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13) 희망의 원리. 제 3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3. 19. 14:52

(12에서 계속됩니다.)

 

9. 지리학의 유토피아: 유럽 사람들은 찬란한 인도에 관한 갈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기원후 950년에 유럽 전역에 요한 장로의 편지가 돌아다녔습니다. 편지에 의하면 인도라는 지역에는 온갖 기이한 물건들이 즐비하고, 사람들은 그야말로 지상 낙원에서 풍요롭게 살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편지 속에는 세상의 모든 동물 그리고 돌에 관한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심지어는 북극에 사는 흰곰까지 언급될 정도입니다. 요한 장로의 편지는 인도에 관한 기이한 전설을 퍼뜨리게 하였으며, 십자군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을 황홀하게 했습니다. 어쨌든 인도에 관한 기상천외한 전설은 동방 여행에 관한 꿈을 키우게 하였는데, 결국에는 신대륙 발견으로 이어졌습니다.

 

서구 사람들은 서쪽으로 항해하여 인도를 발견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이슬랜드의 탐험가 에릭손은 1003년에 앵글로아메리카, 즉 북아메리카의 서해안을 여행하였습니다. 마젤란은 범선으로 세계일주를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험적인 항해는 오로지 향료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지상의 천국을 발견하려는 고결한 꿈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Bloch, PH: 908) 그러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1451 - 1506)는 지상의 천국을 발견하려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많은 유럽인은 인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동쪽 지역을 여행하다가 사라센 제국의 군인들에게 목숨을 잃곤 하였습니다. 만약 서쪽으로 여행한다면, 인도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콜럼버스는 숙고하였습니다.

 

10. 만약 지구가 둥글다면? 지상의 천국을 찾으려는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인도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쪽으로 여행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만약 지구가 둥글다면, 서쪽으로 향해 배를 몰면, 인도에 당도할 수 있으리라고 콜럼버스는 추론하였습니다. 세네카에 의하면 대서양의 띠는 언젠가 찢어져, 세상의 끝ultima Tule은 더 이상 지상의 극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콜럼버스는 플루타르코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만약 달이 지구의 거울이라면, 그 어두운 부분은 틀림없이 미지의 대륙을 가리킬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대서양 항해는 만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대서양은 파도와 폭풍우로 가득 찬 끔찍한 바다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에 기록되어 있는 “더 아상 나은 곳은 없다non plus ultra”라는 비명의 의미와 관련됩니다. 과거에 페니키아 상인들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을 거쳐서 영국으로 이어지는 항로를 독점하기 위해서 헛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박설호: 라스카사스의 혀를 빌려 고백하다, 울력 2008, 22쪽.)

 

11. 콜럼버스의 서인도 제도 발견: 콜럼버스는 백일 동안 항해를 계속하다가, 남서쪽으로 날아가는 사랑앵무 떼를 발견합니다. 이때 콜럼버스는 항로를 서남서 방향으로 옮겼습니다. 만약 항로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콜럼버스가 이끄는 세 척의 배는 아마도 플로리다에 도착했을 게 틀림없습니다. 콜럼버스는 생전에 네 차례에 걸쳐 대서양을 항해했는데, 단 한 번도 미국 땅에 발을 디디지 못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 (Alexander von Humboldt, 1769 - 1859)의 발언입니다. 그는 우연히 발견된 앵무새 떼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놓았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콜럼버스가 플로리다에 당도했더라면, 오늘날 미국을 차지한 자들은 에스파냐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합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계의 문명을 장악한 국가는 아마도 에스파냐였을 테고, 에스파냐어가 세계 통용어로 통용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약하건대 콜럼버스는 지상의 천국인 인도를 찾다가, 인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서인도제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땅은 천혜의 인도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나중에 사기꾼 선원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신대륙이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12. 새로운 장소: 남쪽 나라.: 탐험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려는 갈망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남쪽 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동화 속에서 문학적 상상을 통해서 묘사된 바 있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중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땅terra australis”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Bloch, PH: 913.)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남반구가 물로 뒤덮여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드리시의 주장을 비판하였습니다. 마르코폴로는 남쪽 대륙이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그 근처를 지나친 바 있습니다. 뒤이어 사람들은 자바, 수마트라, 순다 섬이 대륙의 앞부분이라고 착각했습니다. 1770년 쿡 선장은 오스트레일리아에 발을 디뎠지만, 대륙의 내부가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 몹시 실망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남쪽 대륙에 관한 갈망의 상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가브리엘 드 푸아니는 『발견된 남쪽 지여La terre australe connue』이라는 소설에서 남쪽 대륙에는 자웅양성의 인간이 거주한다고 묘사하였으며, 레티프 드 라 브르톤은 자신의 작품에서 방종하게 살아가는 기이한 인간들을 묘사한 바 있습니다. 이렇듯 문학 작품은 남쪽 나라의 풍요로움에 관한 갈망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갈망이 없었더라면, 새로운 땅은 결코 발견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땅은 탐험가의 마음속에 황홀한 축복을 안겨주는 칼림소의 섬 내지는 엘도라도의 낙원으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3. 회화 예술 속에 반영된 갈망의 상: 지리학의 유토피아 다음으로 블로흐는 회화 예술을 다루고 있습니다. 회화 예술 속에는 어떤 더 나은 삶의 바람직한 장소가 예술적으로 선취하고 있습니다. 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 1880 - 1916)는 “그림 그리기는 다른 공간에서 다시 태어나려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Bloch, PH: 929.) 따라서 그림 속의 공간은 화가가 다시 태어나고 싶은 곳과 같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화폭에 그려진 일차적인 상이 아니라, 화폭에 담으려는 화가의 내적 갈망을 투시하는 일입니다.

