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유의 정신과 빌헬름 텔: 친애하는 S. 오늘은 괴테와 함께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 (Friedrich Schiller, 1759 – 1805)의 작품을 언급하려고 합니다. 실러는 극작품, 담시, 미학 이론, 역사 그리고 철학의 영역에서 놀라운 업적을 남긴 대문호입니다. 실러의 문학적 주제는 한마디로 자유의 정신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자고로 가난과 폭정에 대항하여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는 일련의 노력은 “자유”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실러의 극작품은 고결한 자유를 지키거나 쟁취하려는 인간의 부단한 노력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러는 주어진 현실에서 자유를 쟁취하나가는 구체적 인간형을 창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어정쩡하게 행동했습니다. 이를테면 실러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 속에서 독일인들에게 제후에게 저항하라고 직접 호소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실러가 부르짖은 자유의 외침은 기껏해야 추상적 차원, 다시 말해서 “정신”의 영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표리부동한 그의 태도와 문학에 반영된 갈망의 상: 사실 실러는 프랑스 혁명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였으나, 모든 것을 함구하였습니다. 독일의 현장 정치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으며, 주어진 권력에 항거하는 혁명가로 과감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행한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자신의 이상을 극작품 속에 투영시킨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정치적 입장과 문학 작품이 제각기 마치 따로국밥처럼 분할되어 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실러가 자코뱅주의를 지향하는 훌륭한 젊은 작가들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실러는 이를테면 횔덜린의 시작품을 읽고 탄복을 터뜨렸지만, 그를 지지해주는 데 있어서 지극히 인색했습니다. 작가로서의 질투심 때문이었을까요? 수많은 낭만주의 작가들이 괴테와 실러의 냉혹함 때문에 안타깝게도 찬란한 빛을 발하지 못하고 파멸하거나 망각되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항이 있습니다. 즉 실러의 내적인 갈망은 -비록 상징과 비유를 통해서이지만- 문학 작품 속에 분명히 반영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만약 1804년에 발표된 5막 극작품 『빌헬름 텔』을 접하면, 우리는 바로 이러한 사항을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작품은 실러가 죽기 직전에 완성한 작품으로서 1804년 3월 17일 바이마르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루드비히스 부르크 광장의 모습
3. 행복한 문학, 불행한 삶 (1): 프리드리히 실러는 괴테와는 달리 평민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마르바흐의 군의관이었습니다. 실러는 루트비히스부르크라는 작은 공국에서 자랐는데, 이곳을 다스리는 자는 카를 오이겐 공작이라는 강압적인 제후였습니다. 그는 극한의 폭력으로써 자신의 작은 공국을 다스렸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명민함을 드러낸 실러는 시키는 대로 카를 군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학교의 엄격한 규율에 엄청난 고통을 느꼈습니다. 차선책으로서 법학 대신에 의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으나, 그의 열정은 은밀하게 문학과 예술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숨어서 플루타르코스, 셰익스피어, 볼테르, 루소 그리고 괴테 등의 작품을 읽었는데, 이것들은 그의 창의력을 부추겼습니다. 실러는 1780년까지 마음에 없는 의학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1781년에 발표된 극작품 「강도떼」를 읽으면, 작가가 얼마나 끈덕지게 봉건 독재, 부자유와 억압에 분노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4. 행복한 문학, 불행한 삶 (2): 실러는 1782년에 공국을 탈출하여, 슈투트가르트로 향합니다. 지금까지 공국을 탈출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와 가족들의 안위를 고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를 오이겐 공작은 음으로 양으로 위협을 가했으나, 실러는 끝내 공국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실러는 많은 문학 작품을 발표하면서 명성을 떨쳤으나, 수년 간 경제적 어려움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역사 연구서를 간행할 정도로 학문적으로 치밀한 사람이 바로 실러였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외에도 그를 괴롭혔던 것은 그의 건강상태였습니다. 실러는 발작, 경련을 일으키는 만성적 기침으로 시달렸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그의 병세를 고찰하면 실러가 폐결핵을 앓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폐결핵이 어떠한 병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결혼한 뒤에도 자주 병을 앓던 실러는 하루 4시간 잠을 자면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생활비를 벌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789년부터 예나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어서 궁핍함으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질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실러는 괴테와 만나, 그의 도움으로 바이마르에 체류할 수 있었습니다. 