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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구츠코의 '의심하는 여인 발리'

필자 (匹子) 2018. 1. 5. 11:04

오늘은 청년 독일파의 한 사람인, 카를 페르디난트 구츠코 (Karl F. Gutzkow, 1811 - 1878)의 장편 소설 한 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구츠코는 다재다능한 작가로서 사회적 제약과 인습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하는 작품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는 감정에 호소하는 작가가 아니라, 지성에 호소하는 작가였습니다. 그의 문학은 주어진 현실에서 어떤 특정한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를 진단하는 데 커다란 강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만큼 사회의 취약점을 예리하게 간파하는 능력을 지닌 작가는 드물 것입니다. 극작품 외에도 많은 시대 소설을 집필했는데, 우리는 시대 소설 속에서 구츠코가 인습에 대해 얼마나 신경질적으로 저항하려고 했는가? 하는 점을 생생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가 첨예한 주제를 받쳐줄 문학적 틀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구츠코는 소설 속에 구현해야 할 내용을 극작품에 담았으며, 극작품에 합당한 주제를 소설 작품 속에 형상화시켰습니다. 바로 이 점이야 말로 구츠코 문학이 지니는 한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극작가, 프리드리히 헵벨 (Fr. Hebbel)이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구츠코의 문학은 그 자체 하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커피를 가는 기계에 곡식주머니를 넣고 돌린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오늘 다루려고 하는 작품은 1835년에 집필된 장편소설, 『의심하는 여인, 발리 (Wally, die Zweiflerin)』입니다. 이 작품은 종교에 관한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즉시 발표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나날들”이라는 제목으로 1852년에야 비로소 구츠코의 선집에 실리게 되었지요. 당시에 활약하던 비평가 볼프강 멘첼 (Wolfgang Menzel, 1798 - 1873)은 이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1835년 이전의 시기만 하더라도 멘첼은 구츠코와 같은 젊은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유주의의 경향을 띈 놀라운 사고를 지닌 논객이었습니다. 따라서 젊은 작가들은 그를 당연하게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멘첼은 1833년 뷔르템베르크의 지방의회 의원으로 일하면서, 서서히 보수적인 색채를 표방하게 됩니다. 나중에 멘첼은 민족주의적 보수성을 첨예하게 드러냅니다.

 

30년대 중엽의 시기에 사상적으로 변모를 거듭하건 멘첼에게 걸려든 작품이 바로 구츠코의 장편 소설이었습니다. 멘첼은 구츠코의 작품, 『의심하는 여인, 발리 (Wally, die Zweiflerin)』를 신을 모독하는, 부도덕한 작품으로 매도하였습니다. 프로이센의 검열청은 1835년에 이 작품의 검열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프랑크푸르트 연방 의회의 의제로 송부하였습니다. 연방 의회는 작가의 불경죄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구츠코는 “기독교 종교의 공동체의 믿음을 불경하게 묘사했다.”는 죄목으로 1836년 1월 한 달 동안 옥살이해야 했습니다. 구츠코의 작품을 둘러싼 법적 논의는 청년 독일파를 탄압하는 계기로 비화되었습니다. 이를테면 하이네 (Heine), 빈바르크 (Wienbarg), 라우베 (Laube) 뵈르네 (Börne) 그리고 문트 (Mundt) 등과 같은 젊은 작가들은 더 이상 독일 땅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이야기는 향락적이고 극단적인 여인과 모든 것을 회의하는 남자 사이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발리와 카이사르는 어느 사교 모임에서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시민 사회의 분위기 자체를 몹시 지루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의 오만불손한 발언은 주어진 권태를 떨치기 위해서 나온 것이지만, 기발할 정도로 급진적 사고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어진 시대를 극단적으로 뛰어넘는 민주주의의 이념입니다. “내가 민주주의의 사고를 극단적으로 추적하여, 가난한 계층에서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려 한다고 믿으시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카이사르는 발리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발리는 이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고, 청년 독일파의 서적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빈바르크 (Wienbarg)는 너무 앞서서 민주주의를 드러내고 있어요. 내가 귀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지금까지 인지한 적이 없었어요. 이 작가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이를 의식하면서 경악에 사로잡혀요.

 

발리와 카이사르는 바트 슈발바흐라는 휴양지에서 함께 지냅니다. 심지어 그들은 우연한 계기로 같은 방에 숙박하게 되는데, 그미는 카이사르의 즉흥적인 사랑의 요구를 물리칩니다. 왜냐하면 그미는 최근에 과히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내용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발리는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종교적 계율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감지하였고, 모든 것에 대해 골똘하게 숙고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발리는 극도의 신경질로 반응할 정도로 무척 침울해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느 남자와 살을 섞는 일은 종교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소설의 화자는 발리의 이러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미는 종교적 자극에 대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서서히 다가오는 고통이라기보다는, 급작스러운 호기심 속에서 표현되는 어떤 병과 같았다.” 발리는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리하여 그미는 여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참으로 무의미하고, 여자에게 주어진 제약은 남자의 경우보다도 더 견디기 힘들다고 토로합니다.

