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P, 티투스 마키우스 플라우투스 (기원전 254 – 184)는 헬레니즘 시대에 활동하던 희극작가입니다. 주지하다시피 기원전 로마는 비교적 평화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대 로마에서는 일관된 질서가 없었지만, 사람들은 전쟁 없이 비교적 평화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기실 전쟁은 사람들에게 진지함을, 평화는 유쾌함을 선사하는 법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로마인들은 비극보다는 희극을 더 애호했습니다. 극작가는 이를 충분히 반영하여 사티로스의 해학을 작품 속에 담았습니다. 플라우투스는 160편 정도의 작품을 집필했는데,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 것은 21편에 불과합니다. 플라우투스의 희극은 즉흥적으로 이어지는 대화, 욕설, 사랑 고백, 그리고 속담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관객을 자연스럽게 미소짓게 합니다. 플라우투스는 구어체의 생생한 표현을 통해서 유행어를 창조함으로써, 언어상으로 라틴어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로써 플라우투스의 문학사적 위상은 메난드로스와 테렌티우스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작품 「포로Captivi」는 도합 1036 행으로 이루어진 희극입니다. 전해지는 문헌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어떠한 작품을 참고했다는 언급이 남아닜지 않습니다. 그 밖에 우리는 로마의 어디서 처음으로 공연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작품 속의 내용 역시 이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전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플라우투스가 내용상으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참고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놀랍게도 작품에서 단 한 명의 여성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점이 작품의 결정적 취약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극작품의 배경은 그리스의 서부 지역인 아이톨리아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 지역은 지금에는 에트리아라고 불리는데, 작가는 아이톨리아 그리고 엘리스라는 가상적 장소를 작품의 두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헤지오라는 이름을 지닌 나이든 남자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엘리아 전쟁 포로를 구매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의 아들, 필로폴레모스는 엘리스 군대에 전쟁포로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는 전하는 소식통에 의하면 엘리아의 어느 가문의 노예로 매도되었다고 합니다. 헤지오는 전쟁 포로를 구매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아들과 노예를 서로 교환하려고 결심합니다. 필로폴레모스는 그에게 참으로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약 16년 전에 헤지오는 어린 둘째 아들의 실종을 체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간에 아들을 찾아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그는 집정관을 통해서 두 명의 포로를 구매하게 됩니다. 한 사람은 필로크라테스라는 이름을 지닌, 부유한 청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노예 신분인 틴다루스라는 젊은이였습니다. 헤지오는 수소문하여 다음의 사실을 알아냅니다. 즉 필로크라테스의 부모가 그의 아들을 노예로 구매했다는 게 바로 그 사실이었습니다. 헤지오는 일단 틴다루스를 신속하게 엘리스로 보냅니다. 이는 포로 교환을 위한 조처였습니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필로크라테스를 돌려주는 대가로 약간의 보상금을 덤으로 받겠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헤지오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정작 엘리스로 떠난 포로는 노예, 틴다루스가 아니라, 필로크라테스였습니다. 헤지오는 일을 서두르다가 필로크라테스와 틴다루스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나중에야 헤지오는 몹시 안타까워합니다. 헤지오는 집에 머물게 된 틴다루스를 즉시 채석장으로 보내서 사역하게 조처합니다. 그런데 필로크라테스는 다음날 헤지오에게 되돌아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도와준 노예, 틴다루스를 구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필로크라테스는 자신의 부모로부터 몸값에 해당하는 보상금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헤지오의 아들, 필로폴레모스를 대동하고 아이톨리아로 귀환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오로지 틴다로스를 구하기 위한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헤지오는 꿈에 그리던 아들을 만나게 되자, 그를 뜨겁게 포옹합니다. 그런데 아들 필로폴레모스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전해줍니다. 그것은 오래전에 행방불명된 헤지오의 둘째 아들이 바로 틴다로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약 16년 전에 그의 집에 스탈라그무스라는 이름의 이기적인 노예가 일하고 있었는데, 주인이 즉시에 새경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데 대해서 앙심을 품고, 헤지오의 둘째 아들을 유괴합니다. 그는 네 살된 영아를 엘리스로 데리고 가서 노예 상인에게 팔아치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필로폴레모스는 필로크라테스와 함께 배를 타고 아이톨리아로 돌아오는 길에서 모든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에 도움을 준 사람은 자신의 노예인 에어가실리우스였습니다.
