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십자가는 고통인가, 인내의 대상인가? 블로흐와 몰트만 (1)

필자 (匹子) 2021. 7. 23. 11:06

1965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근교에 위치한 아르놀트하인에서 복음 아카데미의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인터뷰는 이를 계기로 성사되었다. 대화의 참석자는 볼프 에드거 마르쉬 (MA), 에른스트 블로흐 (B) 그리고 위르겐 몰트만 (MO)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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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 만약 우리가 제각기 상대방에 대한 호의라든가 동일한 견해만 제기한다면, 대화는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견해 차이를 도출해낸다면, 토론은 그야말로 의미심장할 테니까요. 우리가 주어진 시간에 견해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면, 좋으리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새로운 무엇Novum”의 특성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의 차이점을 밝히는 게 좋을 듯합니다. 블로흐씨는 “새로운 무엇”을 종교사적으로 그리고 조직신학의 차원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무엇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무엇”이며, “이전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무엇”을 가리킵니다. 블로흐씨는 교회사의 측면에서 새로운 무엇이 페르시아의 이원론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이것이 영지주의 기독교 종파로 이전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몰트만씨는 새로운 무엇에 대한 기대감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의 말씀 자체에 이미 설정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몰트만씨는 새로운 무엇에 대한 기대감을 십자가의 신학에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무엇은 몰트만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고통 그리고 십자가의 인내와 직접적으로 결착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블로흐씨는 사도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거부하고, 많은 것을 인간의 마음과 이성에서 발견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대립을 다시 한 번 논의 대상으로 끄집어내고 싶습니다. 블로흐씨는 이러한 지적을 도전적이라고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세 사람이 서로를 포옹하며, 막연히 공감을 표하는 것은 논의의 결론을 밝히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군요. 내 생각으로는 견해 차이를 밝힘으로써 철학과 신학 사이의 대립 또한 나타나리라고 여겨집니다. 당신은 이러한 차이를 몰트만씨에게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설명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B: 네, 언젠가 “십자가가 하나의 도전이다.”라고 몰트만씨가 말한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의심하는 게 오히려 더욱 놀랍고 바람직한 도전이 아닐까요? 십자가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자체 도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는 그러한 표현에 저항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인내라는 말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지요. 십자가에 못 박히는 행위는 인내가 아니라, 쓰라린 고통과 연결됩니다. 언젠가 루터는 “십자가, 십자가 - 고통, 고통은 기독교인의 일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폭동을 일으키던 독일 농민들에게 그렇게 일갈하면서, 그들이 오로지 분수만을 지킬 것을 강요했어요. 농민들은 사도 바울의 십자가 없이도 끔찍하게 고통받으며 비참하게 살아갔습니다. “로마로 향하는 길 Via Appia”에는 수많은 노예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목숨을 잃었지요. 로마 군인들은 스파르타쿠스를 물리친 다음에 8000 명의 노예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은 살아 있는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게 얼마나 잔인한 형벌인지를 반영하지 않았어요. 당시에 노예들 가운데 부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루터가 권력자들을 향해서 고통은 기독교의 일부라고 선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권력을 지닌 자들 역시 고통과 거리감을 취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외부적으로 아픔을 느꼈습니다. 어쨌든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잔인한 아픔이며, 가장 구체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주어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를 더 이상 직시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에게 그저 인내하라고 요구하는 태도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반혁명적이고, 반동적이며, 왕정 복고적이고 타협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인내를 강조하는 것은 신앙과 신학에서 더 이상 바람직한 요구사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힘들게 살아가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생활하며, 경멸당하고 모욕당하는 존재"에게 가난과 폭정 앞에서 어떻게 해서든 참고 살라고 하며, 단 한 번도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1843) 서문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 역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지요. 사람들이 과연 부드럽게 말해서 비참한 현실적 상황에 대해 최소한 민감하게 대응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의 신학은 바로 이러한 비참한 현실적 조건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자체에서 어떤 도덕적인 교훈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인내를 주장하는 신학은 사도 바울에게서 유래하는데, 이는 노예들로 하여금 주어진 질서에 굴복하고, 어떻게 해서든 분수를 지키면서 살아가게 하려는 강령입니다. “노예는 절대로 흥분해서는 안 된다.”는 격언을 생각해 보세요. 이는 스토아 사상과는 다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와는 부분적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무엇입니다. 어쨌든 기독교는 사도 바울이 요청한 방식을 통해서 제국의 종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노예는 어떻게 해서든 마치 송충이처럼 솔잎만 먹어야 한다는 사도 바울의 요구 사항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는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겠노라.”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에서 제국의 종교가 되게 한 슬로건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요약하건대 십자가의 인내 속에는 어떤 의심스러운 흔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에 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MO: 도덕적 사항과 관련하여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그 배후에는 더 많은 무엇이 도사리고 있어요. 올해 7월에 잡지 『메르쿠르』에는 벨기에 출신의 저널리스트인 장 아메리Jean Améry의 논문 한 편, 「고문의 경험Die Erfahrung der Tortur」이 게재되었습니다. (장 아메리 (1912 - 1978):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 저항 운동가. 그의 본명은 한스 마이어였는데, 1955년에 개명했다. “아메리Améry”는 “마이아Mayer”의 음절을 바꾸어 만든 이름이다. 1945년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뒤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8년 그는 수면제를 과다복용하고, 자살했다. 2년 전에 그는 『목숨 끊기Hand an sich legen』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자유로운 죽음, 그것은 질병이 아니라, 인간의 특권이다.” - 역주) 아메리는 게슈타포와 SS가 자신에게 가한 고문에 관해 보고했습니다. 보고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곳의 어느 누구도 희망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를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나에게 충격을 가했습니다. 내가 블로흐의 저서 『희망의 원리』를 애호하기 때문에도 그러했지만, 개인적으로도 암시하는 바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지요. 희망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가 오로지 사물의 실질적 변화를 이룬 세계, 다시 말해 강제수용소를 철거하고 가난과 고통만 제거된 세상을 가리키는지 나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언젠가 헤겔은 우리의 눈앞에 주어진 현실을 경박하고 어리석은 완강한 무 (無)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만약 주어진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면, 이로 인해 존재의 모든 영역이 세계로부터 일탈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세상에는 희망의 계기로 작용하는 수많은 가능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무조건 지옥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삶에는 수많은 영역이 주어져 있는데, 그 문 앞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지요. “이곳에 들어서는 자는 모든 희망을 실현시키게 하라.”고 말입니다.

