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블로흐가 파악한 기독교 속의 유토피아 (3)

필자 (匹子) 2017. 1. 16. 09:44

12. 종말론의 의미: 기독교는 블로흐에 의하면 태초의 진리로서의 알파가 아니라, 마지막 오메가로서의 종말론적 사고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데미우르고스의 세계 창조의 진리 내지 영원한 올바름으로서의 의미보다는 마지막 시점에 새롭게 탄생할, 또 다른 세계로서의 예루살렘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모이라 여신은 점성술의 숙명을 강조합니다. 그미는 인간의 운명을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으며, 어떤 누구라도, 심지어는 올림포스의 신이라고 하더라도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의 유일신 야훼는 회개와 변화 가능성에 따라 인간에게 자신의 숙명을 비켜가게 조처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참회를 통한 운명의 변화 가능성을 용인할 뿐 아니라, 인간의 능동적 삶의 변화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블로흐 2004: 2776). 이로써 정당화되는 것은 창세기의 운명적 믿음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묵시록의 역동적 변화에 관한 신앙이며 진리라고 합니다. 인간은 결국 상부의 높은 존재로서 군림하는 분의 뜻에 따라서 머리를 굽힐 게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면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성령의 가르침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마지막의 순간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무엇을 실천할 수 있으며, 또한 실천해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숙명론이 이른바 -기억Anamnesis”이라는 영혼의 원초적 지식으로서의 ”“알파/ 시작의 원형 구조에 근거한다면 (Platon: 75e), 기독교의 종말론은 개방된 아직 아닌 존재das Noch-nicht-Sein”라는 오메가/ 마지막의 구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묵시록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가작 극적인 전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13.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 해석: 여기서 우리는 원시 기독교의 강령이 사도 바울에 의해서 상당 부분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타르소스 출신의 유대인, 사도 바울은 예수의 말씀을 약간 변화시켰습니다. 타르수스 출신의 유대인, 사도 바울은 생전에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학식을 지닌 유대인 바울은 처음에는 기독교를 탄압하는 선봉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어느 날 다마스쿠스에서 낙마落馬한 다음에 그는 지금까지의 행동을 후회하고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후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박해당하지 않고, 교회가 보존되도록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문제는 기독교 사상에서 예수의 사회 변혁의 이상이 사라지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내면 그리고 저세상만이 강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블로흐에 의하면 사도 바울의 영향에서 비롯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신에게 지불한 대가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로써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어떤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죽음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마음에서 출현하셨으며, 인간을 모든 죄로부터 구제하려고, 자청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최후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이다.” 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무엇보다도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기 때문에 메시아이다.” 라고 말입니다. (블로흐 2008: 311).

 

14. 사도 바울의 빛과 생명: 사도 바울은 향유 바른 예수의 빛 그리고 생명 (φώς και ζωή)”의 정신에 입각하여, 신자들에게 어떤 장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즉 경험적이지는 않지만, 사변적인 유형의 갈망의 신비주의 내지는 어떤 과거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기쁨의 신비주의 등을 느낄 수 있는 장소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련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살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1521 23.) 어쩌면 사도 바울의 이러한 말은 힘들게 살아가고 무거운 짐을 지며 살아가는 자들이 그들의 삶의 끔찍한 궁핍함을 떨치는 데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아담이 오래 전에 지은 죄로 인하여 당해야 하는 인류의 고난을 떨치는 일과는 관계가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말은 인간 모두의 내면에 도사린 아직 파악되지 않은 무엇을 예리하게 소환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 바로 그것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관한 바울의 견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저주가 되심으로써, 법칙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서 예수님을 하나의 주님 그리스도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생명”, “변모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난 바와 같은) “가르침이라든가, (사제들의 정통 교리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야훼 사상 속에 인간의 아들이라는 정신을 부여한 일 등은 더 이상 중요한 사항으로 부각되지 않게 됩니다. 그 대신에 중요한 내용으로 부각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이었습니다. 즉 구세주는 오로지 골고다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고 십자가에 의해서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항 말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관한 사도 바울의 사고는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가 자체를 정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블로흐 2009: 319). 나중에 루터 역시 십자가를 옹호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현실의 변증법적인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기존 체제를 옹호할 뿐입니다. “고통, 고통, 십자가, 십자가는 기독교인의 일부이다.” 루터는 이렇게 말하면서, 피지배계층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습니다.

 

16. 내면 중심, 내세 중심으로 변모한 기독교 사상 (1): 사도 바울의 견해는 역사적 예수의 실질적인 삶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의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 로마의 총독 필라투스에 의해서 가장 잔인하게 처형당했습니다. 로마 권력이 그의 목숨을 앗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이를 뒤집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죄를 모조리 사하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를 선택함으로써 자발적 희생을 감내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정의롭지 않은 세상의 모든 죄를 감내하려는 그리스도 자신의 내면적 의지로 이해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묵시록의 맥락에서 이해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추구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십자가의 의미였을 뿐, 현세의 구체적인 개혁은 아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의 현실 개혁적인 혁명 사상은 체제 옹호적으로 내세 중심적으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신학자 하르나크Harnack가 사도 바울의 사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라고 규정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Harnack: 72).

 

17. 내면 중심, 내세 중심으로 변모한 기독교 사상 (2): 예수는 신의 나라는 너희들의 마음속에 있노라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루카의 복음서의 구절은 신의 나라는 너희들과 함께 있노라라고 표기되어야 정확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의 나라를 결코 보이지 않는 명상적인 곳으로서가 아니라, 개혁적인 사회로 해석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성서는 대체로 루터 성경에 의존하는 경향을 지닙니다. 마르틴 루터는 라틴어에 있어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그리스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라틴어 성서에 의존하여 성서를 번역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루터는 다양한 언어로 전해 내려오는 성서를 원본으로 삼지 않고, 라틴어로 번역된 문헌에 근거하여 중역한 셈입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주어진 정황과는 무관하게,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부분적으로 왜곡되어 전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