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분트 (KLabund, 1890 - 1928)는 독일 작가로서 본명이 알프레트 헨쉬케입니다. 클라분트라는 이름은 북독의 약사 집안을 암시하고 있는데, "방랑자 Vagabund"를 연상시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오더 강 근처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6세에 늑막염을 심하게 앓았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폐결핵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가 38세로 사망하게 된 것도 폐결핵이라는 병 때문이었습니다.
클라분트는 학교에서 공부를 썩 잘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09년 뮌헨 대학교에서 처음에 화학과 약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적성이 인문학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문학, 철학 그리고 연극예술학 등을 공부하였습니다. 1913년 "여명의 붉음Morgenrot"이라는 시집을 간행하였습니다. 1914년에 그는 "루빈. 어느 젊은이의 소설"이라는 탈고하여 발표하려고 했습니다만, 전쟁 발발로 인하여 나중에 간행되었습니다. 클라분트는 처음에는 참전을 주장하다가, 나중에서는 반전주의로 돌아섭니다.
클라분트는 몸이 아파서 군에 입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14년부터 스위스 등지에 머물면서 중국문학을 연구하였습니다. 이슬람 신비주의자이자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스 Hafis의 작품들도 연구의 대상이었습니다. 괴테 역시 하피스의 시에 반해서 "서동시집 Der westoestliche Diwan"이라는 시집을 발표했습니다. 사진은 클라분트의 작품집입니다. 클라분트는 28세의 나이에 개인적 비극을 맞이합니다. 1918년 브룬힐데 헤베리라는 여성과 결혼하였으나, 그미가 아기를 출산하다가 아기와 함께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1925년에 클라분트는 극작품 "백묵원 Der Kreidekreis"을 집필 발표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중국의 "회란기"에 근거한 이야기를 극적으로 구성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 작품을 개작하여 "코카시아의 백묵원"을 완성하였습니다. 브레히트는 클라분트의 작품 내용을 바꾸어서 낳은 어머니 대신에 키운 어머니에게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어쨌든 클라분트의 작품은 브레히트에 의해서 문학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클라분트는 1925년에 여배우 카롤라 네어Karola Neher와 결혼했습니다. 카롤라 네어는 브레히트의 연극에 참여한 배우였습니다. 그러나 클라분트는 폐결핵이 조져서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요양해야 했습니다. 카롤라는 연극 공연이 끝나는 주말에 자동차를 몰고, 베를린에서 스위스까지 달려갔습니다. 1928년 클라분트가 사망한 다음에 카롤라 네어는 동구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남편이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리는 바람에 엄청난 고초를 겪다가 1942년에 소련 강제수용소Gulag에서 티푸스로 사망하게 됩니다.
게오르크 하임 (1887 - 1912)은 슐레지엔의 히르쉬베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제국 프로이센의 법관이었습니다. 그는 25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으나, 놀라운 발상,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적 시구를 남겼습니다. 그의 시는 오늘날에도 자주 읽히곤 합니다.
위의 초상화는 게오르크 하임의 것입니다. 본인이 스스로 그린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자신의 내면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20세기 초반의 독일을 "하나의 굳건한 철제 건물"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모든 문이 닫혀 있어서 사람이 자유롭게 살기 어려운 건축물을 생각해 보세요. 게오르크 하임 역시 시민 사회의 제반 질서에 갑갑함을 느꼈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것은 보헤미언의 자유 분방한 삶이었습니다.
게오르크 하임은 1907년 뷔르츠부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진은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코르프스 레나이아 건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은 이곳에 모여서 검술을 읽히고, 학생들 사이의 결속력을 키워나갔습니다. 1908년 하임은 다시 베를린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법학 공부를 극도로 저주하였으나, 생업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해야 하는 일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11년 1월에 그는 국가 시험에 합격했으나, 베를린에서 근무를 배워나가는 도중에 서류를 무단으로 파기했다는 혐의로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1911년 7월 7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는 그의 박사학위 청원을 거절하였습니다.
게오르크 하임은 친구들과 새로운 클럽을 결성하여, 문학과 예술에 관하여 토론을 벌이곤 하였습니다. 이때 사귄 문우 가운데에는 야콥 반 호디스Jakob van Hoddis도 있으며, 쿠르트 힐러 Kurt Hiller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살롱에 모여 예술 작품과 정치 풍자극을 낭독하며, 기이한 시대를 풍자하고 야유하곤 하였습니다.
