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 루카치와의 표현주의 논쟁

필자 (匹子) 2021. 7. 18. 10:35

여기서 "나"는 장 미셀 팔미어를 가리키고. "너"는 에른스트 블로흐를 가리킨다. 이하의 인터뷰는 1976년에 행해졌는데, 다음의 문헌에 실려 있다.  Arno Münster (hrsg.): Tagträume vom aufrechten Gang, Suhrkamp: Frankfurt a. M. 1977. S. 107 -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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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젊었을 때 독일에서 주도적이며 가장 중요한 예술 사조는 표현주의였습니다. 물론 시대적 간격이 존재하지만 말입니다. 루카치와는 반대로 당신은 표현주의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지요?

: 네, 표현주의는 나에게 근본적인 중요성을 안겨주었습니다. 루카치에게 그것은 경멸의 대상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는 신고전주의에 경도하는 경향을 보였지요. 젊은 시절에 그는 1914년 신고전주의의 대표자 격인 파울 에른스트에 열광했습니다. 파울 에른스트는 나중에 나치에 동조하게 되지만 말입니다. 신고전주의는 휴식과 질서, 구조 그리고 형식적 엄밀성을 강조했습니다. 루카치의 책 『영혼과 형식』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루카치는 표현주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가 결별의 이유였지요. 나중에 우리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지요. 내가 뮌헨에서 표현주의에 열광했을 때, 루카치는 표현주의의 예술적 사조를 퇴폐적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폄하했지요. 루카치의 주요 관심사는 예술 영역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표현주의의 미술 작품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말하면서 설득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노력은 허사였지요. 가령 세잔과 고흐의 예술 작품 속에 표현주의의 몇 가지 요소가 내재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루카치는 나의 이러한 주장이 말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즉 위대한 세잔과 고흐의 예술을 그따위 마치 천박한 위조지폐와 같은 표현주의와 결부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표현주의자들의 그림은 마치 집시들의 바이올린의 찌그러진 현처럼 경멸스럽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전 시대의 루카치와의 온건한 의견대립과는 달리 매우 진지한 견해 차이 속출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918년만 하더라도 루카치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즉 우리의 우정은 공동의 철학 연구를 통해서 더욱더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나는 미학이라든가 음악의 철학 영역을 담당하면 좋으리라는 것이었지요. 왜냐하면 루카치는 음악 분야를 잘 알지 못한 반면에, 나는 음악의 역사를 공부한 바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신 루카치는 조형 예술을 담당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쓴 글을 각자 따로 발표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서로 도우며 작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의 우정이 지속되는 동안에 미학과 철학의 영역에서 소양 또한 함께 쌓을 수 있었지요. 심지어 그는 공동 저서를 간행할 마음을 품었지요. 그래서 그는 스위스의 인터라켄에 머물고 있던 나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공동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작업을 중단했지요.

 

나: 당신에게 표현주의란 어떠한 의미였는지요?

너: 나의 책 『유토피아의 정신』은 전적으로 표현주의의 감수성에 의해 각인되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한 신의 뜻은 인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표현주의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 그리고 새로운 감수성을 창조하려고 했지요. 『유토피아의 정신』의 10페이지 이상을 문학과 예술의 이러한 방향에 관해서 할애했습니다.

: 몇몇 비평가는 당신의 책 『유토피아의 정신』을 하나의 표현주의 철학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에 동의하시는지요?

: 오로지 표현주의 미술만을 천착하기 위해서 그 책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표현주의자들이 나의 책을 좋게 평가했는지에 관해서는 잘 모릅니다. 구스타프 말러는 이 책을 아주 잘 이해했다고 합니다. (『유토피아의 정신』 가운데 많은 부분이 철학의 역사 그리고 음악의 이론에 할애되고 있다. Vgl. Ernst Bloch: Geist der Utopie, Frankfurt a. M. 1964, 49 - 202.- 역주)

 

: 아도르노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그리고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을 동시적으로 읽었다고 하는데, 몇 가지 유사성이 발견된다고 하더군요.

