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번역 행위는 하나의 텍스트를 다른 언어의 텍스트로 옮겨놓는 일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원전과 번역 텍스트는 언어의 측면에서 고스란히 겹쳐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단어, 문장, 문단 그리고 문맥 등은 동일한 의미로 옮겨질 수 없다. 왜냐하면 두 개의 특정한 언어 체계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탄생 시점의 시대와 역사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번역 작업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첫 번째 사항은 원전의 역사성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번역자는 일차적으로 원전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진정한 번역은 관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번역자는 순수한 언어를 자기 자신의 매체를 통해서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원전 속으로 잠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번역 행위에서 오로지 원전의 의미만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게 중요할까? 원전의 의미를 충직하게 추적하여 그것만을 재현시키는 일이 번역이라면, 번역자의 기능은 대체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은 과거의 역사성만을 중시하는 게 번역자의 책무인가? 하는 물음과 관련된다. 번역자는 과거의 무엇을 일차적으로 밝히려는 의향을 지니지만, 그가 처하고 있는 번역자 자신과 그를 둘러싼 독자층이 처하고 있는 시대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원전의 내용이 현재 번역자가 처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다면, 번역 행위의 욕구와 당위성은 처음부터 강하게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번역 행위란 다른 언어의 텍스트로써 원전에 담겨 있는 시간과 장소를 옮겨놓는 작업”이라고 정의 내린 한스 요제프 페르메어 Hans Josef Vermeer의 견해에 동의한다. 이와 관련하여 번역 작업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두 번째 사항은 원전의 현재성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번역자 그리고 독자층이 원전 그리고 원전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적 문화에 별반 관심이 없으면, 원전의 번역은 실질적 관심사에서 많이 벗어나게 될 것이다.
해석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H. G. Gadamer는 번역을 하나의 해석 행위로 이해하고 그것을 빛을 밝히는 행위로 설명했다. 이는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하이데거 등의 해석학적 전통을 연구하면서, 이들 해석학자들의 주장과는 다른, 이른바 수용자의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요망사항이라는 점을 도출해낸 결과로 이해된다. 어떤 뜻하는 사실이 여러 개로 판명될 경우 인간은 그 가운데 가장 타당한 무엇을 마치 빛처럼 밝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저자보다는 독자, 역사성보다는 현재성을 더욱 중요한 것임을 밝히려고 했는데, 이는 번역 이론에 그대로 적용되는 사항이다. 원래 의사소통은 다음과 같은 소통의 구도를 지닌다. 저자 -> 텍스트 (저서) -> 독자 이에 비하면 번역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이중 구도의 소통의 과정을 거친다. 1. 저자 -> 텍스트 (원서) -> 역자, 2. 역자 -> 텍스트 (역서) -> 독자 (이에 관해 또 다른 지면에서 논하기로 한다. 이에 관심을 지닌 분이 계신다면, 임홍배 교수의 번역으로 간행된 『진리와 방법』 제 2권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가다머의 해석학은 독서 행위에 관한 문헌학 그리고 독자 반응비평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저자의 의향을 아예 처음부터 무시하거나 대폭 약화시키는 대신에, 독자의 반응을 수용 미학적 관점에서 가장 유효한 기능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의 여러 판본 그리고 번역의 문제에 관한 사항이다. 『자발적 복종』은 필자에 의해서 2004년에 울력 출판사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의 수정판은 2015년에 다시 간행되었다. 편의상 이 책을 “울력의 문헌” I, II 이라고 언급하기로 한다. 프랑스어 그리고 독일어 등의 두 가지 판본을 바탕으로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다. 특히 울력의 문헌 II의 「보론」에서는 라 보에시의 문헌의 영향에 관한 텍스트들이 실려 있어서, 이후에 간행된 역서보다 방대하다.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울력의 문헌 II는 역사성은 물론이고, 프랑스 혁명가들, 이후 무정부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에게 끼친 영향을 함께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자발적 복종』은 2015년에 심영길 목수정의 번역으로 생각 정원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편의상 이 책을 “생각 정원의 문헌”이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불평등한 사회적 현실을 염두에 둔 것 같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문제는 “생각 정원의 문헌”이 문헌학적 하자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라 보에시가 참조한 고전 서적들에 관한 각주 처리가 거의 생략되어 있으며, 원 저자의 의향은 아예 무시되고 있다.
번역문 전체에서 제반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대한 현대인들의 저항을 촉구하며, 혁명적 행동을 유도하려는 뉘앙스로 가득 차 있다. “생각 정원의 문헌”은 역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목수정 자신의 문화 운동의 팸플릿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리고 생각 정원 출판사 사장의 도서 판매의 목적으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다른 측면을 고려할 때 “생각 정원의 문헌”은 한 가지 긍정적 측면을 표방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원 저자의 고유한 의향을 약화시키고, 독자 반응을 무엇보다도 적극적으로 고려했다는 점이다.
