서의 주체뿐 아니라, 개별 사물 속에 도사리고 있는 소재의 원인으로서의 “기체Substrat”로 의미론적 확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논리적 측면에서 고찰할 때 개별 사물로서의 주체, 즉 전자의 경우 실체는 개별 사물로서, 술어 속의 마지막 발언 당사자로 포착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이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차이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가령 첫 번째 실체는 (가령 유형이나 종으로서의 인간 내지는 생명체와 같은) 보편적인 무엇이 아니라, 개별적인 무엇이라고 합니다. 보편적인 무엇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두 번째 실체로 판명됩니다. 왜냐면 기타의 것, 우발적인 것은 보편적인 무엇에 의해서 발설되지만, 다시금 개별적 사물로 논의되기 때문입니다. “우시아οὐσία”라는 단어는 “είναι”, 즉 첫 번째 현존하는 무엇으로서의 모든 현존재성, 다시 말해서 현존재의 총체적 특성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로 인해서 물질은 감각적 실체를 고려할 뿐 아니라, 존재의 내재적이고 초월적인 원인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주체를 근본적으로 논리적 차원에서 고찰합니다. 즉 주체는 자연 철학적 관점에서 “기체Substrat”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발언κατηγορεἶται” 자체가 처음부터 이중적 의미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해진 무엇이면서 동시에 정해지지 않는 무엇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BWB: 376).

 

카테고리는 정해진 무엇 내지는 정해지지 않은 무엇에 대한 발언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에 대한 내포성과 외연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게 카테고리입니다. 내포성이 그 무엇에 대한 내용물이라면, 외연성은 그 무엇에 대한 틀 내지는 격자를 지칭합니다. 카테고리들은 블로흐의 경우 내포성(내용물)에 대한 외연성(틀)의 접근 관계, 다시 말해서 두 개의 관계 속에서 점점 확정되는 방식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외연(틀)에 대한 내포(내용물)의 접근하는 관계 역시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관계 내지는 방식은 우리가 객관적 현실적 등가물을 파악할 때, 세계에 합당한 카테고리를 술어로 변화시킬 때 우리의 발언 속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