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아나레스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의 폐단을 답습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려고, 우라스와 완전히 단절되어 살려고 합니다. 물론 완제품을 수입하거나 원자재를 공급하는 것은 하나의 무역으로서 예외적으로 용인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아나레스는 지상의 낙원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못한 작은 위성입니다. 이를테면 아나레스에는 숲이 거의 없고, 새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부 지역에는 기껏해야 물고기 그리고 원시적인 식물들만이 약간 남아 있을 뿐입니다. 아나레스에는 산소가 많이 부족합니다. 공기가 탁하고 기온이 무척 높기 때문에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자연의 악조건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쩌면 좋지 못한 생태학적 제반 조건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무정부주의적으로 결속하고 협동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으로 이주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지금까지 처절하게 노력해야 했습니다.
소설의 중점을 이루는 인물은 아나레스에서 이론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는 세벡 박사입니다. 그는 참으로 놀라운 실험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는 빠른 속도로 멀리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연구를 가리킵니다. 이 연구가 완성되면 원거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신속하게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밀리에 권력과 재산을 탐하는 그의 상사는 세벡 박사의 연구를 은근히 방해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의 연구 결과물은 쉽사리 발표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공적인 견해만을 중시하는 관료주의가 모든 개개인의 자발적인 창의력을 압살시키고 있습니다.
거대한 공허 속에서 살아가는 아나레스 사람들은 제 아무리 획기적인 물리학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눈앞에 도사린 실질적 문제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셰벡은 이러한 연구 풍토에 대해 실망하고 있을 무렵, 아라스에 있는 자본주의 국가의 어느 대학으로부터 초청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약간의 시기 동안 아나레스를 떠나 있으려고 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그를 배반자라고 비난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목표는 두 개의 세상을 서로 소통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아나레스 망명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합니다.
세벡 박사는 학교 다닐 당시에 우라스에 관한 나쁜 소문만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상에 가면 어떤 개방적인 삶이 전개되리라고 희망합니다. 이를테면 그는 우라스에서 난생 처음으로 새들을 바라보고, 젖먹이동물을 대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마치 천국에 와있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세벡 박사는 서서히 우라스의 현실에서 나쁜 점을 바라보게 됩니다. 불법이 활개치고 소비 사회의 황폐함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왜 자신의 선조들이 아나레스로 이주했는지 알게 됩니다. 처음에 우라스 사람들은 세벡 박사의 이론을 구매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을 실제 현실에 적용시키면, 우라스의 현실에 커다란 도움을 줄 것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이를 예리하게 간파합니다. 그래서 그는 우라스에 있는 야권 운동가들과 은밀히 손을 잡습니다. 그러나 야권 운동가들은 공권력의 무력 진압의 희생양으로 전락합니다.
바로 그때 세벡 박사는 테란의 대사관으로 도주한 다음에 비행선을 타고, 아나레스로 귀환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이론을 공짜로 세상에 공개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이론이 만천하에 알려져야, 엘리트의 구도가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주인공은 세상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 조종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결국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은 채 귀환합니다. 즉 과거와 미래의 개방적인 영역 속에서 자신과 시간적 영역을 서로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은 일단 폐쇄적인 공간을 떠나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인간은 흐릿하나마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고 자신이 꿈꾸는 도시를 훌륭하게 축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르 귄이 추구하는 이러한 지적인 개방성은 오로지 철학적 무정부주의 그리고 인간 평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기본적 토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소설은 독일에서 "빼앗긴 자들의 혹성"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소설은 학문적 정치학적 토론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예리한 독자의 관심사를 부추기에 충분합니다. 이를테면 제 2장부터 제 12장까지의 대목은 주인공 세벡의 유년기, 청년기 그리고 학문적 업적과 경력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제 13장에 이르러 이러한 내용은 우라스 체류와 병행하여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제 1장과 마지막 장은 소설의 틀과 다름없는데, -문학 유토피아에서 으레 그러하듯이- 어느 지도자와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르 귄 소설의 화자는 익명의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독자는 주인공 세벡의 시각을 통해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에 관해서 서서히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설에서의 가상적인, 그러나 놀라운 문학 유토피아의 모델을 과연 어디서 발견해야 할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아나레스의 무정부주의의 공동체 모델입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아나레스에는 국가가 없고, 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없으며, 재화가 균등하게 분배됩니다. 주어진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협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나레스의 공동체 모델 역시 여러 가지의 문제점을 불러일으킵니다. 첫째로 오도 Odo의 무정부주의의 페미니즘 공동체가 어느 정도 기능하는 것은 가난과 열악한 환경이라는 사회적 악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이러한 악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공동체를 영위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지 모릅니다.
둘째로 무정부주의의 페미니즘 공동체에는 이미 언급했듯이 법이 없으며, 법정이 없습니다. 공동체의 유일한 터부는 여자와 아이들에 대한 성폭력 행위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남자에 대한 성폭력 행위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 기이합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사람은 자발적으로 관청으로 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법정이 없다면, 어느 누가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드러낼까요? 범죄자는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법 집행 기관이 없는 자유방임의 상태에서는 범죄가 은폐되기 십상일 것입니다.
셋째로 아나레스에는 국가 권력이 없지만, 개개인에 대한 사회적 압박은 은밀히 존재합니다. 주인공 세벡은 규칙을 준수합니다. 가령 그가 가족을 떠나 물리학 연구에 매진하는 것도 연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친구인 극작가 티린 Tirin이 사회적 요구 사항과 무관한 작품을 발표하여 철저히 무시될 때 비로소 자신을 압박해오던 사회적 강요를 의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작품 내의 두 개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우라스 사람들은 비밀리에 개개인의 노동과 노동의 결과물을 착취하는 반면에, 아나레스 사람들은 관료주의로써 개인의 자발적 노동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르 귄은 작품 속에서 자주 어떤 두 개의 관점을 가능하게 하는 장벽을 묘사하는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문제점을 제각기 비판적으로 고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관점에 따라 두 개의 세계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L, 상기한 여러 가지 불명료한 사항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로 하여금 무정부주의의 페미니즘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 하는 논의를 촉발시키게 합니다. 문학 작품 속에 반영된, 이론적으로 불명료한 작가의 견해, 그것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새로운 사회 모델을 이해하는 자극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 어술러 르귄: 빼앗긴 자들, 이수현 옮김 황금가지 2002.
- 프레드렉 제임슨: 어슐러 르귄과 세계 축조. 미래의 고고학, 최용준 역, 버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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