『자발적 복종』2020년에 세 번째로 간행되었다. 번역자는 손주경 교수이며, 도서출판B에서 간행되었다. 일단 편의상 이 책을 “출판B의 문헌”이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동일한 원본이 이미 두 개의 한국어 문헌으로 번역되고 소개되었는데, 왜 그는 다시 세 번째로 『자발적 복종』을 간행해야 했을까? 역자 손주경 교수는 「옮긴이 해제」에서 새롭게 번역 출판하게 된 이유로서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이전에 간행된 판본들에서 “수많은 의역과 오역이 발견”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전의 판본들이 “자유를 위한 지식인의 책임”을 중시하지 않고, “폭정을 전복하려는 혁명가의 날선 모습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165쪽)
첫째로 손주경 교수는 이전의 판본에서 나타나는 의역과 오역이 무엇인지 지적하지 않고 있다. 비판을 하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게 도리가 아닐까? 가령 “울력의 문헌”과 “생각 정원의 문헌” 가운데 어떠한 구절 그리고 문장들이 의역인지, 오역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지 않은 채 이전의 판본의 번역을 한마디로 매도하는 게 과연 온당한 처사인가? 하고 묻고 싶다. 필자는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도, 이에 대한 근거가 예시되지 않은 지금의 상태에서는 아무런 반론을 구체적으로 제기할 수가 없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세 개의 판본을 비교하여 훗날 제 3판이 간행될 때 첨부하기로 한다. “출판b의 문헌”은 책 제목을 “자발적 복종”으로 명명하면서도 본문에서는 “자발적 복종에 관한 논설”이라고 적혀 있다. 이를 고려할 때 제목은 이전에 간행된 문헌에서 차용된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번역 시 “자발적 복종”이라는 제목을 놓고 오랫동안 고심했는데, 나의 고심을 일거에 해결해준 분은 다름 아니라 홍세화 선생이었다.
둘째로 손주경 교수는 무엇보다도 역자의 관심이라든가 독자 반응보다는, 무엇보다도 원저자의 의향을 중시하고 있다. 물론 라 보에시는 실제로 처음부터 “사악한 군주제”를 비판하면서, 이를 노골적으로 문제 삼으려고 『자발적 복종』을 저술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사법 기관의 집정관으로 살면서, 신교와 구교의 갈등 문제에 고심하였다.) 고대 작가들의 자유에 대한 외침에 열광하여 라 보에시는 이른바 신과 자연에 의해 설정된 폭정이라는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전하려고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라 보에시가 제시하려 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인민의 인내심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는데, 만약 인민이 그것을 참지 못하게 되면, 저항과 폭동은 인민의 권리와 의무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발적 복종』이 당시에 자유과 관련된 지식인의 책임을 강조한 문헌이라는 손주경 교수의 주장은 그 자체 타당하나, 일방적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발적 복종』의 함의는 해석학적 차원에서 역사성 뿐 아니라, 나아가 현재성에 도사리고 있다. 『자발적 복종』을 접하는 독자는 16세기 몽테뉴가 살던 시대의 갈등과 문제점 외에도 자유로운 인간을 무조건 굴종하게 하는 "지금 그리고 여기"의 여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전과 저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역사성이 중요하든, 번역 의향과 독자들의 현재성이 중요하든 간에 우리는 『자발적 복종』이라는 문헌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공히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든 권력은 근본적으로 이를 동의하고 지탱해주는 신하들에 의해 유지될 뿐이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자발적 복종』은 저자의 의향보다는 독자의 반응의 측면에서 더욱더 강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직간접적인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얼마나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가는가? 자식은 부모에게, 아이는 어른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무조건 자발적으로 허리를 굽힌다면, 이는 시정되어야 마땅하다. 장유유서, 부부유별이라는 유교적 관습은 21세기의 사회에서 더 이상 전적으로 유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건없이 복종하는 인간의 사회는 노예들의 사회이다. 세계에서 권위주의가 횡행하는 나라는 중동 국가일 수 있지만, 특히 한중일 세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권위주의적인 사회는 권위적인 관습 그리고 도덕 그리고 법을 통해서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복종을 강요한다.
현재 지구에는 80억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나, 그들을 지배하는 자들은 손꼽을 정도로 적은 수의 국가 원수들이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원치 않는 전쟁에 참여하여, 국가의 요청에 의해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무기를 거머쥐고 있다. 그렇기에『자발적 복종』이 저자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프랑스 혁명, 19세기 말의 아나키즘 운동 그리고 사회주의 평등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야 말로 “창조적 오해 malentendu créatif”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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