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하인리히 뵐

필자 (匹子) 2020. 8. 25. 08:44

 

 

자고로 유명 작가가 되면 자신의 모든 삶은 세인의 관심사가 됩니다.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유명해지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은 아닙니다. 하인리히 뵐 (1917 - 1985)은 귄터 그라스와 마찬가지로 전후 문학을 이끈 기수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관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인리히는 이른 시기에 성당에 다니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데, 그의 신앙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인리히 뵐은 김나지움을 마친 뒤에 본에 있는 렘페르츠 서점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은 2010년 증축된 렘페르츠 서점의 건물입니다. 하인리히는 약 11개월 다니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소실과 관심사는 경영 방면이 아니라, 창작 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938년 11월 그는 군에 입대했습니다. 당시에는 군인으로서 시간을 할애하여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1939년 가을학기에 그는 쾰른대학교에서 독문학과 고전문학을 공부했습니다.

 

 

 

 

하인리히 뵐은 군인으로 근무하면서 독일인으로서 참으로 몹쓸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유대인들 그리고 주위 유럽 사람들에게 저지른 죄를 깊이 인지하고, 이를 산문 작품 속에 명징하게 담아내는 것을 창작의 주된 관건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문체는 귄터 그라스의 그것과는 달리 간결하고, 꾸밈이 없습니다. 소설집의 제목은 "방랑자여, 그대는 오려는가, 스파...."입니다. 이 문장이 끊겨져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원래 이 문장은 실러의 시 "산책"에 실려 있는 구절입니다.  "방랑자여 스파르타로 오려는가? 그대는 우리가 법이 명령하는대로 (싸우다) 여기에 누워 있다는 것을 그곳에 알려다오. Wanderer, kommst du nach Sparta, verkündige dorten, du habest/ Uns hier liegen gesehn, wie das Gesetz es befahl."

 

원래 이것은 그리스 시인 케로스 시모니데스의의 시구인데, 실러가 인용했고, 뵐이 다시 소설 제목으로 차용한 것입니다. 시모니데스는 원래 군인을 모집하는 사람을 비아냥거리기 위해서 그렇게 기술했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거짓말에 불과하고, 인민을 방패 내지 총알받이로 사용하려는 권력자의 의도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지요. 뵐의 소설 제목이 끊겨진 것은 말하기도 전에 총을 맞아 사망한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뵐의 단편 소설집 "방랑자여, 그대는 오려는가, 스파...."는 전후 독일 문학에서 결코 생략될 수 없는 명작입니다.

 

 

 

 

47 그룹은 소설가 한스 베르너 리히터에 의해서 생겨났습니다. 그는 전후 독일 작가들을 초정하여 낭독회를 개최하였고, 이로써 47 그룹 문학상이 생겨났습니다. 47 그룹은 독일 전후 문단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인리히 뵐, 귄터 그라스, 지크프리트 렌츠 귄터 아이히  (Siegfried Lenz, Heinrich Böll, Günter Grass, Günter Eich) 등 훌륭한 작가의 탁월한 명작이 발표될 수 있었습니다. 재미 있는 에피소드: 청소부로 오해받은 하인리히 뵐 상금을 타서 세 아들의 우윳값으로 충당하다. ㅋㅋ

 

 

 

 

 

이 건물은 쾰른 남부에 위치한 박물관입니다. 여기에는 동아시아의 예술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뵐은 다른 문화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제 3제국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관여했습니다. 유럽에는 수많은 식민지 문화 유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국가에서 빼앗은 것들입니다. 하인리히 뵐은 동아시아 박물관이 텅 비어도 좋으니, 제 3세계의 문화 유산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자고로 작가는 세인의 외면을 당하든가, 아니면 당국으로부터 탄압 받습니다. 사진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모습입니다.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스탈린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시베리아 강제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가 출옥한 시점은 1953년이었습니다. 그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창의적 노동을 추구하던 이반 데니소비치는 결국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감옥으로 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솔제니친은 1953년 출옥했지만, 영구 추방이라는 형벌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암에 걸려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1957년 무렵에는 완전히 복권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암으로 생존할 확률은 30%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랴잔이라는 소도시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 1974년 소련에서 영구 추방이 되었을 때 그는 독일로 와서 하인리히 뵐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는 독일에서 약 16년을 살다가 1990년에 복권되어 러시아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위의 사진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작품입니다. 1970년대 서독 사회는 테러리즘의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었습니다. 특히 1968년 이후에 학생 운동가들은 바더 마인호프 그룹을 결성하였습니다. 누군가 자신이 그토록 갈구하는 바가 정당한 방법으로 관철되지 않을 경우 무기를 들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바더 마인호프 그룹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꿈꾸는 평등 사회주의는 의회민주주의가 자리하는 서독에서는 실현 불가능하고,  동독에서는 비민주적인 사회주의 통일당이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서독의 좌파 지식인들은 동독보다는 서독에서의 변화 가능성을 찾았으나, 테러 외에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인리히 뵐은 이들을 옹호했습니다. 서독의 매스컴은 독일의 위대한 소설가 하인리히 뵐리 테러를 지지한다고 떠들면서, 그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을 판매 금지시키려고 했습니다.

 

 

 

1977년 6월 13일 좌파 테러집단인 RAF는 전경련 사장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가 타고 있던 루프트 한자 비행기를 납치하여 처형시켰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일에 대해서 당시 헬무트 슈미트 수상은 테러리스트와 타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인리히 뵐은 테러 집단을 동조하면서,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뵐은 엄청난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 사진은 하인리히 뵐의 소설 숙녀와 그룹 사진의 영화 장면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하인리히 뵐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여성, 레니입니다. 레니는 전쟁을 겪으면서 개인적으로 불행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에게는 소련군인의 아들 레프가 있습니다. 그미는 레니 구조위원회를 결성하여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결성합니다. 레니의 단체는 사회적으로 유명한 재벌회사 호이저와 싸워 나갑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뵐의 견해에 의하면 결코 돈이 아니라, 우정과 협동적인 생활이라고 합니다. 뵐은 이 소설로써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숙녀와의 그룹 사진

다음을 클릭하면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2분 45초)

https://www.youtube.com/watch?v=fNfBhIcrxeA

 

 

 

 그는 197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사진은 그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상을 받는 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문학상을 받은 뒤에도 그는 작품 집필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제 3세계의 정치적 억압에 대해 도덕적 자세로 관여하였습니다. 그의 언어는 단순하고, 명징하며, 정확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하인리히 뵐의 품성은 정직하고 겸허하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는 동독의 작가들의 인권을 위해서 끝없이 노력했습니다. "만약 동독이 민주적 평등과 자유 선거를 실천한다면, 그곳은 서독보다도 더 나을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독일의 조각가 빌란트 푀르스터가 만든 하인리히 뵐의 조각상입니다. 베를린의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가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소탈한 애정 그리고 근심이 진지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인리히 뵐의 둘째 아들인 르네 뵐의 만든 하인리히 뵐의 묘비입니다. 묘비가 마치 유년의 놀이터처럼 보입니다.

 

Datei:Berlin, Mitte, Schumannstrasse 8, Heinrich-Boell-Stiftung.jpg

 

이 건물은 하인리히 뵐 재단에 의해 건설된 것입니다. 1996년 녹색당에 의해 베를린 미테 슈만 가 8번지에 건립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주로 학생 장학 재단, 페미니즘 연구소 그리고 녹색 아카데미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