이야기가 사필귀정으로 끝나게 되는 데에는 에어가실리우스가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에어가실리우스는 대식가이자 미식가인데, 특별한 직업 없이 다른 사람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한량이였습니다. 오래 전에 그는 필로폴레모스를 주인으로 모셨는데, 함께 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에어가실리우스는 극중 사건에 관여하면서,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불만을 표출합니다. 예컨대 필로폴레모스와 함께 적국인 엘리스의 포로가 되는 바람에 풍요롭고 맛깔 넘치는 음식을 즐길 좋은 기회를 수없이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에어가실리우스는 주인공의 둘째 아들의 특징을 사람들에게 전해줌으로써, 틴다로스가 헤지오의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합니다. 마지막에 아버지와 두 아들 그리고 필로크라테스와 에어가실리우스가 모여서 거나한 만찬을 즐깁니다. 그러는 동안에 사악한 인간, 스탈라그무스는 자신의 죄로 인해 유치장에 갇히게 됩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플라우투스의 극 작품을 비난하였습니다. 우스꽝스럽지만, 내심 천박한 진지함만을 드러낸다는 것이었습니다. 플라우투스의 희극은 부분적으로 우스꽝스러운 해학을 그대로 연출하지만,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문학적 감흥이 크지 않으며, 그저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만 드러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작품 「포로」는 플라우투스의 작품 가운데에서 기이할 정도로 독특합니다. 작품의 프롤로그에서 창녀의 자식, 뚜쟁이 그리고 허풍선이 군인들이 지엽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 여성이라고는 한 명도 무대 위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유머러스한 상황극을 연출할 때 여러 대조적인 주변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은 당연하고 필수적인 조처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관객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이러한 주변 인물들이 전체적인 줄거리 그리고 주제와 적절하게 연결되어야 극 작품은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작품에서는 여러 가지 우연한 계기가 출현하는데, 이는 전제적인 이야기의 치밀한 구조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희극적인 요소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선하다고는 하지만, 제각기 이익을 추구하는 동물입니다. 예컨대 헤지오는 아들을 찾겠다는 일념을 품고 있지만, 포로 교환을 통해서 약간의 보상금을 더 받아내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틴다루스는 자신의 주인인 필로크라테스를 애호하지만, 내심 그로부터 약간의 보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옷을 갈아입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나아가 기생충과 같은 한량, 에어가실리우스가 자신이 주인으로 모시는 필로폴레모스를 몹시 따르는 까닭은 그가 자신에게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작품은 이런 식으로 기회주의 그리고 이타주의, 인간적 미덕 그리고 돈에 대한 욕심, 교활한 행동 그리고 우둔함, 형제애 그리고 기만, 분노 그리고 용서 등의 심리 상태가 등장인물의 마음속에 뒤섞여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이런 식으로 두 개의 양극 사이에서 돌출한다는 게 플라우투스의 지론이었습니다.
물론 작가 플라우투스는 쓰라린 마음과 도덕적 지조에 근거하여 사건을 전개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극작가는 희생당하는 등장인물을 애호하는 코미디언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좋은 의도와 사악한 의도가 서로 엉키다가 결국에는 좋은 쪽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로써 자신의 이마에 카인이라는 악인의 낙인을 찍는 자는 바로 스탈라그무스입니다.
스탈라그무스는 마지막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일갈합니다. “대체 너느 누가 이러한 불쌍한 영혼을 지금까지 정당하게 대해준 적이 어디 있었던가?” (1028 행). 말하자면 세상이 자신을 돕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악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인간관계에 의해서 파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작품의 마지막 대목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선한 자는 차제에 반드시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Boni meliores fiant” 이 말은 권선징악이 아니라, 슬픈 냉소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작품에서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여성과의 하룻밤 정사에 관한 희희낙락거림의 장면은 슬픈 냉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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