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8) 희망의 원리, 제 2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3. 5. 11:20

 

(앞에서 계속됩니다.)

 

10.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프랜시스 베이컨은 대영 제국의 수상으로 일하다가, 말년에 뇌물수수 협의로 파직되어 자신의 영지로 귀향합니다. 이때부터 약 7년 간 자연과학을 탐구하였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시대 비판은 사회 전체의 궁핍함, 빈부 차이의 극복 그리고 상류층의 사치 풍조 등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는 빈부 차이라든가, 사유재산 제도 등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습니다. 베이컨의 유토피아는 사회적 문제보다는 열악한 봉건적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즉 현세의 삶은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향상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기술 유토피아”의 전형입니다. 베이컨은 1567년 에스파냐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남태평양에 있다고 하는 땅을 “새로운 아틀란티스”로 규정합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모어와 캄파넬라가 설계한 바 있는 장소 유토피아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유재산 제도는 용인되고, 일부일처제의 가족제도는 환영받고 있습니다. 섬의 한복판에는 “솔로몬의 연구소” 내지 “여섯 날 작업의 학원The College of the Six Day’s Works”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36명의 과학자로 구성된, 자로 잰 듯이 명징하게 조직화된 연구 공동체입니다. 솔로몬 연구소는 그야말로 도시국가의 눈이며, 등불과 같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베이컨의 유토피아가 “다다익선(多多益善)을 지향하는 소유의 왕국”이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베이컨의 귀납법적 사고는 중세의 이데올로기를 허무는 결정적인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삼라만상은 신의 뜻에 의해서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신의 뜻과 무관한 고유한 법칙을 품고 있는데, 이는 모든 선입견을 배제한 귀납법적 방법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혁명적 접근방법에도 불구하고, 베이컨의 기술 발전의 사고에는 결정적인 하자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베이컨이 오로지 물리 역학에 의존함으로써 질적 자연, 영혼 그리고 유기체의 생명에 관한 사고를 무시했다는 살입니다. 베이컨은 “공공의 매춘부”인 자연을 구속해야 한다고 설파합니다. 인간(남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연을 속박의 상태로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자연의 내장 그리고 질을 파고드는 일 (광산업)이며, 다른 하나는 용광로와 모루를 사용하여 새로운 금속을 만들어내는 일 (야금 기술)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창녀에 해당하는 자연은 인간 (남성)의 손아귀에서 속박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1. 자유와 질서, 연금술과 점성술의 토대: 모어의 유토피아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 관한 구도 내지는 틀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블로흐는 이 점을 고려하여 모어의 국가 소설을 자유의 유토피아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자유의 유토피아는 바람직한 사회를 새롭게 인위적인 제도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연금술적인 실험으로 이해됩니다. 특히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종교적 관용을 베푼 것은 당시 영국의 헨리 8세의 폭정을 차단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모어의 유토피아에 비하면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는 정의롭고 질서 잡힌 유토피아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문 제도와 노예제도를 과감하게 페지한 것은 정의롭고 올바른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필수 사항이라고 캄파넬라는 생각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캄파넬라의 유토피아를 질서 유토피아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심하게 고문당하고 26년 동안 교도소 생활을 영위한 캄파넬라는 고문과 영어(囹圄)의 형벌이 얼마나 처참한가를 체득한 바 있었습니다. 법적 처벌로서의 사형제도는 존속되고 있지만, 형의 집행은 범법자가 죄를 인정하고, 처형당하기로 스스로 결심할 때까지 연기됩니다. 이는 과히 인권을 배려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약하건대 자유의 유토피아가 새로운 사회의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면, 질서의 유토피아는 『태양의 나라』 의 일상이 철저히 점성술의 규칙에 따라 영위된다는 점에서 질서의 특성을 알려줍니다.

 

블로흐는 자유와 질서가 변증법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자유는 질서를 통하여 보다 명료하게 표현된 내용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질서 역시 명확하게 규정된 자유의 내용을 담을 수 있는 틀이며 공간이어야 합니다. 자유와 질서는 블로흐에 의하면 결코 보수적 시민 사회에서 자유주의를 통해서 변증법적으로 결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주의의 이상을 도입함으로써 가능한 실험이라고 합니다.

 

12. 자연법사상과 유토피아: 자연법을 둘러싼 법적 갈등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하나의 범례로 드러납니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이자, 여동생인데, 쌍둥이 동생들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테이케스는 권력을 차지하려고 골육상잔을 벌였는데, 두 사람 모두 목숨을 잃게 된 것이었습니다. 크레온 왕은 에테오클레스를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게 했지만, 폴리테이케스의 시신을 야산에 버려 맹금의 밥이 되도록 방치하고 맙니다. 이때 안테고네는 어두운 밤에 반역자로 몰린 동생 폴리테이케스의 시신을 수습하여 땅에 묻어주었습니다.

