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르크스의 구체적 유토피아: 마르크스 이전에 출현한, 이상적으로 설계된 공동체들은 규모에 있어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그 하나는 오언과 푸리에가 설계한 비국가주의의 공동체이며, 다른 하나는 카베와 생시몽이 설계한 국가주의의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전자가 마치 모든 권한이 분산되어 있는 연방처럼 어떤 소규모의 자치적인 공동체를 설계했다면, 후자는 중앙집권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공동체를 하나의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 전자가 푸아니, 디드로, 라옹탕의 “국가 없는” 사회 유토피아로 형상화되었다면, 후자는 모어, 캄파넬라, 모렐리 등의 국가주의 유토피아 모델과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국가가 없다.”고 해서 국가의 체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비록 지배 내지 권력이 배제되어 있지만, 행정 기관으로서의 국가의 틀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어쨌든 두 가지 유형의 유토피아는 주지하다시피 프랑스 혁명 이후의 유럽에서 태동한 가상적인 유토피아로서 초기 자본주의가 발발할 무렵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 유토피아들은 엥겔스의 표현에 의하면 구체적 유토피아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태동하기 이전에 나타난 “추상적인 유토피아”로서, 자본주의 속에 내재해 있는 근본적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간파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Engels: 205f.) 여기서 말하는 문제점이란 뒤이어 언급하겠지만 상품 생산, 상품의 유통 그리고 소비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잉여가치로 인한 계급적 착취 현상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2. 주어진 현실이라는 장애물: 마르크스는 1818년 변호사 하인리히 마르크스의 셋째 아들로서 트리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유대인 가운데에서 존경 받는 랍비 출신이었는데, 아버지는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1년 전에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폴레옹 치하의 프로이센 정부는 유대인을 관리로 채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830년부터 약 5년간 마르크스는 트리어에서 김나지움을 다녔으며, 17세에 아비투어를 마쳤습니다. 그는 1836년에 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독일의 학문적 풍토는 헤겔이 사망한 지 5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헤겔의 영향 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헤겔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가난과 싸워야 했고, 당국의 폭정과 검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게다가 국가는 루터 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종교적으로 핍박을 가했습니다. 헤겔 좌파에 속하던 마르크스로서는 이러한 세 가지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 압박에 관해서 깊이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마르크스의 삶 (1): 마르크스는 1841년 예나 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 후에 본Bonn 대학교수 직을 얻으려고 했으나, 프로이센 당국은 그를 교수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유인즉 마르크스 역시 루드비히 포이어바흐 그리고 브루노 바우어와 마찬가지로 헤겔 좌파의 인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수직을 얻지 못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추측컨대 마르크스가 유대인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해에 쾰른에서는 “라인 지방 신문Die Rheinische Zeitung”이 간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신문은 비교적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서 창간된 것입니다. 당시 유럽 지식인들의 정치적인 견해의 스펙트럼은 무척 다양했습니다. 군주제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급진적 민주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1842년 10월에 이 신문을 인수하여, 자신이 표방하는 급진적 민주주의의 입장을 실천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는 헤르베크Herwegh 그리고 아르놀트 루게Arnold Ruge 등과 협동하여,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와의 입장 차이를 분명하게 내세웠던 것입니다.
바우어는 처음에는 종교 비판의 철학으로 포이어바흐와 함께 헤겔 좌파의 쌍두마차로 기여했지만, 1848년 3월 혁명 이후에는 정치적 보수주의로 급선회합니다. 게다가 그는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유대인 문제」(1843)를 발표했는데, 마르크스는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Zur Judenfrage」라는 반박문을 발표하였습니다. 1842년 12월에 베를린에 살던 엥겔스는 쾰른에 거주하던 마르크스를 방문합니다.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의 우정관계가 지속됩니다. 당시에는 지식인으로서 신문을 간행하기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프로이센 당국은 1817년 칼스바더 협정이 체결된 뒤부터 검열을 강화하기 시작합니다. 40년대에 라인 지방 신문은 당국의 입장으로 고찰할 때 눈 위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칼스바더 협정은 1819년에 러시아의 영사이자 유대인 출신의 작가인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 (August von Kotzebue, 1761 - 1819)가 독일의 수구적 민족주의의 지조를 지닌 어느 신학대학원에 의해 총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맺어진 협정이었는데, 여기서 오스트리아 독일 등의 군국주의 국가들은 독일 내의 자유주의 내지 민족주의의 경향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감시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4. 마르크스의 삶 (2): 마르크스는 1843년 3월에 라인 지방 신문의 편집진에서 물러납니다. 그해에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식을 올렸으며, 그해 가을에 파리로 거주지를 옮깁니다. 아무래도 프로이센보다는 프랑스 파리가 지식인으로서 활동하기에 낫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친구인 루게와 함께 파리에서 “독불 연감”을 간행합니다. 그러나 잡지는 지속적으로 간행될 수 없었습니다. 경제적 문제, 독자의 호응도 때문이기도 하였으며 (독불 연감은 독일어 문장으로 간행되어, 프랑스 시민들이 그 내용을 바로 접하기 어려웠습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 등은 독일 출신의 낯선 유대인 학자를 처음부터 경원시했습니다. 그렇지만 놀라운 것은 마르크스가 프랑스 망명의 시기에 자신의 이론의 근거가 되는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닦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1844년 “파리 수고”로 알려진 바 있는 「경제 철학 수고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가 완성되었습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라는 수식어를 탈피하여, 소외된 노동에 관한 자신의 고유하고 독창적인 이론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뒤이어 마르크스는 젊은 헤겔주의자들과의 수차례 토론을 거듭하며, 엥겔스와 함께 『신성 가족Die heilige Familie』을 완성합니다. 이 문헌을 통하여 마르크스는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헤겔 좌파인 브루노 바우어 그리고 무정부주의자인 막스 슈티르너의 이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합니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의 종교 비판의 관점을 경제 상황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을 거둡니다. 이러한 작업은 먼 훗날 발표되는 「포이어바흐 테제」 그리고 『독일 이데올로기』을 통해서 결실을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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