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인간신 사상 (1): 블로흐는 에크하르트 선사의 신비주의에서 그리스도의 인간 신 사상의 핵심을 발견합니다. 신은 에크하르트 선사에 의하면 인간과 세계의 가장 깊은 내면, 중앙 부분 그리고 가장 중심부, 바로 그곳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른바 종교의 인간화에 관한 루드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의 테제와 유사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세계는 신으로 되돌아오고, 역으로 신은 인간이 사는 세계 속으로 되돌아옵니다. 신께서는 특히 인간들로 향해서 발길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초월했다고 생각되는 신, 현존하고 계신다는 신께서 결국 인간의 마음속에서 찬란히 빛을 발하는 신비적 순간 속으로 완전히 해체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찬란한 빛은 기존하는 인간이 아니라, 어떤 숨어 있는 인간의 내면에서 찬란히 퍼져나간다고 합니다.
“은폐된 인간homo absconditus”이라는 개념은 오래 전에 사용되던 용어인 “은폐된 신”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선 은폐된 인간의 내부로 파헤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은폐된 인간”의 영역으로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금 플로티노스 그리고 바실리데스Basilides와 같은 그노시스 학파 사람들이 내세우는 부정의 신학 이론에 근접하게 됩니다. 부정의 신학 이론에 의하면 신은 사람들의 필요성을 충족시켜주기에는 너무나 육중할 뿐입니다. 모든 카테고리는 흐릿하게 나타날 뿐입니다. 그래서 마치 무 (無)와 같은, 깊이 감추어진 것을 밝혀낸다는 것은 결코 적절하지 않습니다. 신이 그곳에 계시듯이, 이곳에서는 인간이 심층부로 향하고 있습니다. (Löhr: 336). 그래서 가장 존경할만한 대상이 바로 인간입니다. 에크하르트 선사에 의하면 인간 이상의 어떤 무엇이 생각될 수 있습니다.
24. 인간신 사상 (2): 블로흐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며, 신은 인간입니다. - 이 사실이야 말로 에크하르트 선사의 신비주의가 “함께하는 깨달음” 내지 섬광의 중심점에서 찾아낸 평등의 공식입니다. 신은 블로흐에 의하면 현실에 아직 출현하지 않은 “임”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근본적 존재가 의인화되고 대상으로 화한 이상입니다. 따라서 신은 블로흐에 의하면 인간 영혼이 유토피아적으로 꿈꾸는 엔텔레케이아와 다름이 없습니다. 천국 역시 인간 영혼이 유토피아적으로 상상하고 있는 신의 세계에 대한 엔텔레케이아의 공간입니다. (블로흐 2004: 2794).
우리는 앞에서 다음의 사항을 거론하였습니다. 즉 에크하르트에게서 본질적인 것은 다름 아니라 인식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에크하르트 선사는 마리아와 마르타에 관한 강연에서 마치 고대의 소피스트처럼 기이한 방식을 사용하여, 마리아보다는 마르타를, 다시 말해서 관조의 삶보다는 행위의 삶을 더욱 찬양하였습니다. 도미니크 수도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마르타의 “행동적인 삶vita activa”보다는 마리아의 “명상적인 삶vita contemplativa”을 택해야 마땅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에크하르트 선사의 철학에서 인식의 우월성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다음의 공식을 역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으로부터 우주를 거쳐 인간으로 향하는 공식은 인간으로부터 소우주 내지 대인간으로서의 아담 카드몬을 거쳐 인간신으로 향하는 공식으로 뒤바뀔 수 있습니다.
25. 인간신 사상 (3): 블로흐에 의하면 예수는 영생을 누리며, 모든 권능을 지닌 채 인간의 삶과 죽음을 규정하는 전지전능한 상부의 존재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분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인간의 근본적 존재가 의인화되고 대상화된 이상으로 출현한 분입니다. 신의 엔텔레케이아는 어쩌면 어떤 인간의 내면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필자의 생각에 의하면 특히 에크하르트 선사의 신관 (神観)에서 인간신의 보편적 양태가 발견될 수 있습니다. 신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며 “하는 님” (尹老彬)입니다 그분은 천지의 율려 (律呂)와 일체가 된 “임신한 여인”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12율의 양율과 음려를 통칭하는 분입니다. 그것은 잘게 쪼개진 “개인Individuum”이 아니라, “큰 자아Atman”과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러한 은폐된 형상 속에서 이상적 유토피아로서의 “하늘나라”의 어떤 핵심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그리고 이곳”이라는 종말론적인 한 울타리, 즉 “한울나라”에서 어떤 마지막 고향을 찾아야 하는 것은 당연히 인간의 몫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차제에 인간신 사상으로 발전될 수밖에 없는 무엇입니다. 거대한 권능을 지닌 신의 존재가 무너진 현대에 기독교인이 의존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신의 상에 내재한 무신론적 저항의 자세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은폐된 인간의 마지막 거주지인 고향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인간은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힘들게 살아가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생활하며, 경멸당하고 모욕당하는 존재로 취급받는 모든 현실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무너뜨려야” 합니다. (Marx: 385).
