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중세 문헌

서로박: (1)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필자 (匹子) 2019. 6. 8. 11:41

1. 프랜시스 베이컨, 정치가 그리고 자연과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1561 – 1626)은 평생을 자연과학에 전념한 게 아니라,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다음에 오랫동안 영국의 정치가로서 활약했습니다. 그는 안드레애와 캄파넬라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습니다. 물론 간간이 경험철학과 자연과학의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기는 하였지만, 그의 임무는 오랫동안 정치에 국한되었고, 1618년 대영제국의 엘리자베스 1세의 치하에서 대법관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이 점은 토마스 모어의 경우와 매우 흡사합니다.

 

베이컨은 토마스 모어와 마찬가지로 왕족들의 사생활에서 기인하는 여러 가지 암투와 권력 투쟁과 관련된 갈등에 시달렸고, 정적과의 헤게모니 싸움에 연루되었습니다. 1620년에 베이컨은 비리와 금품 수수의 혐의로 인하여 하마터면 처형을 당할 뻔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프랜시스 베이컨은 토마스 모어와 같은 도덕주의자가 아니었고, 안드레애처럼 올곧은 종교개혁자가 아니었으며, 캄파넬라처럼 우주론적 철학자도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Berneri 122). 놀라운 것은 그가 오로지 말년의 시기에 열정적으로 자연과학에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책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그야말로 과학과 권력이 놀라운 방식으로 조화를 이룬 갈망의 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베이컨의 삶, 끝없이 이어지는 찬란한 비상과 순간적 추락: 프랜시스 베이컨은 1561년 1월 22일 변호사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스 베이컨은 엘리자베트 1세의 재위시절에 고위 법관으로 활동한 사람이었는데, 앤 쿠크라는 여성과 재혼하여 베이컨과 그의 동생 앤서니를 아들로 거느리게 됩니다. 프랜시스는 동생과 함께 1573년에 캠브리지의 명문 트리니티 대학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의 몸은 무척 병약했으므로, 대학 내에서 그다지 놀라운 성적을 취득하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는데, 사변 철학에 대한 그의 부정적 입장은 평생 지속되었습니다.

 

1576년 그는 프랑스주재 영국대사 아미아스 폴레를 대동하여 파리로 떠납니다. 그러나 그후 3년 뒤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급히 런던으로 되돌아옵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돈으로 경제적 문제에 어려움이 없었던 그는 그레이 인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젊은 변호사로서 활약합니다. 학문과 정치 두 가지 기로에 선 프랜시스 베이컨은 정치가로 살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정치가로서 성공의 가도를 걸어가다가 1618년 대영제국의 수상의 직위까지 오릅니다. 그동안 프랜시스 베이컨은 학문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새로운 아틀란티스』 그리고 『거대한 혁신 Instauratio magna라는 문헌으로 출현하게 됩니다.

 

3. 말년의 자연과학 연구: 베이컨은 토머스 모어와는 달리 다소 씀씀이가 헤픈 정치가였습니다. 토마스 모어가 청렴하고, 깊은 신앙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프랜시스 베이컨은 뇌물이든 정상적인 수입이든 아랑곳 하지 않고 많은 재화를 벌여들었습니다. 이는 결국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1621년 3월 14일 그의 정치적 적대자는 베이컨을 대영제국의 수상으로서 뇌물을 수수했다고 고발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프랜시스 베이컨은 27차례에 걸쳐서 경제적 특혜 등의 이권과 관련되는 돈을 누군가로부터 상납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하루아침에 권력을 내놓고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베이컨은 왕으로부터 사면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621년 5월 3일 40,000 파운드의 벌금을 납부한 그는 당국으로부터 모든 관직을 박탈당했고, 영원히 의회 활동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으며, 왕궁으로부터 12마일 이내의 접근 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때는, 그의 나이 육십이었습니다.

 

베이컨은 그곳에서 죽기까지 오로지 약 6년간 학문에 몰두하였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평소에 연구해둔 내용을 문헌으로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이컨의 죽음은 극적으로 찾아왔다고 합니다. 1626년 3월 베이컨은 닭을 얼음 속에 꽁꽁 얼리면 소금에 절이는 것보다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는지 실험하던 중에 독감에 걸려 사망합니다. 브레히트는 단편 「실험」에서 그것을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는 냉동기술이 개발되지 않았는데, 브레히트의 작품에서 베이컨은 우연히 얼음 속에 싱싱하게 보관된 참새 한 마리를 발견하고, 제자로 하여금 닭을 죽어서 눈더미 속에 보관하게 합니다. (Brecht: 264ff). 물론 과거에도 학문에 전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베이컨이 지상의 행복을 위한 많은 결실을 맺은 것은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작품 『새로운 아틀란티스 Nova Atlantis』역시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추측컨대 1624년에 맨 처음 영어로 집필되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라틴어판은 베이컨이 사망한 뒤인 1627년에 간행되어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4. 미완성으로 남은 『새로운 아틀란티스』: 베이컨의 비서이자 출판사 사장이었던 윌리엄 롤리William Rawley가 없었더라면, 베이컨의 글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롤리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처음에 베이컨은 어떤 이상적인 국가의 구체적인 형상 및 이상국가의 법령들을 설계하려 했다고 합니다. 베이컨은 다음과 같이 확신했습니다. 즉 이상적인 국가는 그 본성에 있어서 인류의 번영을 가장 깊이 그리고 폭넓게 추구해야 하는 무엇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베이컨의 작품은 의도와는 달리 미완성의 문헌으로 남게 됩니다. 즉 완성된 부분이라고는 다만 작품의 틀로서 작용하는 서언 그리고 자연과학적 연구의 일부에 해당하는 연구 체계의 조직에 관한 대목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이컨은 작품을 완성하기 이전에 (책의 핵심 사항에 해당하는) 자신의 본격적 연구에 몰두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베이컨의 연구 결과는 나중에 『새로운 아틀란티스』와 함께 『실바 실바룸 Sylva sylvarum』에 실리게 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실바 실바룸』은 자구적으로는 “숲의 숲”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1626년 베이컨이 사망한 다음에 그의 비서이자 출판업자인 윌리엄 롤리가 베이컨의 연구 문헌을 모아서 간행한 방대한 책입니다. 이 책에는 천년 동안의 자연의 역사를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의학 연구에 관한 글도 실려 있습니다. 특히 베이컨은 생명 연장의 가능성과 육신의 보존에 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바 있습니다. 특히 이 책에는 이를테면 질산칼륨 그리고 아편에 관한 여러 가지 효능도 세밀하게 기술되어 있다고 하니, 베이컨의 자연과학의 연구는 분명히 전문가 이상의 수준에 달해 있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