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고대 문헌

서로박: 플루타르코스의 리쿠르고스의 삶 (3)

필자 (匹子) 2020. 9. 20. 05:38

19. 스파르타인의 결혼 풍습: 스파르타에서의 결혼의 적령기는 20세에서 30세 사이라고 합니다. 신랑은 신부를 납치하는 방식으로 결혼을 거행합니다. 물론 신부는 육체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상태에 처해야 합니다. 신랑이 신부를 납치해오면, 하녀는 신부를 맞이합니다. 하녀는 신부의 머리를 깎이고, 신부로 하여금 남자의 의복과 신발을 걸치게 합니다. 뒤이어 신부는 머리 위에 밀짚을 걸치고, 혼자서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신랑은 친구들과 거나하게 식사를 마친 다음에 신부를 찾습니다.

 

이 경우 신랑은 술에 만취해서도 안 되고, 다른 잡념에 사로잡혀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신부를 발견합니다. 그러면 신랑은 신부를 안고 침대로 데리고 가서 첫날밤을 보냅니다. 신랑은 며칠간 신부와 함께 허니문을 즐긴 뒤에 육체를 단련하거나 일에 몰두하기 위해서 다시 남자 친구들에게 되돌아갑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역사가, 퓌스텔 드 쿨랑주Fustel de Coulanges는 『고대 도시La Cité antique』(1864)에서 결혼식 그리고 상속권 등과 같은 법적 사항 그리고 남존여비의 특징을 강하게 피력하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후기 그리스 이후의 시대에 국한시켜 적용될 수 있는 사항입니다. (쿨랑주: 60쪽 이하).

 

20. 결혼 생활: 신랑은 시간이 날 때마다 신부를 찾아가서 동침합니다. 신부는 언제나 남편을 맞이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미는 동침을 통해서 임신할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부부는 언제나 정결한 태도를 취해야 하며, 방종한 성관계를 통해 과도한 오르가슴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리쿠르고스는 경고합니다.

 

물론 신부가 드물게 신랑을 찾아올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그미는 이웃 사람들이라든가 신랑의 친구들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아이를 낳은 여성들 가운데에도 밤중에 몰래 신랑을 찾아오는 여성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혼부부가 결혼한 다음에도 빈번하게 살을 섞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당국은 신랑신부로 하여금 간헐적으로 동침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성욕을 억제하게 합니다. 이는 나아가 여성들의 임신을 촉진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남자가 여성과 성관계하여 자주 사정하는 것은 체력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금욕은 남자의 육체를 더욱더 강건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21. 느슨한 일부일처제. 혼외정사도 법적으로 용납되고 있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결혼제도를 통해서 일부일처제를 고수하지만, 혼외정사 또한 용인하면서 살아갑니다. (Saage: 28).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자식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국가의 공동 자산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스파르타 사람들은 건강한 자식을 확보하는 일이야 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관건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남자가 후사를 두기 위해서 여성을 선택하는 일은 남자의 절대적인 권한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초기 스파르타의 체제 속에서 “일처다부제Polyandrie”가 부분적으로 행해진 것은 상기한 사항과 관련됩니다. (최자영: 207).

 

리쿠르고스가 결혼제도를 중시하면서 혼외정사를 용인하였고, 플라톤은 일부일처라는 관습을 몹시 나쁘게 생각하였습니다. 일부일처제의 가정은 불화의 온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족의 끈끈한 결속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유재산의 욕심을 강화시키고, 탐욕을 불러일으켜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플라톤은 지배계급과 군인계급으로 하여금 성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생활하게 하는 대신에, 이들을 위한 여성 공동체 내지 육아 공동체를 결성하게 하였습니다.

