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십자가는 고통인가, 인내의 대상인가? 블로흐와 몰트만 (2)

필자 (匹子) 2021. 7. 23. 11:15

MA: 우리는 두 사람의 견해를 단순하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독일의 사회학자 아돌프 로베Adolph Lowe는 당신의 기념문집에서 자신의 편지를 게재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급진적 부정성, 다시 말해서 극단적인 사악함이 어떤 기대 효과 속에서 스스로 여전히, 아직도 여전히 해체되지 않은 채, 이른바 세계 역사의 거짓된 그물 속으로 빠져들면, 그것은 대체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블로흐씨, 당신은 아마도 이를 하나의 속임수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런데 신학자들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단순히 다음의 사항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반드시 부활하리라고 갈망합니다. 바로 이러한 희망이 우리로 하여금 부활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의 형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변증법처럼 작용하는 사고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말하자면 이러한 과장된 견해를 고수하는 게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B: 아돌프 로베의 기고문은 죄악 그리고 부정성의 역할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악과 부정적 특성이 때로는 희망 속에서 다른 형태로 쉽사리 출현할 수 있다고 해명하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렇지만 그의 기고문은 나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친구인 폴 틸리히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한 것입니다. 로베는 신학자가 아니라 국민경제학자입니다. 아우슈비츠가 얼마나 끔찍한 곳인가를 깨달으려면 반드시 신학자이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옥같이 추악한 실제 현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신학만을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죄악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골고다 외의 다른 지역에도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은 부지기수로 존재했어요. 죄악을 척결하고 이를 부정하기 위해서 스스로 원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경우는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주장한 바 있듯이 그리스도가 세상의 죄악을 모조리 거두기 위해서 자청해서 희생당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신학을 추종하는 신학자들은 십자가 자체가 세상의 죄악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MA: 이로써 우리는 논의의 주제에 더 근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 고개를 숙이고 이를 찬양하는 경우는 논의의 주제가 될 수 없어요. 십자가는 원시 기독교도, 우리가 공히 높이 평가하는 헤겔 그리고 오늘날의 기독교도에게 하나의 끔찍한 사물이며, 희망을 완전하게 파기하게 하는 실망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헤겔은 십자가를 신의 죽음으로 이해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예수의 최후를 한마디로 신의 죽음을 가리키는 끔찍한 사건이라고 반복해서 언급했지요. 바로 이러한 대립, 십자가의 도저히 해명 불가능한 특성 내지 파국적인 특성은 원시기독교의 선포에서 나온 것이며, 이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생각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또 다른 물음이라고 여겨집니다. 즉 사람들이 십자가의 인내에 편안하게 적응하기 위해서 고통, 고통 그리고 고통을 만들어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의 고유한 선포 속에 자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MO: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고린도 전서 1장 26절 이하를 인용했습니다. 신의 그러한 행위는 파괴 그리고 새로운 창조 속에서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힘없는 자가 선택되는 것은 신의 의지에 의해서 강한 존재들이 파괴될 수 있기 위해서이지요. 신께서는 힘없는 자들이 더 나은 자들이므로, 항상 힘없는 자를 사랑하고, 무력한 자들 곁에 머문다는 식으로 신의 혁명적 행위를 축소시킨다면, 이 문장이 지니고 있는, 이른바 전복의 변증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주께서 막강한 권력자를 권좌에서 내쫓고 낮은 자들을 높이 떠받드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한다는 마리아의 고백을 접하게 되면 (누가 복음 제 1장 46절 이하). 다시 한 번 강조할 게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아직 아닌 무엇”뿐 아니라, “더 이상 아닌 무엇”과 관련되는 사항입니다. 무(無) 그리고 사악한 것의 힘을 희망의 원칙에 입각하여 아직 아닌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과연 충분할까요? 우리는 더 이상 아닌 무엇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내 견해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노예들이 무조건 분수를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노예들과 자유인들과 함께 공동체를 결성하였지요. 물론 바울의 관심사는 노예제도를 파기함으로써 어떤 변화를 이룩하는 과업을 우선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요. 그렇지만 노예들과 자유인들, 남자들과 여자들,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낮은 계층 사람들이 함께 하나의 공동체에서 어울리기를 갈구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지요. 이러한 공동체 운동을 통해서 모든 차별과 갈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B: 사람들은 최근에 이르러 이러한 모임을 민족 공동체라고 명명했지요. 히틀러가 단합을 요구한 것 역시 공동체 운동울 통해서 가능하지 않았나요?

