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중세 문헌

동방의 여행자 마르코 폴로 (2)

필자 (匹子) 2018. 6. 8. 13:37

6. 쿠빌라이 칸과의 만남.: 그들은 드디어 중국에 도착하였습니다. 둔황은 타클라마칸 사막 지역의 남북을 잇는 교류의 중심지였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수많은 중국인들 그리고 불교문화를 접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폴로 가족들은 1275년 중국의 티베트에서 쿠빌라이 칸을 만납니다. 당시 몽고 제국은 중국에서 오늘날 이라크까지 북쪽으로는 러시아 지역까지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만리장성의 지역을 분명히 지나쳤는데도, 이에 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만리장성은 수십 년 전에 몽고의 칭기즈칸에 의해서 거의 대부분 폐허로 변해 있었으므로, 굳이 언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폴로 가족들은 1291년까지 이곳에서 쿠빌라이 칸의 보호를 받으면서 머물렀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세 사람의 유럽인을 환대하면서 이들을 기독교 전파자로 임명하였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전파자의 임무로 중국 전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은 중국인들이 말린 돼지고기를 먹고 콩 소스를 만들어 먹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고, 이를 야만적이라고 서술하였습니다. 그는 중국의 전역을 돌안=다니며, 찬란한 건물에 열광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본을 시판구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7. 16년 체류 후 마르코 폴로, 귀국하다.: 쿠빌라이 칸은 그들을 환대하면서 기독교 전파를 위한 교사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쿠빌라이 칸이 제공하는 우편 마차 길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지폐가 만들어진 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10년의 세월이 흘러갑니다. 중국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세 사람은 베네치아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이 무렵 세 명의 페르시아 외교관이 쿠빌라이 칸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왕의 신부를 구하기 위해서 멀리 찾아왔던 것입니다. 몽고의 황제는 17세의 공주 쾨쾨친을 페르시아의 왕의 신부 감으로 책봉하고, 그미를 페르시아로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정치적 갈등으로 인하여 육로 길이 매우 위험하고, 험해서 상인들은 선박을 통해서 페르시아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쿠빌라이 칸에게 이를 허락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결국 폴로 가족은 페르시아의 사절단과 쾨쾨친 공주와 함께 배를 타고 페르시아로 향합니다.

 

 

8. 뱃길을 통한 귀항: 폴로 가족은 1291년 뱃길을 통해서 베네치아로 향하려고 중국 남동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장주로 갑니다. 출발할 때에는 600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으나, 마지막에 이르러 오랜 항해 끝에 고작 17명이 살아남게 됩니다. 사람들은 수마트라 그리고 스리랑카에 잠시 머뭅니다. 18개월의 항해 끝에 배는 페르시아의 항구 호르무스에 당도합니다. 흑해 근처에 있는 트랍존 지역에서 폴로 가족들은 그곳의 관리에 의해서 안타깝게도 500 킬로그램에 해당하는 비단을 압수당하고 맙니다. 그들은 육로를 통하여 수개월 걸어서 이탈리아로 향합니다. 1295년에 마침내 고향인 베네치아에 도착했을 때 세 사람은 거의 빈털터리의 거지를 방불케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폴로 가족들은 옷 속에 은밀히 감춘 보석을 꺼내어 자신이 마르코 폴로 가족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9. 마르코 폴로, 감옥에서 자신의 여행기를 집필하다.: 마르코 폴로가 도착 후에 어디서 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에게 세 명의 딸이 있었고, 카나레지오에서 작은 집을 구해 살았으며, 작은 문제로 두 번의 법정 소송을 치렀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가 끝없이 몽고의 황제가 지닌 풍요로움을 떠들어댔다는 것을 기억했을 뿐입니다. 몇몇 전기 작가의 주장에 의하면 마르코 폴로는 함선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1298년에 그는 코르졸라 근처의 해전에서 싸우다가 제네바의 포로가 되어 1999년까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마르코 폴로는 파라조 산 지오르지오의 감옥에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서 피사 출신의 죄수, 루스티켈로를 만나서 자신의 여행기를 집필하게 합니다. 집필은 마르코 폴로가 구술하면, 루스티켈로가 받아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책은 문학사에 남게 되었고, “세계의 기적에 관한 책이라는 제목의 프랑스 문헌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