 

나는 여기서 또 다른 문제를 숙고하게 됩니다. 새로운 무엇 내지 바라는 무엇은 내가 의지하고 있는 성서의 이야기에 따르면 오로지 “아직 아닌 존재”로 향하고 있을까요? 이는 아직 소유하지 않은 것이 소유를 근원적으로 동경하는가, 현존하지 않은 것이 현존하는 것을 근원적으로 갈구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됩니다. 욥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라든가, 예레미야의 비탄의 노래가 실린 시편에는 새로운 무엇은 아직 아닌 존재 곁에서 출현하는 게 아니라, 무에서 출현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게 마지막인 곳에서 새로운 무엇이 밖으로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는 어떤 “십자가의 종말론 Eschatologia crucis”에 관한 결정적인 계기를 부여한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사람들이 다가올 미래를 위해서 언제나 참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것은 부정적인 끔찍한 권력이 인간 위에 군림하면서 활개를 치는 곳에서 놀랍게 작용할 수 있는 새로운 무엇입니다. 인간은 무 (無)로부터 새로운 무엇을 얻기 위해서 신을 갈구해야 합니다.

 

이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주어진 현실에서 가난한 자의 가난을 종식시키고, 핍박당하고 고문당하는 가련함을 떨치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인간에게 엄청난 고통이 엄습할 경우 이러한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획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인간은 내적으로 이러한 고통 속에서 터무니 없이 몰락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인간의 존재는 자신의 본연의 의미를 지닌 현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나는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을 감수하고, 어두움 속에서 희망을 견지하며 모든 것을 인내한 사람들을 배반하는 셈일 것입니다. 물론 희망이 현세의 부정적인 면에 대항하는 용기 있는 행동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희망은 이것에 국한될 수는 없지요.

 

십자가의 인내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무(無)의 영역으로 나락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이때 기독교인은 “문제는 희망을 견지하는 일이다.”라고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가 느끼게 되는 고통이 물론 권력자의 횡포로 인해서 비롯되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고통도 있습니다. 가령 사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려는 마음가짐의 고통도 존재하는 법이지요. 물론 여기서 다른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블로흐씨, 당신은 이에 관해서 자주 언급한 바 있지요? 만약 32세기에 살아갈 미래의 노동자들이 즐거운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왜 하필이면 지금 나 자신이 이 순간의 삶의 향유를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말입니다.

 

희망은 실제로 막강하게 생명력을 누리겠지만, 고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의 고통 그리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수난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희망이 자신의 고유한 갈망의 세계 속에서 생명력을 이어가는 반면에,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막강한 부정적인 권력에 의존한 채 일말의 희망마저 포기해야 하도록 우리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나는 사실적 이유에 의거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즉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새로운 무엇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서는 반대 명제로서의 “무로부터 벗어나라.Annihilatio”라는 전언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언은 그 자체 새로운 무엇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무로부터 벗어나라는 말씀은 부활한 그리스의 십자가를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