하임은 거대하게 강성한 프로이센의 제국에서 살았습니다. 당시의 프로이센은 비스마르크 Bismarck의 평화 정책으로 비교적 평온했는데, 1871년 독불전쟁 이후로 1890년까지 열강들과의 친교 정책으로 전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1891년 이후로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고 식민지 정책을 강행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독일은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심각한 대결 양상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전쟁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서 참전을 부르짖었습니다. 모두 흑백의 프로이센 깃발을 들고 전쟁 참여를 외쳤습니다. 유럽 전역을 집어삼킨 거대한 프로이센 제국 - 바로 이 시기에 하임은 세기말의 어두운 징후 그리고 전쟁에 대한 공포 등을 예리하게 시작품 속에 반영했습니다.
하벨 강의 겨울 모습입니다. 이곳에서 자주 스케이트를 탔는데, 1912년 1월 16일 그는 이곳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친구 에른스트 발케가 얼음 아래로 빠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결국 강물에 뛰어든 하임은 친구와 함께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김지하의 "맹인 광대 이야기")
에른스트 발케 - 그가 강에 빠졌을 때 게오르크 하임은 친구를 구하려고 강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차가운 강물은 두 사람의 젊은 생명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하벨 강은 엘베와 오더 강의 합류점에 위치하는 작은 강입니다. 여름 겨울에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북독은 주로 평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벨 강의 초겨울 모습입니다.
나뭇잎은 모조리 떨어지고, 강에는 얼음이 얼기 시작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집에서 기도를 드리면서 살아갑니다. 북독에는 주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가 퍼져 있습니다.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 (Christian Morgenstern, 1871 - 1914)은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 그리고 번역가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코믹한 시는 오늘날에도 자주 읽히고 있습니다. 모르겐슈테른은 1871년 뮌헨의 슈바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화가였는데, 김나지움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1881년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아버지는 재혼하였고, 브레슬라우의 김나지움에서 직장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티안은 브레슬라우에서 김나지움을 다녔습니다. 뒤이어 국민 경제학을 공부하다가 1893년 학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폐결핵을 앓았기 때문입니다. 모르겐슈테른은 아버지와 커다란 갈등을 겪었습니다.
사진은 독일의 서남부 슈바르츠발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르겐슈테른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서 많은 작가들과 사상가들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1894년 베를린에서 니체 등을 연구하였고, 신문 잡지에 자신의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특히 노르웨이의 언어를 익혀서 입센, 스트린드베리 등의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1901년에 모르겐슈테른은 마르가레타 코제브루흐 폰 리히텐슈테른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마르가레타는 이유 없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겐슈테른은 결혼을 결심합니다. 양가 모두 결혼을 반대했는데, 두 사람은 1910년에 결혼합니다. 두 사람은 루돌프 슈타이너의 신지학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신지학 Theosophie은 신의 지혜에 관한 이론으로서 신비주의 종교 내지 사변적 철학이론으로 발전된 것입니다. 모든 지식은 신과 관련되는데, 신지학자들은 신비로운 직관을 통해서 신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야콥 뵈메 Jakob Böhme, , 파라켈수스 Paracelsus 그리고 스웨덴보리 Emanuel Swedenborg 등이 추구한 바는 나중에 루돌프 슈타이너에 계승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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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겐슈테른은 신지학에 매료되면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루돌프 슈타이너의 이론을 추종하였습니다. 사진은 루돌프 슈타이너가 기획한 괴테아눔 Goetheanum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스위스의 바젤에서 10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심지학의 축제가 개최되곤 합니다. 이 건물은 1923년 화재로 불에 탔으나, 나중에 재건축되었습니다.
괴테아눔은 어쩌면 지구상의 가장 훌륭한 건축물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건물은 신지학적 조화로움을 최대한 반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르겐슈테른은 1914년 죽을 때까지 유럽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병을 치료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는 죽음의 신 모이라는 그와 그의 아내를 끝내 저세상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가 남긴 문헌들, 시편들, 번역서들 그리고 신지학에 관한 산문들을 읽으면서 그의 인간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진은 모르겐슈테른의 시전집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서로 안면을 익힌다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서로 이질적인 존재인가를 배우는 일이다." "평범한 사람이 전적으로 타당한 견해를 지니고 있지만, 이를 관철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하다." "모든 게 학교이다. 인간은 손해를 통해서 영리해진다." "사랑으로 관찰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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