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 프랑크푸르트 학파, 사르트르 등에 관하여

필자 (匹子) 2021. 7. 19. 13:35

나: 프랑크푸르트 학파, 특히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대한 당신의 관계 역시 좋았는지요?

너: 그렇지 않아요. 나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사회 탐구 연구소Institut für Sozialforschung”를 “사회 위조 연구소Institut für Sozialfälschung”라고 명명했습니다. 나는 한 번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염세주의를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고, 혁명가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염세적 사회 이론을 정립시킨 자들이지요. 처음에 나는 아도르노와 친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토피아 개념에 관해서 상대방을 이해시키지 못했지요. 호르크하이머는 나중에 반동주의자로 변절했습니다.

 

나: 당신의 작품은 마르크스주의, 헤겔 사상 그리고 종교적 관심사를 강하게 드러내며, 유토피아의 철학자 내지 혁명적 유토피아 사상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스스로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노선에 속한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너: 그런데 어떠한 마르크스의 전통을 말씀하고 계시는지요? 내가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소련의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오늘날 더 이상 단일한 시스템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회주의의 유일한 형태를 언급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나는 소련의 마르크스주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마르크스의 실천적 정책은 존재하고 있어요. 프랑스 공산당이 채택한 노선은 아주 이성적입니다. 만약 누군가 평생에 걸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개념에 관해서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면, 그는 하루아침에 이를 완전히 포기하거나 철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개념은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마르크스가 갈구한 바대로 적용될 수는 없겠지요.

 

나: 마르쿠제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내세웠습니다. 자본주의의 산업사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자신을 점진적으로 이 사회에 편입시키고 동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신좌파Neue Linke” 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의 이러한 동화 내지 편입하려는 내적 욕망을 차단시키기에는 너무나 힘이 없다고 합니다.

너: 마르쿠제는 특히 미국에 거주하는 노동자 계급을 논의에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혁명적 낭만주의 그리고 심연이 보이지 않는 염세주의 사이에서 헤매고 있어요. 그는 학생운동에 가담한 미국의 신좌파 지식인들을 애호하고 그들에게 합세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계는 깨어지고 말았어요. 미국의 신좌파들이 마르쿠제와의 관계를 끊어버렸지요.

 

나: 마르쿠제는 자신의 책 『충동 구조와 사회Triebstruktur und Gesellschaft』에서 유토피아 개념을 옹호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마르쿠제의『충동 구조와 사회Triebstruktur und Gesellschaft』는 영어 판으로는 『에로스와 문명』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바 있다. - 역주) 이 책을 통해서 그는 당신의 철학적 정치적 입장과 근친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너: 우리는 1968년 유고슬라비아의 코르쿨라의 회의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때 마르쿠제는 유토피아의 개념이 정치적 영역에서 다시금 그 가치를 인정받을 정도로 유토피아의 중요성을 증명해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유토피아의 개념은 마르쿠제보다도 더 구체적입니다. 그것은 주어진 현실에서 나타나는 객관적 가능성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해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서, 유토피아의 개념을 무의식적인 것 내지 꿈속의 삶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의견의 일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나는 마르쿠제를 높이 평가하고, 그가 의미심장한 사상가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나: 당신은 현재 독일에서 매우 중시되는 사상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지요? 혹시 당신은 다른 철학자들과 접촉하고 계시는지요? 이를테면 하이데거 말입니다. 하이데거와 블로흐 모두 세대 차이가 10년 정도 되지만, 같은 세대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이데거 역시 루카치와 마찬가지로 에밀 라스크 그리고 리케르트의 제자가 아닙니까? 하이데거는 게오르크 짐멜에 관해서 찬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에밀 라스크 (1875 - 1915):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로서 하이델베르크에서 가르쳤는데, 루카치와 블로흐는 그의 강의에 참석하였다. 라스크는 신칸트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우주론의 카테고리는 감각적인 것과 초감각적인 것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다. 하인리히 리케르트 (1863 - 1936): 프라이부르크와 하이델베르크에서 교수로 일하였다. 칸트의 조직적 가치철학을 연구하였다. 블로흐는 하인리히 리케르트를 거쳐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1908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 역주)

너: 하이데거는 1933년 나치 정부에 동조했는데, 이로써 그는 정치적 적대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하이데거를 단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1961년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철학자 모임에 초대를 받았지요. 당시 우리는 요한 페터 헤벨에 관해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하이데거는 헤벨의 『라인 지방의 이야기 보물 상자 Schatzkästlein des rheinischen Hausfreundes』(1811)에 관한 연구서를 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 당신은 사르트르의 철학적 작업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습니까?

