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국가주의의 인디언 유토피아: 라옹탕의 유토피아는 “고결한 야생bon Sauvage”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럽 사회와는 전혀 다른, 신대륙의 문화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어쩌면 인디언 문화를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고결한 야생”은 이른바 “수치스러운 서구문명”과 정반대의 사항으로 이해됩니다. 실제로 유토피아의 상은 시대 비판을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수단을 사용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라옹탕의 유토피아에서 17세기 유럽의 절대 왕정의 사회에 대한, 우회적이지만 노골적 비판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시대 비판과 관련하여 17세기 프랑스에서 출현한 라옹탕의 문학 유토피아는 국가주의의 모델 그리고 비국가주의의 모델에 관한 분명한 선을 긋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라옹탕이 설계한 “야생 공화국République Sauvage”은 자연을 지배하지 않고, 도시 문화 내지 국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주의 유토피아의 전형적 특성에 해당하는 기하학적 구도는 라옹탕의 유토피아에서 출현하지 않습니다. (Funke: 24f). 예컨대 베라스, 퐁트넬 그리고 모렐리의 사회 유토피아가 국가중심의 거대한 사회 유토피아를 설계하고 있다면, 푸아니, 페늘롱 그리고 라옹탕의 사회 유토피아는 비-국가주의의 유토피아 모델, 다시 말해서 무정부주의의 유토피아 공동체의 모델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2. 세 권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기록: 루이 아르망 드 롱다르 라옹탕 (Louis Armand de Lom d’Arc, Baron de La Hontan)은 오늘날 캐나다에 해당하는 신-프랑스 지역에 관한 이모저모를 유럽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한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유럽 중심적 시각에 근거한 주관주의의 태도로써 새로운 문화에 접근했지만,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아메리카 인디언과 관련되는 민속학 연구에 공헌하였습니다. 그의 여행기는 여행 지역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중립적으로 서술할 뿐 아니라, 저자로서 그곳 현실의 사안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에서 고유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라옹탕은 18세기 초에 유럽으로 돌아온 다음에 1703년부터 암스테르담에서 도합 세 권의 책을 연이어 간행하였습니다.
첫 번째 책은『라옹탕 남작의 북아메리카로 향하는 새로운 여행Nouveaux Voyages de MR le Baron de Lahontan dans l’Amerique Septontrionale』(1702)입니다. 이 책은 작가가 신-프랑스 지역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개인적 삶을 편지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책은 『라옹탕 남작의 여행에 이끌려 작성한 북아메리카에 관한 회고록Memoires de l’Amerique septentrinale ou La Suite des Voyages de MR. Le Baron de Lahontan』(1702)입니다. 이 문헌은 인디언 부족들의 삶과 문화를 지리학과 민속학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책은 『아메리카 여행에 관한 이어지는 이야기, 혹은 라옹탕 백작의 대화 그리고 야생에 관하여Suite du Voyage, de l’Amerique ou Dialogues de Monsieur le Baron de Lahontan et d’un Sauvage』(1703)입니다. 저자는 세 번째 책에서 아다리오 콘디아론크 추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서구 문명을 비판하고, 고결한 야생에 관한 새로운 내용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3. 라옹탕의 삶 (1):루이 아르망 드 롱다르 라옹탕은 1666년 6월 9일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몬드마상에서 몰락하는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남작이었지만 가난한 기술자였습니다. 라옹탕은 어린 시절부터 인문학의 소양을 쌓았습니다. 1674년 고아가 되었을 때 그에게 남작의 재물이 유산으로 주어졌으나, 1677년 유산 상속으로 인한 골치 아픈 분쟁으로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가 당시의 권력층과 인간적 유대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산과 관계된 사람들은 해당 판사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권력층 사람들의 힘과 관료주의의 방식을 동원하여, 그가 응당 받아야 할 유산을 다른 사람에게 빼돌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쓰라린 경험은 그의 마음속에 유럽 문화에 대한 일그러진 상으로 각인되어, 그의 여행기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결국 라옹탕은 15세의 나이에 생계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프랑스 황실 소속의 해군에 입대합니다. 얼마 후에 그는 북아메리카에서 식민지 장교로 일하라는 명령을 받고 신대륙으로 향하게 됩니다. 처음에 퀘벡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처음에 프랑스 군대와 인디언들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1685년부터 1687년까지 라옹탕은 인디언의 언어를 배우고, 시간이 하락하는 대로 사냥과 독서를 즐겼습니다.
4. 라옹탕의 삶 (2):1688년에 인디언들과 유럽군인들 사이에 끔찍한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당시에 캐나다 서부에 진군한 영국군들과 이들의 경제적 욕구가 프랑스 군인들 뿐 아니라, 인디언들과 심각한 일력을 부추겼던 것입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인디언들을 속이고 이들 부족들을 이간질시키는 등 온갖 사악한 짓거리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인디언 전사들도 부분적으로 영국군대 혹은 프랑스 군대에 편입되어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1687년에 드농비유의 휘하에서 여러 번 영국군과 이로케 부족과 대항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려면, 우리는 제임스 쿠퍼James Cooper의 소설 『모히칸족의 마지막 후예The Last of the Mohicans』(1826)를 접하면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는 인디언들과 교우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익히게 되어, 수개월간 북아메리카의 거대한 지역을 탐험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에 식민지를 지배했던 프랑스 장군은 라혼탄을 초대하여 통역의 임무를 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5. 라옹탕의 삶 (3): 라옹탕은 바로 이 시기의 경험을 글로 서술합니다. 이것은 편지 형식으로 기술된 바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라옹탕이 앙시앵레짐의 사회 현실에 대해서 얼마나 증오했는가 하는 사항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북아메리카에 주둔하고 있는 예수회 사람들의 도덕적 지침에 대해서 라옹탕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혐오감을 드러내었습니다. 예수회 사람들의 계율 속에는 유럽 계층 사회의 구태의연한 권위적 구조가 도사리고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다음의 사항입니다. 라옹탕은 프랑스 장교로 복무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프랑스 군인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서서히 자신의 처지를 불만스럽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인디언들에 대한 동정심은 커져갑니다. 당시에 라옹탕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유럽인들의 부패는 너무나 극에 달해 있어서, 마치 유럽인들이 상대방을 살육하기 위해서 법을 만든 것처럼 생각될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북아메리카에서 살아가는 인디언을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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