심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았지만 그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오랜 지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몸을 아끼지 않고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그가 남긴 극작품들은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괴테의 것들을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5. 빌헬름 텔의 전설과 실러의 작품: 일단 빌헬름 텔 전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빌헬름 텔의 전설은 12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3세기 말의 스위스는 우리Uri, 슈바이츠Schweyz 그리고 운터발덴Unterwalden 등의 지역으로 분할되어 있었는데, 합스부르크 왕국의 치하에 있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국은 헝가리 오스트리아 독일로 구성된) 유럽 중부 제국이었는데, 스위스 지역을 식민지로 집어 삼켰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스위스 사람들이 독립 운동을 일으킨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빌헬름 텔은 총독 게슬러의 폭정에 항거한 영웅으로서 대단한 석궁 쏘기의 능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가령 그는 자신의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이를 명중시켰습니다. 빌헬름 텔은 스위스에서 자연친화적으로 살아가는, 경건하고도 우직한 사냥꾼인데, 총독 게슬러의 모자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빌헬름 텔을 포함한 스위스 남자들은 뤼틀리에 모여서 폭정에 대항하려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전설들은 구전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때로는 스위스의 역사 서적과 스위스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인민가요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실러는 극작품의 집필을 위해서 두 권의 책을 참고하였습니다. 하나는 아에게디우스 추디Aegedius Tschudi의 『그리스 연대기Chronicum Helveticum』라는 문헌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요한네스 뮐러Johannes Müller의 『스위스 결사단체의 이야기Geschichte schweizerischer Eidgenossenschaft』라는 책이었습니다. 전자는 누군가 16세기에 발견된 필사본을 1734년에 책으로 간행한 문헌이었으며, 후자는 1786/ 87년에 독일에서 간행된 책이었습니다.
6. 『빌헬름 텔』은 다른 역사극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두 개의 문헌에 언급되고 있는 일련의 역사적 사건은 실러 작품의 주제를 고려할 때 그다지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러의 『빌헬름 텔』은 이전의 다른 역사극들에 반영된 일련의 주제들과는 달리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초기의 극작품 『강도떼』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사회적 질서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온 무법자가 과연 어떻게 패망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도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가난과 폭정을 참지 못하던 주인공은 결국 스스로 휘두른 폭력의 희생자가 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불법에 대항하여 싸우는 정의로운 인간이 어느 순간에 자신의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의적으로 돌변하게 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강도떼』는 불법의 극복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밖에 다른 역사극의 주제 역시 주어진 현실에서 억압당하는 자유의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작품 『빌헬름 텔』은 역사를 하나의 구원의 과정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극작가는 극적 사건 속에다가 자신의 유토피아의 사고를 첨가시켜 이 작품을 집필하였습니다. 이로써 역사에 나타난 실제의 비극적 사건은 빌헬름 텔이라는 영웅의 행위로 돌변하고, 결국 규범적 이념에 관한 문학적 이야기로 승화되어 있습니다. 실러의 『빌헬름 텔』의 작품 내용이 -지금까지 집필된 자신의 역사극과는 달리- 역사적 내용과 부분적으로 어긋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7. 제 1막: 이제 극작품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높은 암벽과 찬란한 호수로 이루어진 평화의 땅에 이방인들이 급습합니다. 이들은 합스부르크 왕국이 보낸 총독과 군대로서, 스위스를 무력으로 통치하려고 합니다. 슈바이츠 출신의 바움가르텐이라는 사내는 기마병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사실인즉 합스부르크 왕국에서 급파된 어느 성주가 그의 아내를 사로잡아 겁탈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움가르텐은 성주의 성추행을 도저히 묵인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내에게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주를 찾아가 이를 따졌는데, 이 과정에서 음탕한 성주를 때려죽이고 말았습니다. 바움가르텐은 살인자로 몰려 어디론가 도망쳐야 합니다. 기마병들은 성주를 살해한 범인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바움가르텐은 호숫가에 당도하여, 사냥꾼 빌헬름 텔을 만납니다. 두 사람은 가급적이면 빨리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려고 하지만, 어부, 루오디는 나쁜 날씨 때문에 도강을 거절합니다. 빌헬름 텔은 폭풍우가 몰아치는데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배를 몰고 강을 건넙니다. 다른 한편 농부 슈타우퍼의 부인은 남편을 설득하여 사람들과 함께 합스부르크 정권의 폭력에 대항하라고 요구합니다. 새로 부임한 총독은 우리의 수도에 자신의 모자를 걸어두고 행인들로 하여금 묵념하게 합니다. 행인들이 묵념하는 것은 합스부르크 왕국에 충성하겠다는 제스처와 같다는 것입니다. 슈바이츠 출신의 슈타우퍼, 운터발덴 출신의 멜히탈 그리고 우리 출신의 퓌르스트는 자신의 주에서 제각기 폭동을 일으키기로 맹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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