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17) 희망의 원리. 제 4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3. 30. 10:43

(16 강의에서 계속됩니다.)

 

5. 파우스트, “머물러라 그대는 아름답도다.”, “고정되어 있는 지금nunc stans”: 파우스트는 돈 조반니, 오디세우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형입니다. 파우스트는 세상을 완전히 체험함으로써 자신을 완성시키고 세계를 완전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품고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인간에게는 의지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파우스트라는 인간형은 루터에게는 교만하고 사악한 인간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괴테는 위대한 창의적인 인간을 다르게 묘사합니다. 즉 파우스트는 무언가를 추구함으로써, 결국에는 구원을 받습니다.

 

세계 속에서의 주체의 깨달음은 성취된 순간이라는 본질적 문제와 관련됩니다. 그는 마지막에 이르러 어떤 성취된 순간으로서의 “고정되어 있는 지금 nunc stans”를 감지합니다. “머물러러, 그대는 아름답도다.”라는 외침은 순간적 깨달음을 뜻합니다. (Johann Wolfgang von Goethe: Faust 1 - Hamburger Ausgabe Band 3, München 1982, S. 57.) 머물러야 하는 것은 바로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어떤 깨달음은 모든 시간적 공간적 흐름을 차단시키는 순간에 불현듯 인지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사실 내용을 풀어헤친 자만이 충만한 삶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는데, 에크하르트 선사(Meister Eckhart, 1260 - 1328)는 이러한 순간을 “고정되어 있는 지금nunc stans”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성취의 순간은 완전한 존재 자체에 대한, 배경으로서의 세계가 따로 없는 형이상학적 핵심 목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 바로 그 순간 파우스트는 존재의 사실 내용을 담은 수수께끼의 비밀을 해결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존재는 신처럼 완벽할 수는 없지만, 깊은 신앙의 노력을 다하게 된다면, 최소한 어떤 순간만이라도 마치 신처럼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6. 파우스트와 정신 현상학 그리고 사건: 파우스트의 여행은 끝없이 이어지는 변증법의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헤겔이 추구한 정신의 현상학적 걸음걸이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파우스트의 역동적인 노력은 근본적으로 헤겔의 『정신 현상학』에서 나타나는 역동적 과정과 유사합니다. 파우스트는 왕궁에 머물다가, 아우바흐 술집에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그러다 헬레나와 조우하기도 하고, 간척 사업을 벌이기도 합니다. 가령 인간은 신이 될 수는 없지만, 신의 권능을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신과 같게 되려면 -위그 드 생 빅토르가 지적한 바 있듯이- 세 개의 눈, 다시 말해 “인식cognitatio”, “성찰meditatio” 그리고 “명상comtemplatio”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파우스트는 -쿠자누스가 말한 대로- “감성sensus”, “오성ratio”, “지성intellectus” 그리고 “바라봄visio”이라는 네 과정을 지나치게 됩니다. 정신 역시 1. 개별 사물과 종을 파악하고, 2. 변증법적 수의 세계를 이해하며, 3. 모든 대립의 신비로운 결합, 4. 주체와 객체 사이의 대립 등을 정확히 꿰뚫어봅니다.

 

파우스트의 삶의 과정 그리고 정신의 변증법적 움직임은 이러한 단계를 하나씩 거치고 있습니다. (Bloch, PH: 1199). 그런데 놀라운 순간에 파우스트는 세계의 진정한 접합부분을 확인하면서 이러한 매듭을 풀 수 있다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파우스트의 여행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칠 줄 모르는 모험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신의 변증법적 움직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체는 객체 자체를 수단으로 하여 객체를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주체의 단계에 들어섭니다.

 

7. 오디세우스, 탐험가의 선구자로 이해되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영웅의 수많은 모험을 서술합니다. 여기서 오디세우스는 고통을 견디면서 극복해내는 사내가 아니라, 여행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Bloch, PH: 1204). 귀향은 그에게 참으로 의미심장한 여정이었습니다. 여행자로서의 오디세우스의 모습은 단테의 『신곡』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는 의지의 화신과 같습니다. 등장인물, 베르길리우스가 화염 속에 갇혀 있는 오디세우스에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삶이 어떠했는가? 하고 묻습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키르케와 작별한 다음에 마침내 꿈에 그리던 고향집으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추호도 가정의 위안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아들에 대한 자애심도 없고, 아들 역시 아버지를 경건한 마음으로 추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내 페넬로페 역시 깊은 사랑을 안겨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다시 여행을 재개합니다. 그의 배는 지중해를 관통하여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에스파냐로 항해합니다. 오디세우스는 대서양으로 향합니다. 항로는 처음에는 서쪽으로 향하다가, 나중에는 남쪽으로 향합니다. 5개월 지나자 오디세우스는 망망대해에서 먼 곳의 높은 산을 바라봅니다.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세계였는데, 험준한 산에서 소용돌이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산위에는 지상의 천국이 자리하는 연옥의 땅이었습니다.

 

1291년 제노바 출신의 비발디는 실제로 탐험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대륙을 한 바퀴 돌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Dante Alighieri: Die Göttliche Komödie. II. Purgatorio/Läuterungsberg. Reclam, Stuttgart 2011, Canto XXVI,) 단테는 이러한 소식을 접한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단테는 지구의 반대편에 연옥이 위친한다고 믿으면서 오디세우스가 그것으로 항해했다고 묘사했습니;다. 오디세우스의 항해는 단테에게는 한계를 뛰어넘는 모험과 같았습니다. 단테가 살던 시기에 지동설을 신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지구(地球)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원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단테의 오디세우스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으로 여행한 모험가였던 것입니다. 그는 비록 작품에서 묘사된 인물이었지만, 12세기에 미국 서부지역을 발견한 그린란드인 에릭손 그리고 15세기에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선구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18 강의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