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14) 희망의 원리. 제 3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3. 22. 10:43

 

(13에서 계속됩니다.)

 

16. 예측된 상: 예측된 상Vorschein은 탁월한 예술 작품 속에서 엿보이는 더 나은 미래에 관한 예술적 형상입니다. 그것은 더 나은 미래가 미리 드러난 선현(先顯)의 상 내지는 예견antizipation의 상을 가리킵니다. 예술가는 예술적 대상이 품고 있는 경향성 그리고 잠재성을 극한으로 탐색하면서, 어떤 미래의 가능한 상을 형상화합니다. 예술을 매개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때 최종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바로 예측된 상입니다. 만약 예술이 사물과 예술가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깨닫는 거울이라면, 작품은 자신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너에 관한 이야기다.De te fabula narratur.” (Bloch, LA: 34). 거기에는 더 나은 미래가 예술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측된 상의 미학은 고전주의가 추구하는 교정 미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고전주의의 미학은 정태적 현실을 반복적으로 생산하면서, 어떤 완전성에 근접하려 할 뿐입니다. 세계는 문화적 작용으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오로지 하나의 규범적인 틀로써 명작이냐, 아니냐를 판독할 수는 없습니다. 더 나은 미래의 가상적인 현실상은 지금 여기의 현재 상태와는 구별되는 무엇입니다. “미적ästhetisch이라는 단어는 예술가가 대상의 직접적이고 자연적이며 역사적인 현상이 아니라, 내적으로 성취된 본질적이고 물질 이론적으로 진정한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술은 세계의 발전 내지는 파멸을 직접적으로 촉구하지는 않지만, 엔텔레케이아의 한계선상에서 세계의 다른 형상, 세계의 변화된 모습을 끊임없이 추동합니다. 한마디로 예측된 상은 현실 너머의 지평Horizont에 도사리고 있는 참된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약하건대 예측된 상은 예술 작품에 피상적으로 묘사된 상이 아니라, 예술 작품에 숨어 있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예술적 예견이며, 선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측된 상 속에는 어떤 자세와 믿음이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그 하나는 주어진 세계를 철저하려는 자세이며, 다른 하나는 주어진 세계가 필연적 변모하리라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Beat Dietschy u.a.: Bloch- Wörterbuch, Göttigen 2012, S. 672). 가령 세르게이 트레차코프가 시민 사회의 고전 작품은 거름이지, 음식이 아니다.“라고 천명했는데, 이는 예측된 상이 작품에 피상적으로 반영된 상이 아니라, 예술 창작의 의지 속에 도사리고 있는 예견과 선취와 관련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Sergei M. Tretjakow: Gesichter der Avantgarde. Porträts, Essays, Briefe. Hg. Mit Anmerkungen, Nachwort und Chronik Fritz Mierau Aufbau-Verlag, 1985. S. 67.)

 

17. 블로흐의 예측된 상과 생산 이론: 블로흐는 루카치 그리고 아도르노와는 달리 미학을 본격적으로 추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블로흐의 예술 철학은 자신의 존재론적 측면에서 명징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블로흐는 일차적으로 헤겔을 연구하면서, 헤겔이 추적한 예술 작품에 겉으로 형상화된 면모 그리고 예술 작품의 내용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예술론은 루카치와 아도르노와 부분적으로 일치성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블로흐는 셸링의 예술 철학을 도입하면서, 예술 작품의 내용보다는 예술가의 생산 행위 그리고 그 의향에 집중합니다.

 

가령 재능Genie{은 예술가 자신의 소외되지 않은, 해방된 의식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재능은 궁극적으로 예술 작품에 반영된 생산 능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습니다. (Bloch, MA: 403). 그렇기에 예술 작품을 대하는 자는 블로흐에 의하면 예술가의 저항 그리고 미래 지향적 갈망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블로흐가 예술 작품의 겉으로 드러난 내용보다는 예술가의 내적 의향을 더욱 중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현대 예술에 반영된 알레고리와 상징의 특징은 블로흐에 의하면 예술의 다의적인 방향을 간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Bloch, LdM: 379.) 블로흐는 여기서 루카치의 반영 이론에 입각한 예술적 입장보다는 현대 예술의 실험적 생산 이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복잡한 세계는 더 이상 재현의 기술만으로 재구성될 수 없으며, 때로는 수치스럽고 더럽더라도 인위적인 실험과 조작을 요청한다는 브레히트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18. 정태적 완전성으로서의 단테의 천국의 장미: 사람들은 죽음 내지는 저세상의 모습을 문학예술에서 발설하기를 망설였습니다. 누구도 천국의 찬란한 일요일을 끄집어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천국에 관한 상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작가는 블로흐에 의하면 단테 그리고 괴테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첫째로 신곡의 결말 부분에서 성자들의 천국에 관한 원형의 무대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단테의 경우 순수한 빛으로 향하는 세계의 충동은 최고 천(最高天)”, 다시 말해 엠피레움Empyreum의 광채로 명명되고 있습니다. 순수한 빛의 광채는 단테의 신곡에서는 천국의 장미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장미는 세 가지 의미로 이해됩니다. 첫 번째로 장미는 이단자의 붉은 피를 가리키는 순교자의 합창chorus martyrium이고, 두 번째로 장미는 여성의 질을 가리키는 처녀성의 처녀virgio virginum이며, 세 번째로 장미는 붉은 베일을 드리운다는 점에서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mediator Dei et hominum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턱대고 장미를 갈망의 장소를 지칭하는 사물이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여기서 말하는 장미는 지상의 사물과는 다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Bloch, PH: 974.) 천국의 장미는 하나의 완성된 공간에 대한 상징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이로써 천국의 장미가 하나의 정태적 완전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9. 완전하게 되려는 역동적 에너지로서의 파우스트 산맥: 천국의 장미가 완전성에 관한 예술적 비유로 이해된다면, 파우스트의 산맥의 상은 완전으로 향하려는 인간의 역동적 의향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파우스트는 사방팔방 유한성 속으로 향하면서, 끝내는 무한성 속으로 향합니다. 파우스트의 천국이 자리하는 장소는 준험한 알프스산맥과 같은 공간입니다. (Bloch, PH: 976). 단테의 경우 자연의 상은 꾸미고 명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묘사되지만, 괴테의 경우 높은 지역은 계속 상승하는 공간으로 존재합니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사용한 틀은 원형이 아니라, 산맥이었습니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지역은 초월 행위로 머물 뿐, 초월을 끝낸 상태가 아닙니다. 파우스트의 산맥은 연속적으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공간으로 이해됩니다. 단테의 천국은 인간이 죽은 다음에 도달할 수 있는 최적의 완전한 공간입니다. 이는 최후의 안식과 휴지를 가리킵니다. 단테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정신적 은사로 삼았는데, 그의 스콜라 사상이야말로 천국에 관한 단테의 입장을 반증해줍니다. 피조물은 신의 은총에 의해서 운명에 규정한 대로 신의 선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괴테의 파우스트는 휴식의 상태로부터 거리감을 취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레싱과 칸트의 견해를 받아들여서 휴식의 상태로 향해 끝없이 전진해 나가지요. 요약하건대 단테가 말하는 천국의 장미가 완전성perfectio에 관한 예술적 상이라면, 파우스트의 산맥은 완성 가능성 내지는 완전 가능성perfectibilité에 관한 예술적 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5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