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12) 희망의 원리. 제 3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3. 18. 05:20

5. 블로흐의 자연 개념: 여기서 우리는 블로흐의 자연 개념을 요약하려고 합니다. “자연은 단순히 객체일 수 없으며, 오히려 스스로 변화하는 주체의 싹을 보존하는 게 틀림없다.” (Bloch, EM: 227,) 블로흐는 자연을 하나의 특수한 영역으로 고찰합니다. 자연에는 전사 (前史, Vorgeschichte)로부터 역사로의 이행, 필연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의 비약 등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에 관한 신화적 논의는 여기서는 자연법칙을 고려할 때 허튼 주장이며, 그저 묵시록의 판타지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묵시록의 내용을 미래 사회의 발전 가능성을 위한 사고로 부적절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블로흐는 자연의 개념을 결코 정태적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고대 철학에서 언급되는 “피지스”는 “식물 재배”라든가 “성장”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Ernst Bloch: PA: 565,)

 

이를 고려한다면, 블로흐는 자연을 “이전 인간”, 인간의 토대 내지는 인간의 배경으로 파악합니다. 자연은 부분적으로 감춰져 있으나, 부분적으로 가장 유토피아적인 내용을 포괄합니다. 그렇기에 자연은 블로흐에 의하면 변증법적 변화의 성질을 내재적으로 지닙니다. (Bloch, SO: 216,) 그렇다면 자연 속에 유토피아적인 변증법이 자리한다는 주장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주위에 즐비한 사물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내부로 파고들어갈 수 있으며, 어둠침침한 “사실 Daß”은 똑같은 방식으로 도처에서 자신의 정당한 법적 권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내부에는 하나의 의향으로서의 “사실Daß”이 엿보이며, 외부적 자연 속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밀침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을 가리키는데, 자연에 합당한 밀침은 모든 에너지의 원인으로 생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블로흐는 자연에서의 생산 과정 그리고 인간 역사에 나타나는 생산적 발전 사이에 하나의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렇기에 “자연의 가설적 동인ein hypothetisches Natur-Agens”은 일차적으로 독자적 측면에서 독립하여 파악될 수 있습니다.

 

6. 자연 주체와 기술과의 제휴: 이미 언급했듯이 연금술사들은 나중에 금을 만들어내지 못했으나, 최소한 인(Phosphor, 燐)을 발견해냈습니다. 나아가 연금술의 시도는 –우연이기는 하지만- 먼 훗날 도자기 제조기술을 발전하게 했습니다. 가령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Böttger는 연금술을 통해서 도자기 제조기술을 창안해내었으며, 스위스의 의사이자 철학자인 파라켈수스 Paracelsus는 연금술을 인체 연구에 접목시키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항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갈망은 전적으로 성취될 수는 없지만, 부수적인 작은 결실을 안겨준다는 사실 말입니다.

 

유토피아는 전적으로 성취되지는 않지만, 결과론의 관점에서 무가치하다는 식으로 매도될 수는 없습니다. 블로흐는 과학 기술의 발전 과정을 서술하면서 자연과 기술 사이의 연합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언급합니다. 자연은 “스스로 제어하고 평정을 찾지 못하는 디오니소스 신” (헤겔)이 아닙니다. 자연은 블로흐에 의하면 인간과 무관한 하나의 대상 내지는 객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의 존재는 세계의 영혼을 내재하고 있으며, 셸링이 주장한 대로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는 생산적 주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연 주체의 개념은 두 가지 사항을 포괄합니다. 그 하나는 자연 속에도 주체적 요소가 얼마든지 도사리고 있다는 세게 영혼의 사고를 가리키며, 다른 하나는 자연과 인간의 상호 보조의 관계 내지는 일치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블로흐는 『세계의 실험Experiment mundi』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에 입각해서 우리 자신이 될 것이다. Natura naturata nos iosi erimus.” (Bloch, EM 264.) 블로흐의 자연 주체의 개념 속에는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과 “산출되는 자연natura naturata”의 극대화되고 있습니다. 만약 기계적 동력과 같은 일방통행 방식의 기술 대신에 자연과 가술 사이에 어떤 상호적 협력 작업이 가능하게 된다면, 이로 인해서 더욱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리라고 블로흐는 주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의 고유한 생산성 내지는 자연 주체의 잠재적인 기능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7. 기술 유토피아로서의 건축: 집이란 인간이 단순히 거주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고대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물의 세 가지 조건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집이란 “견고firmitas”해야 하고, “유용utilitas”해야 하며, “아름다움venustas”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블로흐: 희망의 원리, 1435쪽). 실제로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건축물은 세상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건축가는 집을 짓기 전에 머릿속에 하나의 완성된 건물을 미리 떠올립니다. 말하자면 설계도와 조감도가 그의 계획 속에 하나의 상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건축물 속에는 바람직한 공간에 관한 건축 장인들의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동화 그리고 회화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찬란한 공간을 예술적으로 표현해 왔습니다. 혹자는 인류의 이상을 담은 건축물로서 솔로몬의 사원을 예로 듭니다. 건축물의 구조와 내부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의 사원은 실제 현실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이상적 공간 구도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건축가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근대에 건축물 건설에 직접 가담한 석공들은 단순한 기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은 더 나은 사회를 꿈꾸던 프리메이슨에 속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찬란한 이상적 공간을 갈구하면서 노동에 임했는데, 그들의 건축물은 자유와 평등의 의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건축 유토피아는 한마디로 가장 찬란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갈망의 상으로서 의미론적으로 도시 계획에 관한 구체적 조감도를 뛰어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8. 피라미드와 고딕 건물: 블로흐는 건축 예술의 두 가지 기본적 형태를 이집트의 건축물 그리고 고딕 건축물에서 발견합니다. 첫째로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갈구하는 의도에서 축조된 것으로서, 마치 수정(水晶)과 같은 엄격한 기하학적 구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피라미드의 제작자들은 북두칠성의 위치, 빛의 반사, 부패하지 않는 시신, 부장품 등의 장소를 주도면밀하게 설정하였습니다.

 

나아가 피라미드는 도굴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한번 잠입하면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의 구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Bloch, PH: 847.) 한마디로 이집트 건축 예술은 죽음의 수정 내지는 결정체로서 천체와 우주를 그대로 모방하여 만든 완전성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고딕 건축물은 기독교의 사랑이 마치 생명의 나무처럼 퍼져나가기를 갈구하는 의도에서 축조된 것입니다. 고딕 건축물은 프리메이슨 단체에 속하던 장인들의 갈망을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고딕 양식은 영생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면서, 위로 향헤서 수직으로 솟구치는 가잘 격정적이고 풍요로운 갈망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고딕 건물에는 수많은 장신구가 부착되어 있는데, 이는 성모의 기적과 같은 정원을 연상시킵니다. 요약하자면 고딕 건물은 그 자체 생명의 나무이며, 그리스도의 포도나무에서 드러나는 변모에 대한 의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