 

22. 자녀 출산과 건강한 아이를 위한 교육: 리쿠르고스는 결혼식의 과정을 세심하게 규정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파트너를 선택하는 일에 비해서 더 중요한 국가의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스파르타 인들은 파트너의 선택 시에 플라톤의 아테네 사람들에 비해 더욱 자유로웠습니다. 만약 자신과 맞지 않는 여자를 선택할 경우 다른 여자를 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여자가 남자를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른 한편 여자는 태어난 아기를 양육시킬지 말아야 할지를 혼자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들은 아기를 포도주 원액으로 씻깁니다. 간질을 앓거나 신체적으로 하자를 지닌 신생아는 포도주 원액을 통해서 사망한다는 속설 때문입니다. 건강한 아이는 포도주의 기운으로 더욱 피부가 튼튼해진다고 합니다. 여자는 아기를 인민회의로 데리고 갑니다. 인민회의에 모인 사람들은 아이의 몸 상태를 면밀하게 살핀 다음 아이를 죽일지, 살릴지를 결정합니다. 아이는 스파르타에서는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건강하면, 산모에게 아이의 양육을 맡깁니다. 그렇지만 갓 태어난 아기가 병약하거나 육체적으로 이상 징후를 드러내면, 인민회의 사람들은 타이게토스 산에 있는, “아포테타이ἀποθέται라는 웅덩이에 아기를 내팽개쳐 죽여 버립니다. 왜냐하면 병든 아기는 국가에 부담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일견 매우 잔인한 조처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스파르타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정복당하여, 모든 인간이 몰살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믿습니다.

 

23. 영아 매매의 흔적: 고대 그리스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국가의 안녕을 수호해주는 보물처럼 취급되었습니다. 영아를 키우는 사람은 유모인데, 주로 라코니아 출신의 노예들입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유순한 아이들을 몰래 빼내어 인근 도시 국가로 팔아넘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매매의 사실이 발각되면, 유모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사실 아테네인으로 알려진 알키비아데스의 유모는 아이크라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미 역시 라코니아 출신이었습니다. 리쿠르고스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스파르타의 아이들을 영아 매매에 가담한 적이 있는 유모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습니다.

 

24. 교육: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 교육입니다. 독일의 인문계 학교가 “김나지움”으로 명명되는데, 이 단어는 “체조Gymnastik”와 관련됩니다. 그만큼 체육이 중요한 과목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김나지움 교육은 놀이 단계에서 전사 단계로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수행되었습니다. (딜타이: 91). 아이가 일곱 살이 되면, 공동체에 보내집니다.

 

아이들은 함께 공동으로 생활합니다. 탁월한 재능을 지닌 아이가 반장으로 선택받게 되며, 다른 아이들은 그의 말에 복종해야 합니다. 교사는 아이들의 용기를 부추기기 위하여 체력 단련을 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의 테마를 놓고 서로 말다툼을 벌리게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개별 아이들의 다양한 인성을 감지할 수 있으며, 아이들 역시 친구에 대한 우정 그리고 선의의 경쟁심을 품을 수 있다고 합니다. (Platon: 242).

 

교사는 일곱 살 된 사내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제외한) 몸의 털을 깎이고, 맨발로 걸어 다니도록 조처합니다. 또한 아이들이 야밤에 하늘 아래에서 나체로 잠자게 합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기껏해야 밀짚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은 나중에 건장한 군인이 되어 혹한에 버텨낼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지닌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무술, 각종 경기를 통해서 자신의 무예를 상대방에게 자랑합니다. 이로써 사내아이들은 가장 용맹스럽고, 힘세며, 무력을 지닌 병사로서의 자질을 서서히 갖추게 됩니다.

 