26. 블로흐와 해방 신학, 그 관련성과 차이: 인간신에 대한 블로흐의 이해는 나중에 위르겐 몰트만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몰트만은 자신의 주저『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1964)에서 세 가지 사항을 중시하였습니다. (Moltmann: 255). 첫째로 신앙의 전제조건이 되는 새로운 땅 그리고 행복에 대한 약속은 인간과의 약속이 아니라, 신과의 약속이라고 합니다. 이 점에서 몰트만은 블로흐와는 달리 신학자의 고유한 입장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까닭은 종말론 사상을 담지하며 희망과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셋째로 신의 나라는 현세와 무관하지 않으므로, 현실 개혁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입장은 블로흐에게서 영향 받은 것으로서 나중에 남미에서의 해방신학의 견해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무신론에 근거한 블로흐의 기독교 이해는 이른바 교회 중심적 신학 체계를 강조하는 일련의 신학적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신의 면모는 마르크스가 갈구한 자유의 나라에서 구현될 수 있는 주체적 인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블로흐가 “신은 어째서 인간인가?Cur Deus homo?”라는 발언을 통해서 무신론의 관점에서 인간신의 가능성을 추적하였다면, 몰트만은 인간과 신 사이에 분명한 금을 그으면서, 야훼 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가장 중요한 힘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몰트만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독일의 신학자, 카를 바르트, 카를 라너 그리고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등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Barth: 32), 교회를 전제로 하는 저세상의 영역을 철저히 고수하였습니다. (Rahner: 140).
27. 블로흐가 파악한 사랑의 공산주의로서의 기독교사상: 종교의 문제는 결코 현실의 문제와 동떨어져 생각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회적 제반 관련성의 틈바구니 사이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상의 천국으로서의 “한울나라”로 향하는 방향은 인간의 최종적 갈망의 의향을 고려할 때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유의 나라”로 향하는 방향과 거의 평행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습니다. 즉 올바른 기독교인들만이 거주하게 될 “한울나라”는 모든 것을 필요에 따라 생산해내는, 이른바 계급 없는 사회에서 어떤 구체적인 해답을 얻게 된다고 말입니다.
예수가 추구하던 원시 기독교의 “사랑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스가 은밀하게 암시하던 “자유의 나라Reich der Freiheit”에 대한 동일한 본보기입니다. (Preuss: 34).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출발은 목표에 대한 의향을 고려할 때 이른바 해방신학이 추구하는 시작과 동일한 패러다임을 지닌다고 말입니다. 나아가 그것은 빌헬름 바이틀링의 사회주의 사상 내지 마르틴 부버가 추구하던 어떤 계급 없는 공동사회에 대한 설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28. 기독교의 하늘나라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설계된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이웃 사랑의 나라는 하나의 구도 내지 시스템으로 설계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사상의 모티프는 그 의향을 고려할 때 시간적으로 태초 (알파)가 아니라, 최후 (오메가)를, 공간적으로 시작의 영역이 아니라 마지막의 영역을 선취하게 해줍니다. 이를테면 무언가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기독교인들이 최후, 즉 오메가의 순간에 응집될 수 있는 혁명적 변화를 갈구하는 경우를 상정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분명하게 종말론적인 요소를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른스트 블로흐가 구명하려고 하는 기독교 사상 속의 유토피아의 성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 사상의 유토피아는 이른바 국가 소설에서 나타난 사회 유토피아의 시스템의 설계 대신에,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전복에 관한 열광의 상으로 얼마든지 전환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열광의 상은 비록 순간적이지만, 주어진 체제를 한꺼번에 전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상은 먼 홋 날에 러시아에서 노동자 계급을 이끄는 붉은 영웅의 상 내지 영웅에 대한 기다림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참고문헌
- 길희성 외 (2001): 경전으로 본 세계종교, 전통문화 연구회.
- 블로흐, 에른스트 (2004): 희망의 원리 5권, 열린책들.
- 블로흐, 에른스트 (2009):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 열린책들.
- 윤노빈 (2003): 신생철학, 개정 증보판, 학민사.
- 이준섭 (2011(: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의 신비적 결합 (unio mystica)에 관한 연구, 실린 곳: 신학리해, 제 40집, 84 – 113쪽.
- 게르트 타이센 외 (2010):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 Barth, Karl (1946): 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 Entwurf einer christologisch bestimmten demokratischen Staatstheorie, München.
- Flasch, Kurt (2011): Meister Eckhart. Philosoph des Christentums. Beck, München.
- Harnack, Adolf von (1980): Kleine Schriften zur Alten Kirche, hrsg., J. Dummer, 2 Bde, Leipzig.
- Marx, Karl (1962): Zur Kritik der Hegelschen Philosophie, in: MEW. Bd. 1. Berlin.
- Moltmann, Jürgen (1985): Theologie der Hoffnung, in: Johannes Bauer (hrsg.), Entwürfe der Theologie, Graz.
- Platon (1911): Phaedo, edited by John Burnet, Oxford.
- Preuss, Walter (1946): Wilhelm Weitling.Der erste deutsche Sozialist. Alster Verlag, Wedel in Holstein.
- Rahner, Karl (1972): Strukturwandel der Kirche als Aufgabe und Chance, Freiburg.
- Röhr, Winrich Alfred (1996): Basilides und seine Schule. Eine Studie zur Theologie- und Kirchengeschichte des 2. Jahrhunderts, Tübingen.
- Schäfer, Wolf (1985): Die unvertraute Moderne. Historische Umrisse einer anderen Natur und Sozialgeschichte. Frankf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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