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이문재의 시 "황금률"

필자 (匹子) 2022. 11. 12. 21:43

: 오늘은 이문재 시인의 시 「황금률」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2021년에 간행된 시집 『혼자의 넓이』에 실려 있습니다.

나: 이문재 시인이 어떤 분인지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사항만은 지적하고 싶습니다. 즉 명시 「오래된 기도」 한 편만으로도 한국문학사에 찬란한 이정표를 새겼습니다. 작품은 인간의 크고 작은 갈망이 기도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 인용해보겠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 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여기서 시인은 인간의 소박한 삶 그리고 여기서 비롯한 애틋한 꿈이 바로 종교적 갈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 세상에서 느끼는 가장 커다란 고통은 사랑하는 분을 떠나보낼 때가 아닐까요?

: “죽음은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진리가 아닙니다. 이는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어려운 진리입니다.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진리라고나 할까요? 만약 우리가 떠난 그분의 이후의 삶에 동참할 수 있다면, 어렵겠지만 우리는 그분의 손을 놓아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너: 보살 예수를 갈구하는 마음 역시 이와 연결되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황금률」을 살펴볼까요?

 

가출한 지

사흘째 되는 날

고시원에서 만난 친구가 말했다

 

나 고아야

너처럼 불효 한번 해봤으면

원이 없겠다

 

이문재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2021

 

: 시의 제목에 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 네, 황금률은 어떤 사랑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랑은 기독교에 의하면 희생과 헌신을 전제로 하는 마음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로서 황금처럼 고귀한 윤리의 지침을 일컫습니다.

: "네가 싫어하는 일은 타인에게도 행하지 말라"는 말로도 이해되는데요?

: 네. 그렇지만 인간의 삶에서 이러한 아가페의 사랑은 완전히 실천되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에 대한 크고 작은 대가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 아가페의 사랑은 인간에게는 어쩌면 추상적 전언일지 모릅니다. 인간에게 사랑은 무조건 베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 까닭은 피조물들이 내심 사랑의 대가를 바라는 기대감 때문이겠지요? 그게 보답으로서의 말씀이든, 아니면 선물이든 간에 말입니다.

나: 인간관계 가운데 가장 질긴 인연의 끈은 무엇일까요?

: 그것은 아마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일 것입니다.

 

: 사랑하는 임과는 이별이 가능하지만, 부모와 자식은 서로 이별할 수 없습니다. 설령 부모를 떠난다 하더라도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동아줄이 연이어져 있지요.

: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우리의 의식은 위로는 부모로 향해, 아래로는 자식을 향해 뻗어 있습니다.

: 인연의 끈은 의식적으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완전한 아가페의 사랑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 흔히 뿌린 대로 거두는 게 자식 농사라고 하지요? 부모는 자식에게 가급적이면 많은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자식은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데, 주어진 현실은 이러한 상호적 애틋함을 방해하곤 합니다. 그렇기에 남에게 대접받고 싶으면, 남을 극진하게 대접하라는 말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적용됩니다.

: 그럴듯한 말씀입니다.

 

: 그밖에 황금률은 양자역학에서 언급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특정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전이될 때 필요한 에너지의 계산의 확률을 가리킵니다. 인간관계 내지 사랑의 흐름도 이와 유사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우리의 영혼에 드리워진 인연의 끈의 모순 관계일 것입니다.

: 그게 무슨 뜻이지요?

 

: 사랑은 그 자체 아름다운 것이지만, 지나친 사랑은 상대방에게 위협 내지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이는 유아 교육의 이론에서 잘 나타납니다. 방치된 사랑도 문제이지만, 과도한 사랑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 나이일수록 인간은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성장한 다음에 부모는 더 이상 자식의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 장성한 자녀에 대한 부모의 간섭과 개입이 자식의 심리적 발전내지 독립성에 엄청나게 큰 악재로 작용한다고 들었습니다.

 

: 그렇습니다. 이 문제는 독일의 작가 크리스토프 메켈 Christoph Meckel의 일련의 소설에서 제기된 주제라고 여겨집니다. 가령 『내 아버지에 관한 추적의 상Suchbild über meinen Vater』(1980)이라든가 『양의 뿔Bockshorn』 (1973) 등의 작품에서 묘사된 바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권위에 의존하게 하는 것은 부모로부터의 강요라고 생각됩니다.

: 만약 이러한 강요가 도저히 수정 불가한 것이라면, 부모의 교육은 마치 제우스신이 인간에게 행하는 숙명적 폭력일 수 있겠지요?

 

나: 그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부모의 구체적인 조언과 간섭이 어떠한가? 이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맥락이 어떠한가에 따라 대답은 정반대로 변하겠지요. 물론 우리의 영혼에 드리워진 인연의 끈은 때로는 개별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게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인연의 끈이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 심리적으로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그마한 가족의 동아줄마저 주어져 있지 않다면, 당사자는 어디서 과연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요?

: 이문재 시인의 시는 바로 그 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나 고아야/ 너처럼 불효 한 번 해봤으면/ 원이 없겠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를 생각해 보세요. 알에서 혼자 태어난 오리새끼는 하염없이 외롭습니다.

 

: 동의합니다.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굶주림, 외로움 그리고 심리적 괴로움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배고픈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아픔은 외로움 그리고 심리적 괴로움일 것입니다. 우리는 외로움보다는 서로 찌지고 볶고 싸우는 괴로움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괴로움이 외로움보다 나은 것일까요? 이는 추상적 질문이 아니라, 실제 현실의 정황 속에서 제기될 수 있는 구체적 문제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 크리스토프 메켈은 상기한 두 편의 소설에서 “사악한 부모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라고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부모는 자신의 자식에게 끝없이 간섭하고 엄청난 부담감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부모와 모든 자식들은 주어진 현실적 정황의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것은 내리 사랑과 치사랑이 서로 조우하는 하나의 상이겠지요.

너: 어느 가난한 형제가 몰래 볏단을 몰래 주고받는 동화가 떠오릅니다.

: 부모와 자식의 애틋한 관계는 -자본주의 현실에서 하나의 희망사항으로 출현할지는 몰라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을 애처롭게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 그리고 (설령 고아라 하더라도) 부모에게 감사하는 자식의 마음은 그 자체 아름답지 않습니까?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