: 그렇게 수용할 수 있지요. 어쩌면 『유토피아의 정신』은 루카치가 쓴 『역사와 계급의식』과 더 유사할지 몰라요. 이것은 루카치가 쓴 첫 번째 마르크스주의의 책입니다. 루카치의 책에는 나의 발언이 은밀하게 용해되어 있으며, 이와는 반대로 당시에 간행되었던 나의 책 속에는 루카치의 영향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기에 루카치의 책에서 유토피아적인 카테고리인 “체험한 순간의 어두움”이라든가, “아직 의식되지 않은 지식”이라는 카테고리 그리고 심지어는 객관적 가능성의 이론 등을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카치는 나보다 먼저 우리의 착상을 세상에 발표했지요. 그렇지만 이러한 사항은 표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문제를 논할 때 나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상화 Verdinglichung”,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 등에 관한 논문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역사와 계급의식』은 공산주의 진영 내에서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너: 당시에 발표된 예술 작품 가운데에서 프란츠 마르크의 「푸른 기사」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네. 그런데 이 작품은 루카치에게는 그저 붓으로 마구 덧칠한 소품에 불과했지요. 루카치는 고전적 이상을 연역적으로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매도했습니다. 나는 자신의 오류를 바라보라고 그에게 여러 번 충고하며, 비난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죄르지는 내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현대 예술과 관련하여 루카치는 맹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밖에 그가 애호하는 것은 오로지 신고전주의의 예술작품이었습니다.

 

: 루카치는 아주 신속하게, 그야말로 급속도로 마르크스주의로 빠져들었습니다. 당신은 이때 놀라지 않았습니까?

: 우리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사상적으로 많은 것을 공유하였습니다. 나는 그의 제자가 아니었고, 그 역시 나의 제자가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상호 상당히 많은 결실을 맺도록 자극했습니다. 우리 사이의 첫 번째 의견 대립은 표현주의에 관한 토론에서 생겨났습니다. 나는 뮌헨에서 마르크의 푸른 기사를 바라보고 매우 열광했습니다. 그런데 루카치는 이 그림을 하찮은 그림 나부랭이라고 멸시했지요. 그가 공산당에 가담한 다음부터 그는 이전에 격찬하던 모든 것을 부인하였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물론이며, 도스토예스키까지 부정하였습니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할 무렵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고 절망하였습니다. 전쟁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사상적 발전에 대한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했어요. 루카치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한 것은 하나의 입지점을 찾으려는 노력이었으며, 동시에 하나의 도피로 이해됩니다. 그렇지만 평의회 공화국, 다시 말해 “부다페스트의 코뮌”이 시대에 나는 그를 더 이상 만나지 못했습니다.

 

: 당시에 당신은 유대주의에 관한 철학적 사상을 심도 있게 추구했습니다. 이게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끼쳤나요? 최근에 프랑스에서 당신의 사상을 중시하는 책이 간행되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당신의 사상과 엠마누엘 레비나스를 서로 비교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당신은 저서에서 동유럽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민중 문학 서적을 자주 인용하곤 했지요?

너: 그런 글은 신앙심이 투철한 유대인만이 쓸 수 있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아요. 나의 사상은 기독교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신화라는 이유로 혹은 통속적인 민중 문학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약성서에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아요.모두가 유대인들이지요. 심지어 계시록을 작성한 성 요하네스 역시 유대인입니다.

 

유대주의에 대한 나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나의 어린 시절과 부모님에 관해서 눈을 돌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바이에른 왕국의 관리였습니다. 나 자신 유대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성장했지요. 나중에 뷔르츠부르크에서 시오니즘을 추구하는 여학생을 사귀었는데, 이때 비로소 나는 유대주의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미와의 오랜 만남을 통해서 나는 유대주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지요. 말하자면 마르틴 부버 등과 같은 이론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근원적으로 접하게 된 셈이지요, 언젠가 튀빙겐 대학을 방문한 이스라엘 외교관에게 말한 바 있듯이, 나는 뒤늦게 저절로 유대주의에 동화되었습니다, 나중에 카발라주의라든가 영지주의, 철학 그리고 독일 낭만주의 등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유대주의는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나의 여러 관심사 가운데 해당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은 우연에 불과합니다.

 

나: 토마스 만은 소설 『마의 산』에서 나프타라는 인물을 묘사했는데, 이로써 루카치의 흉측한 초상을 드러내었습니다. 주인공 나프타는 내 생각에는 루카치와 동일인물인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너: 나프타는 어쩌면 우리 두 사람 모두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생김새로는 루카치와 비슷하지요, 몸집이 비교적 작고, 코가 커다랗다는 점에서 루카치를 닮았고. 그런데 성격상으로는 교활한 면을 지녔다는 것은 나와 유사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