 

그러나 발리는 제 2부의 첫 부분에서 도시를 배회한 다음에 전혀 다른 기분을 느낍니다. “종교란 무엇인가? 창세기가 무엇인가? 불멸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옷을 붉고 푸르게 입는 것이 문제가 되는구나. 차라리 화류계의 여인, 마들렌처럼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게 더 나을까, 아니면 중국 여인처럼 머리를 꽁꽁 땋는 게 더 나을까?” 발리는 가면무도회에 참가합니다. 그미는 이 자리에서 카이사르에게 한 가지 사항을 전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르디니아의 사절 한 사람과의 결혼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는 제발 부탁이니 단 한번만이라도 창가에서 그미의 아름다운 알몸을 보여 달라고 호소합니다. 다시 말해 성배의 전설에서 기사 “시오나투란더 (Schionatulander)”를 사랑하던 “지구네 (Sigune)”처럼 그렇게 행동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구네는 자신이 사랑하던 기사 시오나투란더가 죽은 뒤에도 그에 대한 그리움을 떨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그미는 임의 시신과 결혼식을 올린 뒤에 무덤 속에서 갇혀 죽습니다.) 처음에 발리는 이러한 불경한 요구를 단호하게 물리칩니다. 그렇지만 종래의 미덕을 따르는 일이 무미건조하다고 판단한 발리는 다음과 같이 느낍니다. 즉 “어느 누구도 참된 시심을 결코 거역할 수 없으며, 시심이야 말로 모든 법칙과 모든 인습, 모든 도덕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입니다.

 

발리는 카이사르가 요청을 들어줍니다. 말하자면 결혼 전에 그미는 자신을 사랑하던 한 남자와 살을 섞습니다. 그 후에 발리는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서 파리로 향합니다. 그 곳에서 그미는 이전의 암울한 기분을 떨치고, 향락의 분위기에 젖어듭니다. 그런데 그미에게 문제가 발생합니다. 시동생 제로니모가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제로니모는 발리에 대한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의 광적인 상태를 보입니다. 심지어 그는 발리가 보는 앞에서 자결하고 맙니다. 이때 발리는 남편이 동생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자신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말하자면 제로니모의 죽음은 남편의 과욕 때문에 비롯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발리는 파리에 나타난 카이사르와 우연히 재회합니다. 그미는 그와 함께 어디론가 여행합니다. 발리는 카이사르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느끼고 단시간이나마 그를 열정적으로 사랑합니다.

 

제 3부는 일기 형태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발리는 틈틈이 일기를 썼는데, 주로 종교에 대한 의혹이 간간이 언급되어 있으며, 1774년부터 발표된 레싱 (Lessing)의 「라이마루스 단장 (Reimarus- Fragmente)」을 읽은 뒤의 독후감이 기록되어 있고, 악몽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이 뒤섞여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제 발리를 멀리 하고, 발리의 여자 친구인 델피네에 대해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악몽을 꾸는 발리에게 한 권의 책자를 보내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종교와 기독교에 관한 고백”이었습니다. 이 책자는 발리의 부탁을 받고 카이사르에 의해서 직접 집필한 것이었습니다. 발리의 일기는 기독교에 반대하는 다비드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 (David Fr. Strauss) 등과 같은 작가들의 논문 내용 그리고 기독교 종교를 구원하기 위해서 집필된 헤겔의 시도 역시 함께 실려 있습니다. 

 

일기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천국 그리고 새로운 지구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천국과 지구 사이의 다리는 새롭게 축조될 것처럼 보인다.” 책을 읽은 뒤에 발리는 눈물 한방을 흘리지 않은 채 절망감에 휩싸입니다. 그후 그미는 약 6개월을 살다가, 가슴에 단검을 찌릅니다. 이로써 그미의 삶은 이상화된 자유로운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의심하는 여인인 그미는 신의 적대자였다. 그미는 불확실함에 휩싸여 있었지만, 어떤 전혀 이해되지 않는 종교로써 자신을 달래는 사람들보다도 더 경건하지 않았을까? 그미는 종교 없는 인간의 삶은 가령하다는 사실을 깊이 확신하고 있었다.”

 

소설은 당시의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의 많은 구절들은 후기 낭만주의자 슈밥 Schwab, 울란트 Uhland, 샤미소 Chamisso 등의 작품, 청년 독일파의 작품들 그리고 발자크 (Balzac)와 생시몽 (Saint Simon)의 사상을 유추하게 합니다. 나아가 발리는 당시의 실존했던 여인 샤를로테 슈틸리츠를 유추하게 합니다. 샤를로테는 1834년 12월 21일에 자살했습니다. 그미의 남편은 시인 하인리히 슈틸리츠였는데,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샤를로테는 남편의 멍한 심리적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택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발리의 인물은 프리드리히 슐레겔 Fr. Schlegel의 「루신데 Lucinde」(1799)를 연상하게 하며, 조르주 상드 George Sand의 「레일라 (Léila)」(1834)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만큼 발리라는 인물은 성의 해방 그리고 종교의 해방이라는 테마를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작가 구츠코의 비극적 삶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하인리히 하이네, 루드비히 뵈르네와는 달리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프로이센을 벗어나 프랑스로 망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땅한 직업을 구할 수 없었던 그는 익명의 저널리스트로 살면서, 몰래 기사를 발표하였습니다. 작가로서 정치적 테마를 다루는 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고작 그의 장편 『천사와 같은 여자들 (Seraphine)』이 감옥에서 완성되었을 뿐이지요. 구츠코는 1835년 게오르크 뷔히너에게 다음과 같은 글발을 보냈습니다. “당신도 나처럼 그렇게 자유를 밀수하는 일에 종사하시기 바랍니다. 포도는 중편이라는 밀짚 속에 은폐되어 있지, 자연스러운 휘장 안에 도사리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감히 믿습니다. 우리는 치밀하게 장전된 무기를 거머쥐고 맹목적으로 돌아다니는 일 이상을 감행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