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도스토예프스키

필자 (匹子) 2020. 8. 10. 09:45

도스토예프스키는 고뇌하는 작가의 전형입니다. 깊은 신앙심을 견지하지만, 신의 권능을 끝없이 의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작가가 되지 않았으면, 수사, 혹은 도박사가 되었을 극단의 인물이지요. 조화로움보다는 불협화음을 추구하고, 온화함보다는 사악한 영혼의 근원을 파헤치기를 머뭇거리지 않는 작가, 천국의 아름다움을 막연히 찬양하는 일보다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도 최소한의 인긴적 흔적을 찾으려는 작가 - 그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인 것입니다. 아래의 사진은 1872년 악령을 탈고한 다음에 완성된 초상화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나서 1881년에 성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영혼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습니다.봉건 농노의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들어서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자신의 고민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문학세계는 현대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진은 도스토예프스키가 16세의 젊은 나이에 다니던 공병사관학교의 건물입니다. 지금은 성페체르부르그 궁성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빈민구제병원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도시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농민이상화의 경향마저 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하여, 특히 월터 스코트의 환상적이며 낭만적인 전기와 역사소설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공병 사관학교를 그만 두고,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를 번역 출간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에 자신감을 얻어, 직업작가에 뜻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 (1846)은 도시의 뒷골목에 사는 소외된 사람들의 사회적 비극과, 그들의 심리적 갈등을 그려낸 중편입니다. 고등학교 당시에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인간적 고결함을 잃지 않으려는 두 남녀의 편지가 나를 매혹시켰던 것입니다. 서간체 소설로서 사실주의적 휴머니즘을 기치로 하였던 당시 비평계의 거물 벨린스키에 의해 인정받게 됩니다. 24세의 무명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일약 ‘새로운 고골’이라는 문명을 떨치게 됩니다. 이 무렵부터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백야()"(1848) "네트치카 네즈바노바"(1849) 등의 탁월한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인간의 정열의 여러 모습을 탐구하엿습니다. 이 시기에 샤를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페트라셰프스키의 무정부주의의 서클에 가담하였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49년 봄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됩니다. 페트라세프스키는 무정부주의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이었는데,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체제비판의 혐의를 얻게 됩니다. 이때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서클 회원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총살 당하기 바로 직전에 황제의 특사로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 옥살이 합니다. 자고로 감옥은 한 인간에게 하나의 학교처럼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제공합니다. 감옥에서 제 2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그는 고뇌의 삶을 보냅니다. 사진은 그가 감옥에서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책 신약성서입니다.

 

 

사진은 페트라셰프스키의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찍은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출옥 후 5년간, 중앙아시아에서 사병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이사에바라는 젊은 여인과 결혼합니다. 당국은 1859년 말 10년 만에 수도 페테르부르크로의 귀환을 허락합니다. 귀환 후 그는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를 창간, 시사문제를 집필하였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시베리아 옥중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독특하고 참신한 장편 "죽음의 집의 기록" (1861∼1862)과, 그의 전기() 창작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학대받은 사람들" (1861)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으로의 입지를 확고하게 쌓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심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년의 나이에 신경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강한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한 것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내면의 갈등이 가중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첨예한 갈등은 간질 Epilepsi 로 나타났습니다. 간질은 대체로 뇌 손상 그리고 심리적 손상이라는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하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에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나아가 신경증으로 인한 과도한 정서적 분열은 그로 하여금 도박에 중독하게 하였습니다. 그래, 도스토예프스키는 심각한 도박 중독의 증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도박판에서 모든 돈을 탕진하면, 그는 그렇게 마음이 홀가분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경제적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필에 몰두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도박이 오히려 그에게 집필의 필연성을 제공한 셈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

 

이따금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에게 욕설을 터뜨리고, 아내 앞에서 자신을 비하했으며, 아내로 하여금 자신을 경멸하게 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습니다. 남편의 창작이 가장 활발할 때는 모든 재산을 저당 잡혔을 때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의식이 자신 스스로 가한 응징에 의해 해방되었을 때, 창작을 방해하던 금기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도박과 자위는 유사합니다. 자위하는 사내아이를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정액이 배출되는 순간 짜릿하지만, 텅빈 공허감을 느낍니다. 말하자면 마음속에 응어리진 억압에서 비롯한 경직된 에너지가 배출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판에서 판돈을 잃었을 경우 아버지의 억압 기제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이를 즐거워한 것입니다.  

 

 

 

 

 

사진은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거주하던 건물을 가리킵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실존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는 가난한 대학생이었는데, 사회의 흡혈귀와 같은 고리대금없자 여주인을 증오하고, 인민의 이름으로 도끼로 내려쳐 그미를 살해합니다. 왜냐하면 그미는 러시아 사회의 악덕을 포괄하는 상징적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창녀 소나의 도움으로 기독교 정신으로 모든 것을 반성하고 회개합니다.

 

 

 

소설 집필 작업은 고통과 희열로 뒤엉킨 창조의 과정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위의 사진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악령을 집필하기 전에 작성한 스케치입니다. 소설 한 편을 쓰려면, 누구나 줄거리와 인물 그리고 여러 관계 등을 미리 설계해두어야 합니다.

 

 

 

위의 사진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죽기 직전까지 집필에 몰두했던 그의 서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고로 소설가는 집필 행위에 오랜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위의 사진은 중국인들이 소설 "백치"를 영화화한 것을 소개하는 포스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도스도예프스키의 문학은 세계적으로 알려졌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그의 장편 소설 몇 편을 발표 순서대로 기록할까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1846, 네츠지카 네르바노바 (1849), 학대받고 모욕받은 사람들 (1861), 죄와 벌 (1866), 도박사 (1867), 백치 (1869), 악령 (1872), 청년 (1875),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1880).

 

 

위의 건물은 성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도스도예프스키의 박물관의 모습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스도예프스키는 죽어서 이름명작들을 남겼습니다. 그의 명작들은 그가 세상에 배출한 정신적 자식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