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현대영문헌

서로박: 르귄의 '빼앗긴 자들. 어떤 모호한 유토피아' (1)

필자 (匹子) 2019. 8. 11. 11:30

 친애하는 L, 미국의 작가, 어슐러 K. 르 귄 (Ursula K. Le Guin, 1929 - )의 장편 소설, 『빼앗긴 자들. 어떤 모호한 유토피아 The Dispossessed: An ambiguous Utopia』는 맨 처음 1974년에 미국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년 후 독일에서 “빼앗긴 자들의 혹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어슐러 K. 르귄은 마지 피어시와 함께 오늘날 망각될 수 없는 페미니즘 계열의 사이언스 픽션의 작가입니다. 그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영향을 받고 캘리포니아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인류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독일 출신의 미국 학자 알프레트 뢰버 Alfred L. Kroeber였으며, 어머니는 작가로 활동한 테오도라 크라코 Theodora Krakow 였습니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부터 그미는 부모로부터 학문적 예술적 자양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았습니다.

 

 

 

어슐러 K. 르귄은 1969년에 『어둠 속의 왼손 The Left Hand of Darkness』이라는 장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그미가 네 번째로 간행한 소설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우주에서 살아가는 “자웅동체 인간 das Androgyne”의 삶이 처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게텐 Gethen이라는 혹성에서 살아가는 “자웅동체 인간”들의 사회를 서술합니다. 그곳에 살아가는 생명체들은 지구의 인간들과 무척 흡사합니다. 그들은 다만 한 가지 측면에서 지구인들과 다릅니다. 자웅동체 인간들은 대체로 두 사람씩 살아가는데, 동물들처럼 일시적으로 발정기를 거칩니다. 발정기가 되면 파트너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의 성을 결정하고, 파트너와 성관계를 맺습니다. 게텐 혹성에서는 성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성 차이에 근거한 권력 투쟁이 자리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오랫동안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혹성에서 기이하게 자리하는 권력을 둘러싼 암투와 지략을 놀랍게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켰습니다.

 

 

어슐러 르 귄 (1929 - 2018): 그미의 사이언스 픽션의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미의 문학은 여성 운동 그리고 평화 운동에 자극을 가했기 때문이다.

 

『빼앗긴 자들. 어떤 모호한 유토피아』는 전통적인 사이언스 픽션의 소설의 유형인 우주여행, 우주선, 로봇 등의 소재에 더 이상 무작정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작품은 유토피아라는 정치적 이념의 윤리적인 문제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철학적 아나키즘이라는 어떤 가상적인 사회상을 설계하려는 게 작가의 의도였습니다. 실제로 르 귄은 노자와 장자의 도교 사상에서 출발하여, 고드윈 Godwin, 셸리 Shelly, 마르크스 Marx, 엥겔스 Engels, 골드만 Goldman, 크로포트킨 Kropotkin 등의 세계관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크로포트킨은 다윈 식의 적자생존을 도모하는 사회주의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1902년에『상호 부조, 진화의 동인 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를 발표하면서, 이른바 인간 공동체에서 존속될 수 있는 협동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르 귄의 작품은 바로 이 책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나키즘 운동은 70년대에 이르러 브리안트 J. Bryant, 스탠턴 M. Stanton, 알렉산드라 Th. P. Alexandra, 피어스 M. Pierce, 루스 J. Russ 등의 이른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설계된 유토피아와 무척 흡사한 것입니다. 페미니즘에 근거한 무정부주의의 유토피아는 60년대 그리고 70년대 미국에서 나타난 강력한 정치 운동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시민권리 옹호론자, 여성 운동가 그리고 생태학자들은 미국의 보수주의적 정책에 대해서 급진적으로 대항해 왔습니다.

 

소설은 이러한 페미니즘 유토피아주의자들의 정치적 철학적 입장과의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흔히 종래의 유토피아에서는 언제나 어떤 발전을 유도하는 엔지니어링과 같은 의미에서의 극단적 미래 사회가 설계되었습니다만, 르 귄은 작품에서 통상적인 미래 사회의 설계를 선취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미는 주어진 현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통해서 어떤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양자택일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전통적 유토피아의 모델을 일부 수용하지만, 그것의 이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이른바 전통적 유토피아에 대한 생소화 전략인 셈입니다.

 

 

 

위의 글은 르 귄의 발언이다. 이 세상에는 날개 없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르 귄은 날개를 단 인간이야 말로 세계와 자신을 변화시키는 인간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빼앗긴 자들. 어떤 모호한 유토피아』의 배경은 두 개의 장소입니다. 그 하나는 “우라스 Urras”라는 지역으로서, 우주의 어느 혹성에 해당하며, 다른 하나는 “아나레스 Anarres”라는 지역으로서, 우라스 혹성 주위를 도는 위성에 해당합니다. 처음에 아나레스는 사람이 살지 않았고, 그저 원자재 채굴을 위한 지역이었는데, 몇몇 이상주의자들이 아라스를 떠나, 아나레스에 정착하여 살아갑니다. “아라스”에는 서로 적대적으로 대치하는 국가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파시즘 군사독재 국가도 있으며, 사회주의 체제의 중앙집권 국가도 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다른 색채를 드러내지만, 원자재를 착취하고 소비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유사합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비참하게 소외되어 살아가지만, 국가의 우두머리들은 이러한 사회적 소외 현상이라든가 비참한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이러한 가상 국가들의 현실은 작가 르 귄이 처했던 70년대의 지구상의 현실과 흡사합니다.

 

이에 반해서 아나레스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는 곳입니다. 아나레스에도 국가의 시스템이 없는 게 아니지만, 전통적 의미에서의 국가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약 170년 전에 “오도 Odo”라는 이름의 여성이 동지들을 규합하여 혁명을 일으켜서 공동체를 건립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에서는 법이 없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어떤 무정부주의적인 공동체의 삶입니다. 무정부주의의 공동체에는 지배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법도 없고, 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상부가 나서서 강력한 폭력으로 죄인들을 단죄할 필요성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공동체의 관청에 참여하여 돌아가면서 그것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관청에서 일할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4년이라고 합니다.

 

공동체를 다스리는 관청은 오로지 재화의 분배 그리고 용역과 서비스를 관할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생산과 분배의 조절체 PDK”로 명명되고 있습니다. “아나레스”에서는 어떠한 사유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은 사적으로 소유하려는 의식 자체를 멀리하고 살아갑니다. 풍요로움과 사치는 이곳에서는 추악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결혼 제도도 없고, 가정도 존속되지 않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나레스는 중앙집권적 조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 사람들이 도시를 해체하고 시골의 전원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나레스는 과학 기술을 충실하게 연구하고, 협동과 상호부조의 삶을 실천하려고 애를 씁니다.

 

아나레스에서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종교에 관한 사항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기 때문에 절도가 없으며, 재화를 착복하는 경우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든 형태의 이기적 사고, 이를테면 개인주의 내지 소유욕 등은 사회를 해치는 것으로 취급됩니다. 따라서 아나레스 사람들은 우라스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제도상의 문제점들, 이를테면 사유 재산, 매춘 그리고 감옥 등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