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블로흐가 파악한 기독교 속의 유토피아 (4)

필자 (匹子) 2017. 1. 17. 10:25

18. 루터의 성서 중심주의 비판: 오늘날 시각으로 고찰할 때 루터의 성서 중심주의는 그리스도 사상의 연구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거하는 것이지, 문헌에 의해서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문헌이 중요하지만, 여기에는 상당히 많은 왜곡된 내용이 얼마든지 첨가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예수가 죽은 뒤부터 차례대로 기술되기 시작했는데, “정경이 가장 오래되었다라는 주장, “정경이 외경보다 더 정통성을 지닌다.”는 주장 그리고 정경이 역사적으로 더 신빙성이 있다.”는 주장 역시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 수많은 신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으므로 깊이 언급하는 것을 생략하기로 합니다. 어쨌든 역사적 예수는 가톨릭주의의 이른바 보편적 기독교 입장과 영지주의 등 수많은 이단의 입장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음을 가르쳐줍니다. (타이센: 58). 루터는 이러한 차이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영성적 믿음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성서 중심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서만 연구하면, 기독교 사상의 진수를 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 부활의 새로운 의미: 다시 블로흐가 파악한 기독교 사상으로 되돌아가기로 하겠습니다. 부활이란 블로흐에 의하면 저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갱생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갱생, 다시 말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개혁과 관련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삶은 더 이상 가난과 강제 노동을 감내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리라는 종교인의 자유 의식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는 이러한 사회적 개혁을 아주 적극적으로 꿈꾸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때가 되면 세상이 묵시록에 기술된 것처럼 온통 전복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나라에 관한 꿈은 성서를 통해서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습니다. 성서는 사회적 이상이 실제로 어떻게 이행되는가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야훼 신을 반대하는 자와 찬성하는 자 사이에 대두된 가장 격렬한 유토피아를 전하며, 이집트를 떠나는 이야기를, 축복의 나라를 열광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20. 그리스 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근본적 차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항을 첨가하려고 합니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과 함께 서양의 중요한 두 가지 중요한 사상적 조류입니다. 블로흐는 서양의 철학적 세계관을 두 가지로 구분해 왔습니다. 그 하나는 고대 그리스사상 속에 도사린, 과거 지향적이자 정태적인 사고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 사상 속에 도사린, 미래지향적이자 역동적인 사고입니다. 전자는 플라톤에서 헤겔까지 이어지는 진리의 단순한 재기억νάμνησις과 관련됩니다.

 

그것은 창세기 그리고 알파/시작의 원형구조를 무엇보다도 중시합니다. 진리는 맨 처음에 예정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은 이러한 진리를 재차 기억하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창세기 그리고 태초의 무엇만을 귀히 여기는 숙명론적 정태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맨 처음에 존재하므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이러한 숙명론적 원칙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인간이 추구하는 학문 행위 그리고 죽음 역시 모이라 여신이 행하고 있는 숙명νάγκη의 철칙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21. 역동성과 오메가의 묵시록: 그러나 기독교의 사상은 이와는 다릅니다. 기독교사상은 -태초의 알파를 중시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창세기의 세계관과는 달리- 마지막 오메가의 역동적 변화를 갈구하고 그것을 중시하는 사고입니다. 기독교는 과거에 나타난 세계 창조 대신에, 미래에 발발하게 될 묵시록의 파국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기독교의 메시아사상이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기독교 사상은 아직 개방된 아직 아닌 존재를 발견해내려고 애를 쓰는데, 마지막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역동성과 개방성을 간직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기독교 사상은 오메가/마지막의 구조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카산드라와 요나라는 인물을 비교해 보세요. 카산드라가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에 주어진 숙명적 전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에, 기독교의 요나는 회개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방향키를 돌리며, 부분적이나마 세상의 가치 체계를 바꾸는 데 기여합니다. 요나는 큰 도시, 니느웨가 40일 후에 몰락하리라는 것을 전하러 그곳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자, 40일 후에도 재앙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뉘우침과 반성은 야훼의 마음을 돌려놓았던 것입니다. (요나421).

 

성서는 운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도덕을 개입시키고 있습니다. 이로써 나타나는 것은 운명과는 반대되는 자발적 자유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블로흐는 기독교 사상 속에 내재해 있는 변화의 가능성과 역동성을 예리하게 고찰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조건적인 운명에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운명의 방향은 어떤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재림하는 순간으로서의 절호의 기회Kairos”를 생각해 보세요. 절호의 기회는 어떤 변화될 수 있는, 혹은 어떤 변화되어야 하는 미래를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22. 사랑의 공산주의로서의 기독교 사상: 상기한 사항과 관련하여 우리는 기독교사상의 혁명적 특성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이전의 원시 중교를 예로 들어봅시다. 이러한 종교는 권력과 전지전능한 신의 권위를 강조하며, 신자들로 하여금 신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종교의 이데올로기로서 신정일치의 사회적 상태에서 나타난 강령과 동일했습니다. 물론 기독교 사상 역시 이러한 특성이 부분적으로 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신앙이 운명의 방향을 변화시킨다는 점, 또한 그것이 인간신 사상의 미래지향적 오메가의 특성을 강조한다는 점은 종교사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그 자체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신과 인간 사이의 수직 구조가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의 수평 구조에 전환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신 사상의 미래지향적 오메가의 특성은 동학사상에서 거론되는 향벽설위 向壁設位라는 수직적 위계질서에서 향아설위 向我設位라는 수평적 위계질서로 전복되는 믿음의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길희성 외: 376). 다시 말해서 혁명의 종교를 믿는 자는 거대한 권위로서의 신 앞에 큰절을 올리는 그러한 복종과 헌신의 종교관 대신에, 종교를 통해서 자아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아가 처해 있는 삶의 문제점을 개혁하려는 의지의 종교관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이로써 기독교사상은 수직적 차원에서 거대한 권위를 지닌 신적 존재에서 벗어나서, 수평적으로 평등한 인간신의 존재를 부각시킵니다. 이로써 상부의 권위로서의 신적 존재는 사라지고, 자아의 내면 내지 세계의 변화 등을 갈구하는 이상적인 믿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기독교 사상은 숙명과 복종을 강조하는 고대의 사상을 지양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변화와 평등관계 속에서의 사랑을 설정해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