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골수, 반항아, 프리드리히 헵벨: 프리드리히 헵벨 (1813 – 1863)은 사실주의시기에 문학적 족적을 남긴 작가입니다. 주지하다시피 독문학사의 황금기는 19세기 초반이었고, 1830년 이후에는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이는 독일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관련됩니다. 독일은 봉건적 억압 체제가 팽배해 있었으며, 인접 국가들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낙후해 있었습니다. 수많은 제후들은 자코뱅주의를 지향하는 진보적 젊은 작가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였습니다. 가령 하인리히 하이네 그리고 뵈르네 등은 프랑스로 망명한 것도 작가에 대한 탄압과 검열 때문이었습니다.
예술의 황폐한 분위기 속에서 우뚝 선 극작가는 프리드리히 헵벨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가정적으로 불우한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덴마크 국적을 지닌 노동자였는데, 북부 지역이 독일로 병합되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1827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 헵벨은 교회 관리인 모어의 집에서 거주하며 눈칫밥을 먹었습니다. 그는 계단 이래의 벽장에서 마부와 함께 잠자야 했습니다. 나는 1981년에 베셀부른에 있는 헵벨 박물관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벽장은 너무나 비좁기 짝이 없었습니다. 헵벨이 외골수 내지 반항아의 기질을 지니게 된 것도 어린 시절의 비참한 환경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헵벨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벽장에서 독서하곤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2. 성공을 위해 사적인 사랑의 삶을 포기하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헵벨은 함부르크로 이주하여 문학적으로 성공할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엘리제 렌싱이라는 처녀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미는 허드렛일을 하면서 생활하는 평범한 처녀였는데, 헵벨보다 아홉 살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미는 헵벨이 성공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렇지만 헵벨은 나중에 성공을 거둔 다음에 엘리제 렌싱을 배신합니다. 1836년 9월에 그는 스트라스부르를 거쳐서 슈투트가르트 그리고 튀빙겐을 지나 뮌헨으로 도보 여행을 떠납니다.
뮌헨에서 목수로 일하는 안톤 슈바르츠를 만나는데, 이 인물은 작품 「마리아 막달레나」의 극중 인물로 등장합니다. 헵벨은 안톤 슈바르츠의 딸 요제파 슈바르츠에게 연정을 품습니다. 1년 후에 그는 비상식량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함부르크로 걸어서 돌아옵니다. 초죽음이 된 그를 보살핀 사람은 엘리제 렌싱이었습니다. 엘리제는 1840년 아들을 낳습니다. 그렇지만 헵벨은 엘리제와 결혼식을 올리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아들, 막스 헵벨이 호적에 등록된 것은 태어난 지 2년 뒤였습니다. 사생아의 출생신고는 함부르크에서는 불가능했으므로, 아들의 호적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에서 등록되었습니다.
3. 극작품의 성공 그리고 시련들: 1841년 그의 극작품 「유디트」가 함부르크와 베를린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오랜 습작 기간 동안 가난하게 살던 헵벨은 순식간에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음악가 슈만은 그의 작품을 소재로 게노베바를 작곡하기도 하였습니다. 프란츠 리스트 그리고 브람스도 그의 작품을 대본으로 음악을 만들었다고 하니, 우리는 그의 대대적인 성공을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리드리히 헵벨은 이때부터 상류층 사람들 그리고 작가들과 교우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성공과 함께 그에게 시련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류마티스 관절염이었습니다.
1843년 헵벨이 파리에서「마리아 막달레나」가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엘리제 렌싱은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함부르크에서 그의 첫째 아들, 막스가 안타깝게도 사망하고 맙니다. 1844년 둘째 아들 에른스트가 세상에 태어납니다. 엘리제 렌싱은 헵벨에게 편지를 보내어 결혼식을 치르자고 종용합니다. 그러나 헵벨은 끝내 그미의 청을 거절합니다. 1844년부터 1846년까지 그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각지를 돌아다닙니다. 헵벨의 목표는 어떻게 해서든 사회의 상류층으로 발돋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자신의 방랑을 끝내게 됩니다. 체르보니라는 이름의 어느 귀족 형제가 그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846년에 학위 논문을 집필하여 에어랑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 것도 체르보니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4. 결혼과 집필 활동: 헵벨은 1846년에 굶주리는 아들과 자신의 내연녀를 위험에 빠뜨린 채 크리스티네 엥하우스라는 여배우와 결혼식을 올립니다. 돈 많은 처녀와 결혼하게 되면, 경제적 어려움이 없음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함부르크에서 슬픈 소식이 그에게 전해집니다. 그의 둘째 아들 에른스트 역시 세 살의 나이로 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적 배신감에 치를 떤 엘리제 렌싱은 더 이상 헵벨에게 기대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며, 다른 남자를 사귑니다. 헵벨은 경제적 어려움에서 탈피하여 편안하게 작품 집필에 몰두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극작품이 1946년 이후에 탄생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아내 크리스티네는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엘리제 렌싱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줍니다. 엘리제는 다른 남자를 사귀에 카를이라는 아들을 또 낳았는데, 크리스티네는 카를이 헵벨의 자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카를을 거두어 교육시킵니다.