너: 네, 『존재와 무』에 관심을 기울였지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사르트르의 입장도 고찰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마르크스주의의 이해에 동의할 수 없었지요. 사르트르는 매우 용기 있는, 놀라운 지식인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마지막 인터뷰는 나를 실망시켰습니다. 글을 읽고 나니, 자서전에 대한 나의 혐오감만 가중시키고 말았어요. 사르트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사르트르의 마지막 인터뷰는 무엇을 먹고 마시는 등의 일상생활과 관련되는 것이었어요. 그의 철학적 사고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했지요. 물론 나 역시 눈이 멀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철학적 사고를 발전시키려는 갈망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나: 당신의 모든 저서는 가장 기본적인 카테고리로서의 유토피아를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근자에 『희망의 원리』 제 1권이 다시 출판되었으며, 『유토피아의 정신』은 불어판으로 출간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특히 『희망의 원리』에서 당신은 마르크스의 사상과 묵시록 그리고 죽음을 결합시키고 두 가지 이질적 요소를 화해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신은 이미 말씀하신 대로 젊은 시절에 발전시킨 “아직 의식되지 않은 무엇”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무엇”이라는 존재론을 발전시킨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유토피아 이론은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 당시 그리고 1920년의 사회 정치적인 맥락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혁명적 메시아주의는 프리츠 폰 운루, 에른스트 톨러 그리고 이방 골 등이 표방한 바 있는 표현주의 작가의 정신에 근친해 있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유토피아의 카테고리는 오늘날의 정치 사회적 맥락을 위해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을까요?

 

: 철학이란 오로지 사실만을 다루는 분야가 아닐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의 카테고리는 마르크스주의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요. 나는 것을 다만 도출해내었을 뿐입니다. 나의 저서에는 당연히 어떤 기독교의 영향이 느껴질 수 있어요. 묵시록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내가 분석한 것은 유토피아가 어떻게 종말론으로 세속화되었는가를 밝히는 일이었지요. 다시 말해서 유토피아가 야만과 전쟁에 대항하는 폭력으로 표시된 사회 정치적 맥락 속에서 나타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어떠한 관계를 취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시대, 특히 표현주의는 어떤 새로운 삶에 대한 거대한 동경 그리고 어떤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내려는 욕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령 프란츠 마르크의 그림이라든가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은 바로 그 점을 표현하고 있어요. 당시에 집필했던 내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유토피아의 정신은 여전히 사실로 인정받을 수 있어요. 예나 지금에나 유토피아는 우리 시대의 가장 기초가 되는 기본적 카테고리이며 정치적 카테고리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그리고 포르투갈의 파시즘 독재 체제가 순식간에 종언을 고하리라고 과연 누가 몇 년 전에 상상조차 할 수 있었겠습니까? 베트남과 같은 작은 나라가 막강한 무기로 침공한 미국의 공격 앞에서 승리를 구가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나: 마르쿠제는 산업 사회, 특히 미국의 산업 사회를 염두에 두면서 거대한 염세주의의 입장을 표명햇습니다.

너: 마르쿠제는 염세주의의 시각을 지니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의 정치적 역정은 심리적 발전의 과정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겪었던 끔찍한 체험은 스스로의 정치적인 사고를 개진하는 데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번에 걸쳐서 나의 삶과 나의 철학 사이의 차이점 내지 이질성을 강조해 왔습니다. 유토피아는 결코 비현실적인 무엇으로의 도피가 아닙니다. 유토피아는 현실적인 무엇의 객관적 가능성을 증명해내고, 이것이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모색하는 사고입니다. 『희망의 원리』는 지금까지 인류가 추구한 갈망의 운동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것은 더 나은 미래 그리고 더 인간다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욕망을 서술한 책입니다. 설령 미국에서도 어떤 다른 세계를 위해서 투쟁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 당신의 삶에서 예술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오늘날 예술은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는지요? 과거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서도 예술이 혁명적이고 체제 비판적이며 어떤 새로운 세계를 예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믿으시는지요? 나는 바이마르 고전주의, 다다이즘 예술 운동 그리고 표현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 예술은 나의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사고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표현주의가 그렇지요. 『유토피아의 정신』을 집필할 때 표현주의가 얼마 강렬하게 다가왔는지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예술에 관해서 나의 입장을 개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나의 예술적 감성은 최신 작품을 고찰할 수 없을 정도로 눈멀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표현주의, 쉬르리얼리즘 그리고 놀라운 판타지를 담은 예술 작품들은 나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모든 예술작품은 꿈과 유토피아의 상을 통해서 세상의 어떤 변모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프랑스에서는 표현주의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프랑스인들은 쉬르리얼리즘이라는 실험적 예술을 발전시켰습니다. 두 가지 사조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아무런 교류 없이 낯설게 머문다는 것 자체가 매우 기이한 현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