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서로박: (2) 블로흐와 자연 주체

필자 (匹子) 2024. 11. 3. 09:35

(앞에서 계속됩니다.)

 

5.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개념, 실체, 기체: 아리스토텔레스의 몇몇 개념들은 어떤 의미론적 혼란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실체οὐσία”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개별적 사물과 연결되는 주체를 가리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 사물 속에 깃들어 있는) 본질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주체의 개념은 “히포케이메논ὑποκείμενον”으로 표현되는데, 개별 사물로서의 주체를 가리킬 뿐 아니라, 개별 사물 속에 도사리고 있는 소재 원인으로서의 “기체Substrat”로 의미론적 확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실체”라는 말은 “어떤 존재자의 실체”라는 이항관계에 따라 사용되기도 하고, 단적으로 어떤 존재자를 “실체”라고 부르는 경우처럼 단항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권혁성: 83). 논리적 측면에서 고찰할 때 개별 사물로서의 주체, 즉 전자의 경우 실체는 개별적 사물로서 파악되며, 술어 속의 마지막 발언 당사자로 포착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는데, 바로 여기서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차이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가령 첫 번째 실체는 (가령 유형이나 종으로서의 인간 내지는 생명체와 같은) 보편적인 무엇이 아니라, 개별적인 무엇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편적인 무엇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두 번째 실체로 판명됩니다. 왜냐면 기타의 것, 우발적인 것은 보편적인 무엇에 의해 발설되지만, 다시금 개별적 사물로 논의되기 때문입니다. “우시아οὐσία”라는 단어는 바로 “είναι”, 즉 첫 번째 현존하는 무엇으로서의 모든 현존재의 특징, 다시 말해서 현존재의 총체적 특성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로 인해서 물질은 감각적 실체를 고려할 뿐 아니라, 나아가 존재의 내재적이고 초월적인 원인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주체를 근본적으로 논리적 차원에서 고찰했습니다. 즉 주체는 자연 철학적 관점에서 “기체Substrat”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발언κατηγορεἶται” 자체가 처음부터 이중적 의미로 활용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해진 무엇이면서 동시에 정해지지 않는 무엇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BWB: 376).

 

원래 카테고리는 정해진 무엇 내지는 정해지지 않은 무엇에 대한 발언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에 대한 내포성과 외연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게 카테고리입니다. 내포성이 그 무엇에 대한 내용물이라면, 외연성은 그 무엇에 대한 틀 내지는 격자를 지칭합니다. 제반 카테고리들은 블로흐의 경우 내포성(내용물)에 대한 외연성(틀)의 접근 관계, 다시 말해서 두 개의 관계 속에서 점점 확정되는 논리적 방식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외연(틀)에 대한 내포(내용물)의 접근하는 관계 역시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관계 내지는 방식은 우리가 객관적 현실적 등가물을 파악할 때, 세계에 합당한 카테고리를 술어로 변화시킬 때 우리의 발언 속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6. 개별 사물, 혹은 본질로서의 실체: 우리가 물질의 개념을 이러한 카테고리로 해명할 때, 상기한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 부각됩니다. 물질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아직 아닌 현존재”를 모든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이는 바로 “형태εἶδος”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물질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가능성을 실행하는 실체 δυνάμει”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은 다른 관점에서는 어떤 불확정적인 무엇이므로, 실체일 수는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해명합니다. “‘소재’는 가능성에 따라 활동한다. 왜냐면 그렇게 해야 형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소재는 형태로 드러난다.” (Ari, 1989: 1050a, 10). 여기서 물질은 소재와 결착해 있는 존재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재의 본질을 고려하면 다음의 사항을 생략할 수 없습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의 첫 번째 원칙, 혹은 여러 첫 번째 원칙에 의해 출현한다는 사항 말입니다. 같은 소재는 모든 것을 형성하게 하는 원칙에 기초하지만, 모든 개별적 사물을 위한 하나의 고유한 소재가 존재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다양한 사물은 움직이는 원인에 의해서 하나의 같은 소재에서 파생된다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무엇은 일부 자연적으로, 일부 인위적으로 그리고 일부 자발적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변화하는 모든 것은 어떤 무엇의 작용으로 변화한다. 여기서 말하는 어떤 무엇은 ‘모든 카테고리’를 가리킨다고 나는 생각한다.(Ari. 1989: 1232a, 12ff). 따라서 변화하는 모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간에 하나의 소재 내지는 소재로서의 물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면 변화하는 모든 것은 가능성을 지니거나, 가능성을 지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모든 개별적 사물에 도사리고 있는 소재의 근본적 특징이라고 합니다.

