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해서 블로흐와 자연 주체에 관한 사항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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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원의 근거와 물질의 운동: 에른스트 블로흐의 자연 주체의 개념을 고찰하기로 합니다. 이 작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간파하게 될 것입니다. 즉 블로흐가 수미일관 추적하던 물질의 존재론이 어떻게 과정으로서의 유토피아의 인식론과 마주치게 되는가? 자연은 서양 철학의 오랜 역사에서 지엽적 사항으로 논의되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 다양한 의미를 지니므로, 논의에서 제외되곤 하였습니다. 대신에 중시된 것은 세계의 근원을 밝히는 과업에서 물질 그리고 실체의 개념이었습니다. 자연 주체는 오늘날 생태학적 사유와 관련하여 의미의 중요성을 전해줍니다. 그렇다면 블로흐는 자연 주체를 어떻게 파악할까요?
자연은 블로흐에 의하면 근원의 근거로 투시됩니다. 근원의 근거는 안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모든 현존재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언제나 불안정하게 유동합니다. 이러한 불안정의 경향성은 근원 근거의 핵심에서 계속 유동하는데, 그 자체 어떤 주체에 합당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운동이란 언제 어디서나 움직임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어떤 “즉자존재 Fürsichsein”로 향하려는 의향을 가리킵니다. 모든 현존재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혹은 다른 자극을 통해서 움직이거나 발효하는 과정에서 꿈틀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한편 인간은 자기중심적 일방성이라는 의지를 지니기 때문에, 다른 관점, 가령 자연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2, 은폐된 자연과 변증법: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가설을 통해서 “자연의 주체적 핵심”을 막연하게 추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 변화의 과정에는 분명히 하나의 변증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연이 인간에게 드러내는 것은 기껏해야 자신의 일부, 즉 아직 완결되지 않은 장(章)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인지하는 것은 자연의 일부 내지는 자연의 비밀스러운 부호일 뿐입니다. “변증법적 운동은 그 자체 새로운 무엇에 의해 이행되는 움직임이다. 그것은 주체의 내재적인 자기모순에 의해서 언제나 새롭고 참신한 무엇을 세상에 출현하게 한다. 적어도 주체의 이루어지지 않은 형태가 궁극적으로 규정하고 질적으로 적절한 경우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자연 철학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역사를 산출하는, 노동하는 주체라면, 자연의 변증법을 추동하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Bloch, EM: 218).
3, 고대 철학에서 나타난 소재: 그렇다면 외부의 세계는 철학사적으로 어떻게 인간에게 투영되었을까요? 이미 언급했듯이, 자연은 철학적 논의의 핵심 사항으로 제기되지는 않았습니다. 고대의 사상가들은 “소재ὕλη”에 관해서 언급했습니다. 소재는 일상의 언어였지만, 철학자들은 물질이라는 개념을 논할 때 이 단어를 활용했습니다. 물질에 관한 논의는 “실체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대의 자연 철학자들을 제외한다면,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가들 그리고 플라톤은 실체의 개념을 중요하게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실체는 철학적 사고의 부수적 사항으로서 간략히 해명되었을 뿐입니다.
이에 비해 실체에 관한 모든 사항을 체계적으로 고찰하고 이를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밝힌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Bloch, MA: 479f).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술 방식부터 다르게 설정했습니다. 이전의 사상가들이 경구라든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방식으로 개진한 경우와는 달리, 그는 산문으로 모든 것을 기술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문으로 서술하면, 객관적인 분석이 비교적 수월해집니다. (Zimmermann 2001: 151).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은 향후 100년 동안 소요학파의 이론적 출발점으로 작용했습니다.
4. 무(無)와 진공(眞空): 그런데 우리가 주시해야 할 사항은 다음의 사실입니다. 즉 많은 철학자는 “무nichts” 그리고 “아님nicht”을 존재론적으로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Jäger 1969:320). 그런데 “아님”은 “없음”과는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아님”은 결핍 내지는 부정(否定)을 지칭하기 때문에, 존재론적인 무(無)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동양의 “무(無)” 개념에 관해서 심도 넘치게 추적하지 않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고대 그리스의 사상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라는 개념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동양에서 말하는 공(空)은 진공(真空), 즉 우주의 비어있음이 아닙니다. 우주의 진공은 서양 사상에 의하면 한마디로 진공이라는 물질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진공은 우주 과학에 의하면 원래 우주에 골고루 퍼져 있어야 하는 물질이 응집하여 별이 된 다음에, 남아 있는 잔여의 물질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진공은 “얇은 막 내지는 미시적인 두께로 이루어진 무엇”이라는 말인데 (브라이언 그린: 49), 안타까운 것은 그게 동양학에서 말하는 무(無)와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일치하는지, 실증적으로 밝힐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소재ὕλη”의 특징은 무(無)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소재에는 어떤 부족하고 결핍된 무엇이 자리할 뿐이지요. 이러한 특징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율적 목적을 지닌 힘에 해당하는, 변화를 추동하는 “엔텔레케이아”에서 발견됩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소재 가까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무언가 결핍된 상태는 동양에서 말하는 공(空)과는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암시한 소재의 가능성이라는 특징은 -나중에 언급되겠지만- 적어도 고대에는 첨예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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