MO: 네, 그렇지만 원시 기독교에서는 민족 공동체가 결성되지 않았지요. 오히려 당시에 존속했던 모든 민족 공동체는 기독교의 신앙으로 인해 파괴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 번째 국제적인 신앙 공동체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제한이나 한계가 없었기 때문에 파괴될 것 또한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문제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루터가 독일 농민혁명 당시에 취한 행동에는 내가 보기에도 의심스러운 여지가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 당신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뮌처의 태도에 대해서 전적으로 수긍하지 않습니다. 뮌처는 “지상의 삶으로부터 천국의 찬란함으로 향한” 변화를 촉구했는데, 나는 이를 애호하지 않아요. 차라리 천국의 찬란함을 애타게 갈구함으로써, 지상의 삶을 낫게 하는 노력을 더 좋게 생각합니다.

 

B: 그건 따지고 보면 궁극적으로 동일한 게 아닌가요?

MO: 두 가지가 동일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루터에게서는 어떠 다른 사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지옥 여행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부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신의 상실 내지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지옥 속에는 절대적 부정으로서의 죄악이라는 신의 형제가 서성거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루터는 설령 지옥 속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에는 일말의 희망의 편린이 자리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십자가게 못 박힌 그리스도가 지옥을 배회하는 동안 일말의 희망 역시 지옥의 영역을 파고든다는 것이었지요. 바로 여기서 희망의 불씨는 내 생각에 의하면 죄악 근처에서 살아나는 게 아니라, 부정적 죄악의 한 가운데에서 얼마든지 지펴질 수 있습니다.

 

B: 물론 그리스도가 지옥을 지나치지요. 그렇지만 죄를 지은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지옥의 형벌은 그 자체 영원한 것입니다. 지옥 아래로 내려와서 지옥의 끝을 방문하는 예수에게는 지옥의 형벌은 영원하지 않지만, 죄수들에게 그것은 영원합니다. 그게 바로 가톨릭교회의 독단론이지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독단론 말입니다.

MO: 물론 그렇지요. 그렇지만 루터의 교리에 의하면 지옥의 형벌은 영원한 게 아닙니다.

B: 그렇지 않습니다. 죄지은 사람이 겪어야 하는 지옥의 형벌이 일시적이라고 하는 생각은 오리게네스에게서 나타날 뿐, 그 외의 모든 교부들은 그게 영원하다고 주장합니다. 위대한 기독교 신앙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옥의 형벌은 영원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지요.

 

MO: 파울 게르하르트는 자신의 부활절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지옥으로 향하는 까닭은 -당신이 주장하듯이- 우리의 죄를 할부로 지급하기 위해서 스스로 회계담당자로 활동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거역하고, 세상을 거부하며, 죄악과 궁핍함을 거역하기 위함이며, 나는 지속적으로 그의 동반자이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파울 게어하르트의 찬송가 「내 심장이여, 기쁘게 일어나라Auf, Auf, Mein Herz」의 한 구절이다. Paul Gerhardt: Dichtungen und Schriften, München 1957, S. 76 - 79. - 역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지옥 여행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동반자의 편에서 동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향은 지옥에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버려두는 태도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지요. 이것이야 말로 무 내지 지옥을 관통하는 희망의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 가능성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무(無) 속에서도 어떤 변화를 촉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대목은 블로흐와 몰트만의 사상적 차이를 분명히 감지하게 해준다. 두 사람의 이질적인 견해는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사이에 도사린 견해 차이를 떠올리게 한다. 블로흐에 의하면 예수는 주어진 사회의 죄악을 척결하는 것을 중요하게 간주하는 분이었다. 세상의 선과 악의 문제는 페르시아의 마니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바 있는데, 그리스도는 선을 실천하려고 하다가 끝내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인간이다. 그가 생전에 세상의 모든 죄악을 척결하려고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않은 까닭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더라도 세상이 묵시록의 방식으로 저절로 정화되리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십자가 자체를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형벌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처형당하는 사람은 극도의 고통을 겪으면서 서서히 목숨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숭배하는 기독교 신앙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변화된 것으로서, 블로흐에 의하면 원시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공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몰트만은 블로흐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용인하면서도 십자가의 인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갈망과 희망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몰트만에 의하면 구세주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반영된 갈망의 상이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몰트만에 의하면 고통을 가져다주는 무엇이지만, 더 나은 세상 즉 내세를 위해서 인내하게 하는 수단으로 이해된다. 이는 사도 바울의 사고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새로운 삶에 관한 그리스도의 전언은 무 내지는 세계의 모든 죄악에 대한 도전과 같다. 이러한 도전은 몰트만에 의하면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도 나타난 바 있으며, 그리스도의 지옥 여행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촉구하게 하는 계기와 같다. 여기서 우리는 몰트만의 유신론적 희망을 접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이 사망한 다음에도 그들이 무 (無) 속으로 나락하지 않도록 그들의 마음을 바로잡게 하는 구세주라는 것이다. - 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