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11. 파이테타리오스의 성스러운 결혼식: 조만간 꿈나라에 하나의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것은 헤라클레스, 포세이돈 그리고 거칠게 생긴 야만의 신 등으로 구성된 신들의 사절이 도착하리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새들은 제우스의 도전자, 프로메테우스로부터 회담을 유리하게 이끄는 방법을 미리 배운 바 있었습니다. 게다가 헤라클레스는 상습적인 대식가였는데, 새들은 융숭한 식사 대접으로 그의 배를 가득 채우게 합니다. 배부른 헤라클레스는 새 왕국에 유리한 결정을 내리도록 돕겠다고 약속합니다. 꿈나라의 요리사들은 군침 돋게 만드는 음식 냄새를 풍겨, 헤라클레스로 하여금 모든 타협책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했던 것입니다. 결국 제우스는 파이테타이로스를 천국으로 초대하여, 천국의 여왕으로 하여금 인도하게 조처합니다. 마지막에 파이테타이로스는 천국의 여왕과 성스러운 결혼식을 치릅니다. 그는 결혼식의 주인공으로 가마에 실려 신부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이때 새 합창단은 축복의 노래를 부릅니다.
12. 극작가의 관료주의적 시각: 친애하는 A, 물론 우리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장 가운데 한 가지를 문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아리스토파네스가 추호도 천민들에 대해서 동정심을 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황금의 시대에 관한 천민들의 기억은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하면 무척 위험한 것이라고 합니다. 천민들이 바라는 “억압과 강제 노동이 없는 국가”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란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하면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식탁에서 즐기는 만찬도 아니고, 폭음이나 만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쾌락주의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비판은 어떤 현실적 관료주의자의 태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작품의 한계성은 바로 여기서 치명적으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파네스 역시 계급 차이로 인한 천민들의 고통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의 엘리트로서 세계를 위에서 내려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파네스가 인접 섬나라들을 집어 삼키려는 아테네인들의 식민지 쟁탈과 같은, 황당한 제국주의의 욕망을 비판하기 위해서 작품을 집필했을 뿐, 무조건 모든 인간의 동경과 갈망의 욕구를 비아냥거리기 위함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Claeys: 22). 따라서 우리는 작품을 해석할 때 추상적 관점에서 하나의 결론으로서의 원론만 내세워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혹자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새들」을 인용하면서, 저 세상의 다른 삶에 대한 열망을 나쁘다고 주장합니다만, 이는 “천민들의 열망”이라는 단서가 붙을 때 비로소 타당합니다.
13. 부분적으로 언급되는 공산주의 사회의 유토피아: 아리스토파네스는 무엇보다도 신화 이야기 그리고 고대인들의 공산주의의 시각을 비판하려고 하였습니다. 고대인들은 공산주의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습니다. (1) 남자들은 여성들과 얼마든지 동침할 수 있으며, 여성들은 아이를 공동체 내에서 키운다, (2) 공산주의 사회는 강제로 노동하려고 하지 않는다. (3) 모두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향락적으로 살아간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세 가지 사항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시민이 아니라, 천민들이 먹고 마시는 일을 반복한다면, 사회적 질서가 무너지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민들의 향락은 인정하지만, 천민의 향락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아리스토파네스의 견해는 플라톤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플라톤은 철인에 의해서 통치되는 국가를 설계했습니다. 바람직한 국가는 플라톤에 의하면 모든 향락, 웃음을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시와 음악은 사람들을 방탕하게 만들기 때문에 배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육체적 사랑 또한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좋게 평가되지 않습니다.
14. 문학의 창조적 오해 속에 반영된 더 나은 유토피아: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리스토파네스는 본의 아니게 플라톤보다도 더 훌륭한 공산주의의 국가 모델을 작품 속에 형상화시켰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프락사고라”라는 여성에 의해서 제기되는 찬란한 삶에 관한 모델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프락사고라는 자신의 남편, 브레피로스에게 여성들이 성취해낼 수 있는 혁명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유재산의 철폐, 남녀 차별의 철폐 그리고 다수를 위한 국가의 건설로 요약됩니다. 프락사고라의 유토피아는 단순한 사람들의 이상 사회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프락사고라에 의하면 아름다운 남녀는 오로지 아름다운 자식을 얻기 위해서 각자 해방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삶에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자는 결코 바람직한 인간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프락사고라는 단순한 사람들의 향락의 공산주의를 피력합니다. 향락의 공산주의는 금욕으로 이룩될 수 없다고 합니다. 찬란한 음식이 차려진 식당, 보리빵, 아름다운 옷, 포도주, 장식을 위한 꽃 그리고 맛있는 생선 요리 등은 인간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리스토파네스가 비아냥거리기 위해서 묘사한 사항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하나의 그럴듯한 유토피아 모델로 이해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분명히 “창조적 오해”에 해당하는 사항입니다.
15. 작품 가치와 후세의 영향: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리스 신화를 비아냥거릴 뿐 아니라, 제국주의의 야심을 위해서 새들까지 이용하는 권력자들의 치밀한 술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작품 「새들」은 이미 언급했듯이 기발한 착상, 빈틈없는 작품 구성 등은 희극에 대한 문학적 귀감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한 가지 생략할 수 없는 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탁월한 패러디입니다. 극작가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의 극작품을 상당히 인용하며, 이를 다른 맥락에다 재미있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호메로스, 소크라테스의 문장도 간간이 나타나며, 소피스트인 프로디코스, 수사학자 고르기아스, 서정시인 시모니데스와 핀다로스 등의 글들도 흥미로운 대사 속에 인용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리스토파네스의 극작품은 그야말로 “문학의 문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를 반동주의자로 몰아세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소크라테스 그리고 플라톤의 사상을 자주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리스토파네스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제도를 좋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보수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새롭게 제기된 사상이 이전의 사상보다 더 낫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기실 아리스토파네스는 최상의 사상과 최상의 제도를 처음부터 상정하거나 이를 찾으려고 애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시민들의 향락주의 자체를 부인하고 이를 비난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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