 

블로흐는 장 앙트완 와토의 그림 「시테라로 향한 승선」을 언급합니다. 와토는 루벤스의 그림에 착안하여 시테라로 향하는 승선을 세 번에 걸쳐 그렸습니다. 물론 관능적 사랑이란 당시에 유행하는 평이한 주제이지만, 쾌락의 욕망이 충족될 수 있는 섬을 휘황찬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화가, 렘브란트는 은은한 광채를 통해서 어떤 동화 속에 자리하는 “동방으로부터의 빛ex oriente lux”을 미학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러한 빛은 가장 평화롭고 축복으로 가득찬 공간을 가득 챙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14. 고전주의와 관조의 미학: 시인들은 오래전부터 어떤 예술적 전망을 드러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예견이며, 꿈틀거리는 갈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의-고전주의 경향은 이와는 달리 과거지향적입니다. 예술의 의지는 의-고전주의에 의하면 기껏해야 잠자러 가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이에 의하면 예술은 끓어오르는 희망이 아니라, 마음을 진정시키는 관조를 추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순수한 관조 미학에 관한 논의는 임마누엘 칸트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칸트는 관여 없는 즐거움으로 대상에 대한 단순한 상상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순수한 관조 미학 내지는 물화된 예술 이론은 주어진 무엇만을 다룰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가능한 무엇 내지는 더욱 아름다운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순수한 관조 미학은 쇼펜하우어에 의해서 어떤 형이상학적 특징을 장착하게 됩니다. 쇼펜하우어는 “관여 없는 즐거움interesseloses Wohlgefallen”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술은 현상 속에 하나의 축복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순수한 세계의 눈은 언제나 목표에 도달하는데, 이는 가령 차분한 음악을 수용할 때 가능하다고 합니다. 나중에 하이데거는 쇼펜하우어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잘못 이해했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M. Heidegger, Nietzsche: Der Wille zur Macht als Kunst, Gesamtausgabe Bd. 43, Frankfurt a.M. 1985, 129.) 이러한 방식의 예술은 블로흐에 의하면 정적(静寂)에 불과하며 세계 변화를 자극하는 역동적 특징을 전혀 담지 못하고 있습니다.

 

15. 문제는 관조와 총체성이 아니라, 미래를 선취하려는 예견에 있다: 관조의 미학은 현실을 하나의 순간적인 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가령 사람들은 현실에 여전히 불충분한 무엇을 마치 폐쇄적인 사실로 규정하면서, 그것을 이른바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Bloch, PH: 946.) 만약 문학적 현실이 현상과 본질 사이의 계급적인 모순 관계를 담고 있다면, 그것은 루카치에 의하면 리얼리즘 문학이 답습해야 하는 가장 훌륭한 범례 내지는 하나의 틀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루카치는 이상적으로 둥글게 만든 틀 내지는 규격을 현실적인 상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학예술을 논할 때 완결되지 않은 세계 그리고 과정에 합당하게 개방된 가능한 세계를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현실은 과정에 합당하게 개방되어 있으므로 총체성이라는 카테고리로 싸잡아 포괄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적으로 주어진 현실은 딱딱한 폐쇄적 물품처럼 포장되는 무엇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술은 단순히 가설로 이해되는 과정이 아니라, 실제의 현실에서 어떤 미래에 대한 전망에 합당한 무엇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미래에 관한 이러한 전망은 예술이 선취하는 “예측된 상Vorschein”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혹은 은근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예술은 내용상으로 그리고 소재상으로 폐쇄성을 파기하게 됩니다.

 

(14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