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17. 자연 주체, 중개된 터전과 그 부호: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궁극적으로 출현하는 자연은 미래의 지평에서 최종적으로 출현하는 역사와 다름이 없다고 말입니다. 오로지 이러한 지평 위에서 미래의 기술이라는 중개 작업이 작동될 수 있습니다. 블로흐는 자연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도 모조리 철거하지 않은 건축의 터전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아직 적절하게 주어지지 않은, 인간의 가옥을 위한 건축 자재들이 바로 자연 주체라는 것입니다. 자연 주체는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옥을 축조할 수 있는 구체적 상이며, 어떤 객관적 유토피아의 범례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가옥은 역사 속에 마련될 뿐아니라, 인간 행위의 토대 위에서 건설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Bloch, PH: 807). 인간의 집은 무엇보다도 중개된 자연 주체이며, 자연이라는 건축의 터전 위에 설정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에 블로흐는 윤리학에 근거한 존재론을 세계에 합당한 미학의 관점과 연결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질적 측면의 “보편 수학mathesis”의 관점에서 드러나는 “부호Chiffer”라고 합니다. 바로 여기서 자연 주체의 어떤 저항적 에너지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령 장신구라든가 악보에 숨어 있는 암호는 이에 대한 결정적 증거일 수 있습니다. 가령 장신구는 자연적 형상의 기하학적인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 자체 놀라운 예술적 표현입니다. 장신구는 자연의 이러한 예술적인 형상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면모를 알려주기도 하고, 지속적인 발전성을 타진하기도 합니다. 골동품의 형체들은 어떤 폐쇄적인 목표 내용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 암호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해독을 위한 부호일 뿐 아니라, 내적인 의미를 스스로 발현하는 암호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그것들은 현실적 부호와 같습니다. 객체에 합당한 무엇을 형태로 부유하도록 자극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 객체에 합당한 유토피아의 존재인 것입니다. 질적 변증법적 형체의 카테고리는 마치 수정(水晶)의 형태처럼 이른바 무기질의 자연이라는 폐쇄성을 드러내지만, 차제에는 얼마든지 어떤 상징을 현시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들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계의 핵심적 면모를 현실적으로 검증하기 때문입니다. (Bloch, EM: 219).
18. 자연 주체, 물질과 유토피아의 만남: 지금까지 우리는 블로흐가 추적한 자연 주체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자연 주체는 물질의 기본적 체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개념입니다. 자연의 암호는 주체와 객체 관계를 연결하게 해주는 가교로서의 싹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Bloch, MA: 221). 인간 주체와 자연 주체는 블로흐에 의하면 상호 대립하는 게 아니라, 물질이라는 대개념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두 가지 소개념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 역시 처음부터 물질의 영역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기술의 의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블로흐는 인간의 기술 의지가 창조적 물질 행위로서의 ‘산출하는 자연’과 접목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서로 제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김진: 84). 물질을 전제로 한다면, 인간 역시 자본주의의 경제적 시스템이라는 토대에서는 얼마든지 객체로 인식될 수 있으며, 자연 역시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무엇을 생산해내는 주체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 인간의 인식 능력은 자연 주체의 본질과 의향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요약하건대 물질은 한편으로는 블로흐의 존재론에서 언급되는 최종적인 기본 개념이며, 가능성의 카테고리는 물질의 의향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기능합니다. (Bloch, TE: 234). 그렇지만 물질은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의 유형이며, 구체적으로 유토피아의 실체와 다를 바 없습니다. (Jan R. Bloch: 143). 왜냐면 그것은 잠재성 속에서 실현되는 세계의 근거이며, 그 자체 “최종적 물질materia ultima”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물질은 객관적 현실적 유토피아의 실체로 작동됩니다. (Bloch, LdM: 421). 그렇기에 세계의 과정은 실체로서의 객관적 가능성이라는 물질과 함께 유토피아로 기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적인 것은 블로흐에 의하면 마치 유토피아처럼 자신의 존재 속에 어떤 존재의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는 아직 주어져 있지는 않지만, 기초적이고 기초에 합당한 예측된 상을 보여줍니다. 이로써 자신의 유토피아의 원칙이라는 특징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Bloch, EM: 238) 그게 설령 정치적이고, 도덕적이며, 미학적이고, 메타-종교적이든 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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