 

문제는 그미의 행동이 테베의 법에 저촉되는 것이지만, 인륜을 저버릴 수 없다는 자연법적인 기준으로는 무죄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법이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스토아 사상가들은 법적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자연법과 실정법이 다르다는 것은 로마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인민과 권력자 사이의 정치적 관계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기실 자연은 만인이 지켜야 하는 법칙으로서의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스토아 사상에 의하면 자연은 그 자체 “로고스”로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타인에게 예속되지 않고, 남으로부터 목숨과 건강, 자유와 재산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안티고네를 둘러싼 문제는 실정법과 자연법에 관한 논쟁을 부추겼는데, 이러한 논쟁은 심지어 헤겔의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3. 자연법과 저항 정신: 서양에서 법은 로마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법은 울피아누스에 의하면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채무자에 대한 채권자의 권한을 확정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에 법은 처음부터 만인을 위한 게 아니라, 돈과 권력을 가진 자를 위해서 제정된 것입니다. 여기서 실정법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실정법은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주지 못했습니다. 이 점이야말로 자연법적 저항이 어째서 필요한가를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계몽주의자, 알투시우스Althus는 “부정한 군주에 대한 저항은 폭동이 아니라, 상처 입은 자신의 권한을 보존하려는 행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실 자연법은 두 가지 특징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규범 능력norma agendi”이며, 다른 하나는 “행동 능력facultas agendi”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전자는 법으로 정해진 규칙으로서 위로부터의 계율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개개인의 인권을 가리킵니다. 규범 능력이 이를테면 국가의 공권력에 해당한다면, 행동 능력은 비근한 예로 촛불 집회로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블르호는 이 가운데 후자, 특히 “행동 능력”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수단으로 규정합니다. (에른스트 블로흐: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 열린책들 2011, 456 이하) 민주주의의 저항 운동은 블로흐에 의하면 특히 “행동 능력”을 극대화할 때 비로소 원하던 바를 성취할 수 수 있으며, 사회 유토피아를 보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연법의 사상은 나중에 피히테의 “폐쇄된 상업국가”에 관한 설계에서 하나의 해결책으로 형상화된 바 있습니다.

 

14. 오언의 소규모의 유토피아 공동체: 근대에는 가내수공업이 득세했습니다. 중세의 정원 경제는 붕괴하고, 사람들은 대도시로 이주하여 매뉴팩처의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초기 자본주의의 14시간 노동과 가난 그리고 사회적 갈등이 커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미성년자 역시 학교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채, 현장 노동에 몰두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굶주림, 고통스러운 작업 에 시달렸으며, 저녁에는 길거리에서 자신이 만든 물품을 판매해야 했습니다. 로버트 오언 (Robert Owen, 1771 – 1858)는 노동자와 미성년자의 참혹한 일상을 목격하였습니다.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그들의 인간적 삶을 위해서는 노동과 즐거운 삶을 병행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코뮌이 설립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로써 생겨난 것이 뉴 라나크의 노동자 공동체입니다.

 

오언은 노동자들의 행복한 노동과 자치적인 삶을 위해서 헌신했을 뿐 아니라, 집필에도 몰두했습니다. 그의 책은 오늘날 노동자의 복지 체계를 선취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최소한 하루 8시간 일하면서 즐겁고 보람찬 일과를 보내야 한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오언이 가부장의 전통적 가족제도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사실입니다. 죄악의 삼위일체는 오언의 견해에 의하면 사유재산, 결혼 그리고 기독교라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을 불행의 웅덩이로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은 일반 노동자를 옥죄고, 종교와 가부장을 위한 결혼제도는 여성과 미성년자들을 부자유의 질곡으로 갇히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언의 공동체는 분업, 빈부 차이 그리고 관료주의는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로써 오언의 노동자 공동체는 바람직한 임금 체와 후생 복지, 노동자 교육 그리고 여가 활동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가장 인간적인 코뮌의 삶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15. 푸리에의 공동체 “팔랑주”: 푸리에 (Charles Fourier, 1772 – 1837)는 무정부주의의 관점에서 노동자 공동체 팔랑주를 설계했습니다. 팔랑주는 개인적이며 자생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약 천오백 명 이상으로 구성된 공동체입니다. 놀라운 것은 푸리에가 사유재산 제도를 완전히 철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작은 재산을 허용함으로써,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의 독립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푸리에는 주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유재산의 개념은 토지라든가, 부동산 그리고 공동의 농기구 등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가방, 책, 약간의 보석과 장신구 등에 국한될 뿐입니다.

 

푸리에게 중요한 것은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삶의 향유라고 합니다. 두 시간 지난 뒤에 다른 일감으로 교체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 주민들은 제각기 30개의 직종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결혼제도와 상관없이 파트너를 선택하여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푸리에는 일부일처제의 폐쇄적인 구도 하에서는 결코 자유로운 사랑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공동체 사람들은 스스로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 사랑의 파트너를 수시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렇듯 푸리에는 일부다처 내지는 일처다부의 생활 관습이 비록 더럽고 불결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용인되는 게 사랑으로 인한 쓰라림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