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작품의 문제점 (4): 한마디로 “월든 투” 공동체는 처음부터 관료주의자들의 횡포에 시달릴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공동체의 주요 책임자로 활약하는 설계자 그리고 매니저 그룹은 공동체의 모든 중요한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특히 매니저들은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풀뿌리 민주주의,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서 선출되지 않고, 설계자에 의해서, 다시 말해 상부로부터 직접 임명받게 된다.
바로 이러한 사항 때문에 등장인물, 어거스틴 캐슬은 작품에서 “월든 투는 기계주의로 작동되는 매니저들의 마키아벨리 공동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공동체 전체에 돌직구를 날리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프레이저는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한다. 인류가 구원되려면,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들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몇몇 전문가들 그리고 이들의 자기희생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키너의 대중에 대한 불신을 엿볼 수 있다. 대중은 어리석게도 쉽사리 거짓과 속임수에 기만당하곤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소수의 전문가가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32. 작품의 문제점 (5): 기실 대중 민주주의는 스키너가 생각한 대로 바람직하지 않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대중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입각해 있으므로, 선한 소수의 견해는 실제 현실에서 나쁜 다수의 견해에 의해서 묵살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월든 투 공동체에서 직접 민주주의의 방식이 무시된다는 것은 그만큼 공동체가 관료주의의 특성을 고수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렇기에 풀뿌리 직접 민주주의는 월든 투에서는 구체적으로 실천되기 어렵다. 만약 설계자들과 매니저들이 주어진 여건 때문에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전횡을 일삼는다면, 월든 투 공동체는 부정적 유토피아로 전락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선한 마음과 봉사의 정신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권력을 휘두를 경우, 공동체는 부자유가 횡행하는 중세 유럽의 폐쇄적인 라티푼디움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할 수 있다.
33. 소비를 줄이기 위한 대책: 상기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스키너의 공동체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전해준다. 놀라운 것은 스키너가 “미국의 삶의 방식”, 즉 소비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부흥시키려는 자본주의 팽창 정책에 궁극적으로 제동을 건다는 사실이다. 스키너는 차라리 소비를 줄이고, 절제와 극기의 삶의 방식을 미래 삶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제안을 떠올리게 한다.
스키너는 소로를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억지로 행하는 노동에 더 이상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소비하는 수많은 재화의 양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실제로 자원의 고갈, 환경오염, 인구 과잉, 핵무기 개발을 통한 대량 학살의 가능성은 20세기 중엽부터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21세기의 제반 문제는 바로 이러한 문제와 직결되고 있다. 그렇기에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스키너의 입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비록 작은 공동체이지만, 이것이 사회 전체로 서서히 확장되면, 미래의 국가는 어쩌면 “화목한 대가족”으로서의 씨족들의 집합체로 발전해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스키너에 의하면 중앙집권적인 새로운 정부 내지 새로운 지도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평등한 인권을 지닌 채 협동하며 살아가는 작은 공동체의 삶의 방식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 사람들은 스스로 인구를 줄이고, 자원을 아껴 쓰며, 더 나은 인간을 위한 지식을 가꿀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스키너의 인간 행동에 관한 많은 지식을 생각해 보라.
34. 『월든 투』의 영향: 스키너는 결코 이전의 디스토피아 작품에서 드러난 바 있는 비인간적 전체주의를 집요하게 추구하지는 않았다. 이를 고려한다면 “월든 투”는 지방분권적이며, 디스토피아의 끔찍함을 극복하려는 소규모의 긍정적 유토피아 모델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는 이미 언급했듯이 거대한 메가 시스템으로서의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급부의 상이다. 스키너에게 중요한 것은 피교육자의 더 나은 심리 교육 그리고 사회적 엔지니어링의 작업을 실천하는 과업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스키너는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해악 내지 이를 야기하는 심리적 동인 (무한 경쟁, 이윤 추구, 이웃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 그리고 공격 성향 등)이 과연 얼마만큼 수정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했다. 스키너는 1971년에 『자유와 품위의 저편에서』라는 글을 통해서 이 점을 다시 한 번 천착하였다. 이 책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개인주의 내지 이기주의의 심성을 떨치고, 이타주의에 근거한 협동심과 배려를 키워나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추적하고 있다.
상기한 사항을 고려할 때 월든 투 공동체는 20세기에 출현한 수많은 디스토피아 가운데에서 드물게 나타난 긍정적인 대안 공동체로 명명될 수 있다. 이를테면 1967년 미국에서 생겨난 트윈오크 공동체는 스키너의 공동체 이념을 충실히 따르는 하나의 작은 코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연재를 끝내면서
지금까지 4회에 걸쳐서 우리는 20세기 후반부의 문학 유토피아의 범례들을 추적해 보았다.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경쟁 추구의 국가 권력 내지 국가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 (평화 공존의 운동), 2. 환경 운동과 관련되는 이념으로서의, 지구 전체로 확장된 환경 파괴, 특히 핵에너지에 대한 경고 (환경 운동), 3. 남녀 불평등의 급진적인, 혹은 점진적인 해소 (여성 운동).
현대인들은 가난, 생태계 파괴로 인한 기후 변화와 식량 문제, 지구 전체로 확장된 독점 자본주의의 횡포로 인한 잘사는 국가와 못사는 국가 사이의 대립 등으로 여전히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다. 이는 어떤 새로운 구체적 유토피아를 설계하도록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수많은 난관들이 마치 하나의 커다란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어서 우리가 한 치 앞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난제들 가운데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사항은 무엇보다도 황금만능주의로서 우리의 내면을 훼손시키는 자본주의의 폭력일 것이다.
이러한 폭력을 구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사회주의의 실현인데, 이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남은 방안은 두 가지밖에 없는 것 같다. 그 하나는 민초들이 협동을 통해서 자신의 기본권을 요구하는 “노동조합 Labour Union”의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생태 공동체의 운동이다. 전자가 자본가와의 투쟁과 타협을 통한 공생적 변모의 전략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틈새의 변모의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원전 1세기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제방이 나사렛 출신 예수의 믿음이라는 자그마한 돌멩이의 작용으로 서서히 균열되어 결국 몰락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기실 인간에게는 한치 앞의 미래를 예견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21세기의 국가 내지 사회 형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생태 공동체 운동이 자본주의의 체제 속에서 작은 군락을 이루어, 유일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자본주의의 사회 질서를 허물어뜨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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