베셀보른에 있는 헵벨 박물관
5. 타협할 줄 모르는 작가: 프리드리히 헵벨은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참여한 작가입니다. 그는 3월 혁명을 환영했지만, 군주제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의원 후보자로 선출되기도 하였지만, 끝내 국회의원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로서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동료 작가들과의 관계 역시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다른 작가들과 자주 다투곤 하였습니다. 온화함을 추구하는 작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소설들을 공허한 전원문학이라고 혹평한 사람도 까칠한 극작가, 프리드리히 헵벨이었습니다. 헵벨은 1863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이는 청년 시절에 무리할 정도의 맹목적인 도보 여행 탓으로 여겨집니다.
6. 독특한 특성을 지닌 시민 비극: 3막으로 이루어진 극작품, 「마리아 막달레나. 하나의 시민 비극 (Maria Magdalene. Ein bürgerliches Trauerspiel)」는 1843년에 집필되었고, 1846년 3월 13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습니다. 원래 작품의 제목은 “클라라”라고 정해졌으나, 나중에 성서의 죄 많은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로 정해졌습니다. 작품의 첫 부분에 서문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헵벨은 서문에서 자신의 논문 「극작품에 관한 말씀 Ein Wort über das Drama」 (1843)에 언급된 바 있는 드라마에 관한 기본적 성찰을 재론하고 있으며, 그것을 시민 비극과 관련하여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컨대 “극작품에 나타나는 죄란 기독교의 원죄가 그러하듯이, 인간적 의지의 방향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 인간의 의지 자체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되어 나온다. 다시 말해서 죄악이란 경직된 자아의 고유한 힘이 확장됨으로써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헵벨 박물관의 내부 모습
7. 시민 비극의 실험 (1): 독일 연극의 역사상 시민비극이라는 명칭을 처음 지닌 극작품은 레싱의 「미스 사라 삼손 Miss Sara Sampson」 (1755)입니다. 그러나 시민 비극이라는 장르는 레싱에 의해서 명예 손상되었고, 더 이상 발전되지 못했다는 게 헵벨의 지론입니다. 왜냐하면 “비극적인 갈등이 어떤 거친 폐쇄성에 의해서 발전되는 게 아니라” (가령 변증법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없는 모든 개인들이 제한된 원 (圓) 속에 수동적으로 서성거리고 있는 헵벨의 작품을 생각해 보세요), “외부적인 특성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레싱은 풍요 속의 가난, 굶주림, 서로 다른 계급 사이에서 발생하는 연애 사건이라든가, 이로 인한 갈등 등을 묘사하고 있지 않는가요?
8. 시민 비극의 실험 (2): 헵벨의 비판은 특히 실러의 「간계와 사랑 (Kabale und Liebe)」 (1784) 그리고 청년 독일파의 한 사람인 카를 구츠코 K. Gutzkow의 「리처드 사비지」 (1839) 「베르너」 (1840) 등과 같은 사회 비판적인 드라마로 향하고 있습니다. 헵벨은 자신의 일기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시민 비극은 가장 제한된 원 (圓)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서 어떤 파괴적인 비극적 특성을 가능하게 하는 무엇을 보여주어야 한다.” 전통적 시민 비극은 특히 하자를 지닌 봉건 귀족에 대항하여, 시민의 규범 내지 가치를 인간 행동의 범례로서 체계화시키려고 합니다. 이에 비하면 헵벨의 극작품은 시민 질서의 세계 자체를 문제로 제기합니다. 시민의 권한은 19세기 중엽에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 관철되었던 것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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