 

요약하건대 “실체οὐσία”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개별적 사물로서의 주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적 사물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개별적 사물의 주체를 형성하는 토대로서의 “히포케이메논ὑποκείμενον”은 기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기체는 형태의 원인에 기초하는, 개별적 사물 속의 소재 원인을 가리킵니다. 소재는 언어논리의 측면에서는 술어의 마지막 발언의 주체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모든 실존을 관장하고 다스리는 무엇을 가리킵니다.

 

7. 스토아 철학과 프네우마 개념: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합당한 삶을 위해서는 스토아학파에 의하면 세 가지 영역을 서로 중개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물리학, 논리학 그리고 윤리학을 지칭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학문을 천착하기 위해서는 스토아학파 사상가들은 무엇보다도 자연의 법칙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법칙성이란 스토아 철학의 세계에 대한 이해입니다. 여기서 중시되는 것은 근원적 물체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것은 신의 생명력으로서의 “프네우마 πνεύμα”입니다. 정신 내지는 숨결로 이해되는 프네우마는 우주의 사물과 뒤섞이는데, 한편으로는 능동적 근원으로서의 신을 가리키고, 수동적 근원으로서의 물질을 가리킵니다.

 

초기 스토아학파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에는 마치 불과 같은 정신 내지는 호흡이 깃들어 있습니다. 프네우마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하는 불의 사고를 반영한 것으로서, 동양학에서 거론되는 기(気)의 흐름과 매우 유사합니다. 스토아 사상가 가운데 크뤼시포스는 “프네우마”를 물질의 긴장 운동으로 해석한 바 있습니다. 이로써 프네우마는 응집적 프네우마, 자연적 프네우마, 영혼적 프네우마 그리고 이성적 프네우마로 전환됩니다. 이에 관한 논의는 나중에 갈레노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의 문헌에서 계속 이어진다고 합니다. (한경자: 142).

 

놀라운 것은 프네우마의 이러한 운동의 변화 과정이 생명체 뿐 아니라, 무기물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내부에 프네우마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고는 범신론으로 이어졌으며, 나중에 헤르더의 사상 속에서 하나의 단초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자연의 법칙성에 관한 사고는 블로흐의 자연 주체에 관한 논의로 계승되었습니다.

 

8. 아리스토텔레스 좌파의 산출하는 자연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의 법칙성이란 무엇일까요? 중세 아라비아의 철학자들은 스토아 사상과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하여,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과 “산출되는 자연natura naturata”을 서로 구분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들 사상의 혁신적 촉수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관찰 방식에 있어서 이른바 과정의 특성이 드러나는데, 이는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자유의 개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비켄나와 아베로에스는 물질적 변화의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두 가지 사항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물질의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특징이며, 다른 하나는 실체의 개념을 좌시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가능성을 지닌 존재δύνάμει ὅν”보다도 “가능성으로 향하는 존재κατά το δυνατόν”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블로흐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봉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재는 블로흐가 주장한 대로 수동적 관점에서 이해되는 것일까요? (Bloch LdM: 121).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원래 소재는 관념 이론의 주체가 아니다. 그렇지만 주체는 물질 이론적 관점에서 고찰할 때 소재에 해당한다.” (Bloch LdM: 123). 이로써 드러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입니다. 즉 물질은 처음에는 가능성의 기체로 이해되었지만, 가능성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우리는 기체가 적극적 역동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상정할 수는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개념이 블로흐에 의하면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수동적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