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9) 희망의 원리, 제 2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3. 8. 05:50

(앞에서 계속됩니다.)

 

16. 카베의 중앙집권적인 거대한 국가 유토피아: 거대한 체계로서의 국가 유토피아는 카베 (Étienne Cabet, 1788 – 1856)의 공동체 국가로 설계되었습니다. 소설 『카리스탈 경의 이카리 여행과 모험Voyage et adventures en Icarie』은 1840에 간행되었습니다. 주인공, “나”는 영국 출신의 귀족, 윌리엄 캐리스달입니다. 1834년 윌리엄은 우연히 “이카리”라고 하는 미지의 땅에 관한 책자를 접하고, 그래서 1835년 12월 22일에 프랑스의 친구와 함께 “이카리”라는 섬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이카리는 최근에 발견된 섬으로서, 유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두 사람은 디나로스Dinaros에서 역사학 교수로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이카리의 역사 그리고 이곳의 생활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이카리아”는 산업이 고도로 발전된 사회 형태로서 강력한 노동자 국가에 의해서 영위됩니다. 여기서는 사유재산제도 그리고 화폐가 철폐되어 있습니다. 미래의 국가는 거대하게 조작된 산업 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특히 증기 기관을 활용하여 놀라운 생산력을 활용합니다. 하루는 일곱 시간으로 분할되고, 제각기 국가가 규정한 규칙으로 일사불란하게 활동합니다. 모어 캄파넬라의 고전적 유토피아에서는 근검절약이 미덕으로 되어 있는데, 이카리 공동체 사람들은 이를 준수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생산력을 활용함으로써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모든 경제는 산업 위원회의 계획에 의해서 관리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이카리아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선취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카베의 이카리 공동체에 몇 가지 하자가 자리한다는 사실입니다. 1. 모든 사람은 신분에 맞는 유니폼을 착용해야 합니다. 2. 노동은 시간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해집니다. 3. 사람들은 독재자, 이카르를 우상으로 숭배해야 합니다. 4. 당국은 예술을 검열하고 분서갱유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카베의 중앙집권적 유토피아를 “나폴레옹 치하의 군사 독재의 국가적 조감도”라고 비난했는데,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17. 클로드 앙리 드 생시몽의 중앙집권적 유토피아 사상: 생시몽 (Claude- Henri de Saint Simon, 1760 - 1825)은 농업 중심적으로 설계되는 문학 유토피아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산업적 시스템의 유토피아를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었습니다. 생시몽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협동을 강조함으로써 거대한 국가의 전체적 부를 창조할 수 있는 생산력 증강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사고는 사회 전체의 거대한 국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와 자본가의 개별적 이익에 일방적 힘을 실어주지는 못했습니다.

 

생시몽의 사상은 지엽적이고 작은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의 번영과 이득을 도모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넓은 시야, 사회 전체의 이득과 평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어떤 강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귀족이었던 생시몽은 19세기 중엽에 나타난 초기 자본주의의 폐해 내지는 사회 계층적 갈등 등을 예리하게 투시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생시몽 사상은 보수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 폭넓게 수용되었습니다. 증기기관과 산업 그리고 진보에 열광하던 생시몽으로서는 작은 땜질 처방 대신에 새롭고 포괄적인 중앙집권적인 체제가 우선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모든 크고 작은 현실적 문제점은 오로지 공명정대한 국가의 질서 그리고 합리적인 법체계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협력하여 건설적인 방향으로 노력하는 게 급선무라고 여겼습니다. 가령 생시몽은 성장하는 시민 계급의 “행정 능력capacité administrative”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특히 은행가는 경제적 삶을 관장하는 중앙 위원회의 대표직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앙위원회가 모든 계획을 진두지휘하고, 이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18. 생시몽의 한계: 마지막으로 생시몽의 사상적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생시몽은 사회적 부를 창출해낼 수 있는 산업 시스템을 강조했을 뿐, 그 시스템이 어떠한 사람들에 의해서 영위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산업 시스템을 움직여 나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감시하고 감독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러한 감시 감독의 기능이 배제되어 있다면, 생시몽이 의도하는 산업의 시스템은 자본가의 농간에 얼마든지 조작되고 놀아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생시몽은 자신의 논리에 추상적으로 골몰한 나머지, 주어진 현실에서 시민 계급이 어떻게 이기주의적으로 사악한 부르주아로 변신하는지를 예리하게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셋째로 진보에 대한 그의 무한한 낙관주의는 결국 자본가와 무산계급 사이의 갈등 을 등한시하게 했습니다. 물론 그가 가진 사람과 가지지 않은 사람 사이의 투쟁에 관해서 함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생시몽은 사회적 갈등의 해결보다는 사회적 생산력의 증강을 무엇보다도 강조했으므로, 사회 변화를 위한 효모의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넷째로 생시몽은 기득권을 누리려는 기독교 교회의 세력을 귀족의 세력과는 별개로 파악하고, 이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자신의 모든 이득을 포기하면서 교회 세력을 맹렬하게 비판했던 볼테르의 태도와는 전적으로 대조되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생시몽은 말년에 기독교적 사랑을 내세우면서 나눔과 기부의 미덕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넷째로 생시몽은 사회 내의 지엽적으로 보이는 난제들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그는 남녀평등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성의 지위에 관해서 혁신적인 견해를 제시한 사람은 놀랍게도 생시몽주의자들이었습니다. 네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생시몽의 사상은 부분적으로 실제 삶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실제로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 건설 계획을 착수한 사람들도 생시몽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중앙집권적인 계획 경제의 제체는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