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 기독교 속에는 반란이 담겨 있다. (2)

필자 (匹子) 2021. 7. 25. 10:00

질문: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시피 당신은 비판적인 상황 속에서도 대학생들의 저항 운동을 동조하는 거의 유일무이한 철학자입니다. 서독에서 그리고 다른 서 유럽 국가에서의 학생 운동은 무엇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그리고 경제적 구상에서 진정한 해결책이 결여되었기 때문은 아닌지요?

 

블로흐: 일단 실패에 관해서 말하고, 그 다음에 실패의 여러 가지 이유에 관해 언급하도록 하지요. 내 생각에는 학생 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할 정도로 자료가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학생 운동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많은 무엇을 이룩했으므로, 운동이 실패했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학문이 연마되는 생산 현장 내에서는 많은 것이 옛날과 같을 수 없으며, 운동은 계속 진행 중인 셈입니다. 유리창을 박살내는 몇 가지 일들은 너무 일시적이므로, 그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요. 물론 유리창을 박살내는 일은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유리창만 박살낸 게 아니라, 다른 일도 일어났습니다. 워싱턴, 로마, 파리, 베를린 등지에서 진행되는 캄보디아 전쟁에 반대하는 데모 및 그곳의 진행 과정을 생각하면, 대학생들은 어디서나 전위적이지요. 한마디로 그들은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계층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지 않은 계층이지요. 이 점이 두 번째 질문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바 있듯이 급진적이란 사실의 근본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은 (예컨대 체코 사태라든가 브레주네프 독트린 등과 같은) 다른 곳에서의 억압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캄보디아 전쟁에 반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학생들은 사회주의의 제국주의적 특성에 대해서도 저항했습니다. 마치 사회주의가 러시아의 권력 증강을 위한 이데올로기인 것처럼, 사회주의 혁명이 대부분 이용당하는 데에 대해, 러시아의 권력이 많은 동구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데 대해 학생들은 반기를 들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현재의 이론적 작업에 관해 말해 봅시다. 우리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존재했던 것과 근친한 전선을 명확히 지니고 있어요.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지식인으로서 더 이상 어정쩡한 견해를 피력해서는 안 되는 사실들이 있다는 것도 말이에요. 그럼에도 이데올로기라는 주관적 안개 뿐 아니라, 아직 분할되지 않은 객관적 현실적 상황이라는 안개가 자욱이 깔려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느 누구도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지요. 학생들에게는 더욱 잘못이 없습니다. 스탈린주의가 반전되고 난 이후에는 문제가 더 이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요. 베벨과 라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에 대해서도 우리는 더 이상 명확하게 분석할 수 없을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서구의 잘 사는 사람들은 제대로 한 게 없는데도 행운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적 자유”는 동구의 부자유를 핑계로 하여 활활 타오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실 동구권에서는 자유의 슬로건이 오래 전부터 경화 (硬化)되어 있으며, 해빙 무드가 도래하지 않아 끊겨 있지 않습니까? 동구 사람들은 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서, 어깨만 으쓱일 뿐이며, 서구 사람들은 몇 가지의 자유를 누리고 이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초인종이 울릴 때, 이곳 사람들은 몸을 사릴 필요가 없지요. 왜냐하면 우편배달부가 찾아올 뿐, 안기부 관리라든가 관료들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언젠가 스탈린 시대 이전에는 소련도 자유로웠습니다. 자유의 즐거움을 누려야 할 민족은 따로 있는데, 서구 사람들만 운 좋게 자유를 누리고 있어요. 이로 인하여 주관적일 뿐 아니라, 객관적 현실적인 불명료성이 탄생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는 실정이에요. 만약 현재 상황을 아주 훌륭하게 마르크스주의로 분석해내고, 동시에 분석 대상을 지금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 가능한 것보다도 훨씬 쉽고도 명료하게 해결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어떤 변화가 출현하는 것을 겪게 될 것입니다. 위기는 빠르게 혹은 더디게 도래할지 몰라요.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은 현저히 청산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동차나 TV와 같은 소시민의 사유재산에 만족하지만, 원시안적으로 볼 때는 더 이상 눈앞의 무가치한 물건들에 집착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러한 물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 위기가 들이닥치거나 전쟁으로 발전될 심각한 상황을 못 보게 만들지 않습니까? 위기가 들이닥치고 난 연후에 무슨 일인지 알려고 해서는 곤란해요.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되며, 더욱이 그렇게 마냥 기다리고 있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현실의 불명료성을 파기하려면, 우리는 -지금까지 충분히 음미하지 않았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기본적 원칙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회주의 없이는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으며, 민주주의 없이는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첫 번째 문장은 서구에 해당되며, 두 번째 문장은 동구에 해당되지요.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전선 (前線)을 없애버리는 것도 아니요, 중요한 문제를 전혀 논하지 않거나 적당히 은폐시키는, 이른바 가련하고도 마취된 의식 상태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학생들이나 특히 프롤레타리아가 영향력을 행사하여, 중요한 핵심 문제를 분명히 제기한다면, 만약 동구든 서구든 간에 이 문제를 실현할 수 있다면, 만약 동구에서 마침내 해빙 무드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만약 헝가리, 체코 그리고 폴란드 등지에서 사람들이 실질적인,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혁신시키려는 의지를 내세운다면, 앞에서 언급한 불명료성은 사라질 것입니다. 주관적 판단 역시 공통성을 지니고 하나의 연계를 이루게 될 테지요. 물론 그 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또 다른 문제는 권력층과 지식인들의 은폐 공작이지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상황만을 고려하는 정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시대의 과제 내지는 핵심적 문제와는 무관합니다.

