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15) 희망의 원리. 제 3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3. 24. 09:26

(14에서 계속됩니다.)

 

20. 노동과 여가: 블로흐는 제4부의 마지막 장에서 노동과 여가의 문제를 논하고 있습니다. 삶에서 노동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일하지 않으면, 끼니를 구할 수 없습니다. 노동의 생산성은 얼마나 휴식을 취하는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일요일의 휴식 그리고 저녁 시간의 여가는 노동을 위한 부수적인 조건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노동과 빵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심리적 갈망 역시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Bloch, PH: 1085). 노동과 여가를 철저하게 구분하게 한 당사자는 블로흐에 의하면 자본주의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대체로 힘이 들지만, 오랜 휴식은 지루함을 안겨주니까 말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은 결코 즐겁고 창의적일 수 없으며, 여가 생활은 노동을 위한 재충전을 뜻하기 때문에 따분함만을 안겨줍니다. 가령 쇠라의 그림 「그랑드 자트 섬」에 묘사된 저주스러운 권태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즐겁고 창의적 노동과 축복의 휴식을 병행하는 삶일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서 개개인은 무엇보다도 놀라움과 희망의 정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가 개인 위에 군림하지 말고, 개개인에게 자발적인 방식으롷 노동과 유식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노동과 여가에 관한 분명한 지침은 블로흐에 의하면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21. 빠름과 느림, 소렐 그리고 마키아벨리: 너무 오래 고민하는 사람은 주어진 기회를 놓치곤 합니다. 이에 관한 예는 로마의 파비우스에게서 발견됩니다. 로마의 장군 파비우스는 지연작전을 써서 카르타고의 침략에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숙고한 나머지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느릿느릿한 소시민들은 모반을 일으킬 때 교묘하게 이용당합니다. 그에 비해 강인한 사람은 급작스럽게 행동하고 야밤의 늑대처럼 진영을 뚫고 지나칩니다. 행동하는 사람들은 폭력을 창조적으로 이상화시킵니다. 조르주 소렐의 급진적 생디칼리슴이 좋은 예입니다. (Bloch, PH: 1109).

 

혁명가들은 소렐의 쿠데타 이론에다 베르그송의 “생명의 열광Elan vital”이라는 열정을 가미시키곤 합니다. 폭력의 열정을 가르친 사람은 마키아벨리였습니다. 소렐이 보수와 진보 세력에 강한 영향을 끼친 것과는 달리 마키아벨레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마키아벨리의 사고 속에는 파시즘의 근원적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사용한 의지의 검술은 두 가지 방법으로 행해집니다. 그 하나가 남성적 폭력이라는 가시적인 힘이라면, 다른 하나는 교활한 간계라는 비가시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전자가 사자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행하는 광폭한 에너지라면, 후자는 교활한 여우의 잔꾀 부리는 에너지를 지칭하지요. 가장 훌륭한 정치적 행위에 관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폭력 없는 머뭇거림 그리고 극단적 폭력은 모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혁명 운동은 불가피하게 폭력으로 드러나지만, 새로운 사회를 출산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22. 행위의 삶과 명상적인 삶: 세상사는 언제나 운동과 정지 상태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운동은 주어진 참담함을 파괴하려는 어두운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정지 상태는 찬란한 빛을 구가하는 밝은 이상으로 드러나곤 합니다. 헤라클레스는 스스로 행동을 취하려는 갈림길에서 이 두 가지와 마주치곤 했습니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은 운동과 정지를 자극하는 특징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운동과 정지는 제각기 행위의 삶과 명상적인 삶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언급하면서 행위의 삶과 명상적인 삶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말씀을 경청하고, 마르타는 일하면서 예수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이때 예수는 명상적인 인간을 노동하는 인간의 우위에 두었습니다. (Bloch, PH: 1122).

 

물론 우리는 노예제도가 생산의 주도적 형태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나중에 프란체스코 수사인 둔스 스코투스는 의지의 행위가 정신의 명상보다 우위에 있다고 설파했습니다. 이에 반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인용한 바에 의하면- “오성의 영원한 부분은 지성이다.Pars mentis aeterna est intellectus.”라고 말하면서 마리아를 두둔했습니다. (Baruch de Spinoza: 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1677, Pars V - De Potentiâ Intellectûs, seu de Libertate Humanâ.) 그런데 에크하르트 선사는 마르타의 행위의 삶을 칭송하고, 명상적인 삶을 좋지 않게 설명했습니다. 블로흐는 두 여인에게서 미덕의 좋은 부분을 선택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정한 미덕은 “움직이는 휴식”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행동과 명상이 함께 아우를 때 그것은 참다운 미덕의 폭발력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23. 고독과 우정, 개인과 공동체: 젊은이는 시간이 많다는 데 대해 권태로움을 느끼고, 늙은이는 행복 없는 삶을 마감할까 두려움을 느낍니다. 오비디우스는 흑해의 “토미”라는 지역에서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고독을 자청하지 않았고, 귀양이라는 위리안치의 삶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자청해서 고립을 선택할 때도 있습니다. 집필을 위하여 고독을 선택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작가들은 시골 생활, 휴식 그리고 밤의 고요함을 갈망하기도 합니다. (Bloch, PH: 1130). 그래서 고독은 호불호로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정은 고독과 대립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규정하면서 우정의 윤리를 국가의 최종적 윤리로 확정한 바 있습니다. 우정은 마치 편안한 베개처럼 협동과 공존을 보관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 속에 호의, 화해 그리고 자선이라는 세 가지 인간적 태도가 자리한다고 설파했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고, 그들과 다투지 말며,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자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론이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공동체의 의미와 중요성을 알려주기에 충분합니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체제에서 우정을 고수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득의 관심뿐 아니라, 동정심이야말로 인간 행위를 조종하는 본질적 촉수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동정심과 우정이 사회적으로 확장한다고 하더라도 독점 자본주의의 시스템 속에서는 제대로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어쩌면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천하는 공동체에서 동정심과 이타주의는 간-주관적인 관계로 발전될지 모릅니다. 블로흐는 계급의 갈등이 사라진 자유의 나라에서는 인간 갈등의 요인들은 사라지리라고 믿습니다. 만약 개개인이 자신의 사적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을 두고 고민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나지 못할 것입니다.

 

(16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