 

질문: 당신은 몇 년 전에 소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의 전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특히 당신은 “이론적인 전복이 이루어져서, 이로 인해 독재 정치가 제도적으로 방해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소련의 과학자 사하로프는 소련의 내부적 민주주의를 위한 두개의 성명서를 작성하여, 소련 최고 회의에 제출했습니다. 여기에 실린 내용은 지금까지 소련 지식인들이 제기한 내용을 훨씬 뛰어넘고 있어요. 당신은 -단기간이든 장기간이든 간에- 소련에서 사상가 내지는 사상의 봉기가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하여 독재 정치가 방해받을만한 어떤 전복이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봉기가 실제로 나타나면, 소련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블로흐: 방금 지적한 게 바로 핵심적 사항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주제는 학생 운동 주위만 빙빙 맴돌 뿐이에요. 학생 운동은 (스탈린주의나 브레주네프 주의보다 훨씬 덜 무장된) 자본주의를 뒤흔들어 놓지 못했습니다. 만약 소련 민족 그러니까 농민과 노동자들 대부분이 동참하지 않으면, 지식인 운동이 과연 얼마나 체제를 뒤흔들어 놓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해빙기를 지녔으나, 이는 금방 사라졌어요.

 

열심히 투쟁한 어느 소련의 지식인이 “어떤 또 다른 해빙기가 도래하면 나는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해빙 무드가 사라진 것은 유감스럽게도 거의 법칙적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는 개인적 안일을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말속에는 “다만 비관적 자세로 상부에서 허용한 자유에 대해 그다지 기대하지 않으나, 패배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 항해할 수 없는 배위에서 다시 깃발을 달려고 돛에다 못을 박고 있는 자세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항복하지 않았다, 우리는 새로운 신호를 보내려고 한다.”, 바로 그것입니다. 1525년 농민 전쟁 당시의 노래가 생각이 나는군요. 프랑켄하우젠의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한 농민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참패하여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손자들은 훨씬 더 잘 싸울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아직 존속하고 있습니다. 농민 전쟁의 경우 이는 즉시 확증되지 못했습니다. 손자들이 더 잘 싸울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거든요. 프랑스 혁명이라는 이후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