25. 협동심 함양을 위한 조처 그리고 여성 교육: 아이들은 언제나 두 세 명의 팀으로 짝을 이루면서 생활합니다. 소년은 자신보다 두 세 살 나이 많은 청년을 대장으로 선택합니다. 청년은 아이레넨으로 명명되고, 소년은 멜라이레넨으로 명명됩니다. 이들은 언제나 함께 행동하며, 모든 것을 배우고 익힙니다. 일과가 끝나면, 소년은 마치 하인처럼 청년에게 봉사합니다. 그는 심부름 그리고 잡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청년이 20세가 되면, 두 사람은 연습 삼아, 도둑질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어른들의 공동 식당에서 고기조각 혹은 야채를 훔치려면, 몹시 민첩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만약 붙잡히게 되면, 소년과 청년은 채찍을 맞아야 합니다. 때로는 벌칙으로서 하루 이틀 끼니를 거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협동심의 함양과 우정을 쌓기 위한 필요악의 과정입니다. 젊은이들은 나중에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가장 커다란 미덕으로 여깁니다. 리쿠르고스는 여성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여성이라고 해서 체력 단련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여성들도 레슬링, 달리기, 창과 원반던지기 그리고 체조 등을 통해서 튼실한 육체를 가꾸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나중에 결혼하여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듯 스파르타 인들은 용맹하게 그리고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지닌 채 삶을 살아갑니다. 플루타르코스의 이러한 서술은 나중에 군사 유토피아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개개인은 스파르타라는 도시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26. 스파르타의 장례식: 스파르타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육아 그리고 전사의 교육이었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장례 절차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도시 바깥의 지역에 시체를 안장하고 비석을 세우는데, 통상적으로 죽은 자의 이름을 새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예외가 있습니다. 전쟁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용사 그리고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여성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장례식은 통상적으로 11일 동안 지속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의 장례 기간이 한 달 정도 지속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스파르타의 장례 기일은 비교적 짧은 편입니다. 이는 시민들로 하여금 오랜 기간 비탄에 사로잡히게 하지 않으려는 조처로 이해됩니다.

 

27. 스파르타의 경제생활: 노예들은 주로 다른 나라에서 잡아들인 죄수, 자국의 죄수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스파르타에서의 노동은 대부분의 경우 이들의 몫입니다. 농사와 수공업을 영위하는 자 역시 노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스파르타의 시민들은 군사 훈련, 자기 수련, 무술 등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 외에는 전혀 생업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스파르타의 노예의 수는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예들은 시민들을 위하여 집을 짓고, 의복을 제작하며, 농사를 짓고, 수공업을 영위하였습니다. 노예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비천한 취급을 당하는 자들은 “다른 나라에서 잡혀온 죄수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헤일로타이εἵλωται”라고 명명되었는데, 주변인을 일컫는 “페리오이코이περίοἶκοι“보다도 더욱더 천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최자영: 200).

 

스파르타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를 구가하면서 살았다면, 스파르타의 노예들은 가장 비참한 상태에서 굴종적 삶을 영위해야 했습니다. 가족끼리 땅을 하사 받아서 농사를 지으면, 노예들은 자신의 주인에게 대부분의 곡식을 제공하였고, 주인 밑에서 온갖 천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노예로서의 매매 대상도 아니었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예외가 있습니다. 만약 전쟁에서 라케다이몬 (스파르타)을 위해서 커다란 공을 세웠을 때,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28. 잔인한 스파르타 시민들: 노예들이 모든 경제생활을 책임지므로, 스파르타 시민들은 많은 여가 시간을 지니며, 토론과 무예 등을 통해서 친구들과 우정을 쌓는데 진력합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군사 훈련 내지 무예 수련 시에 “헤일로타이”들을 대량으로 살해하기도 합니다. 이로 인하여 노예들은 군사 훈련을 위한 연습 시에도 수십 명씩 떼죽음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이 스파르타 인들의 잔인한 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파르타 남자들은 노예들에게 포도주를 강제로 퍼 먹여서 만취 상태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뒤이어 그들은 술 취한 노예들을 아이들에게 데리고 가서, 음주가 얼마나 인간의 몸을 비틀거리게 만드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심심하면 노예들로 하여금 저열한 노래를 부르게 하고 춤을 추게 하였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그리스인들의 자유와 품위의 기상은 노예들의 희생에 대한 반대급부의 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중에 수많은 혁명가와 휴머니스트들, 이를테면 해링턴, 마블리, 캄파넬라, 마라 등은 고대 스파르타 인들의 삶의 방식을 오랫동안 칭송했는데, 이때 그들은 고대 그리스의 노예 경제의 이러한 어두운 측면을 좌시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29. 요약 (1): 플루타르코스의 『리쿠르고스의 삶』은 엄밀히 말하면 사회 유토피아에 해당하는 범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신화 유형으로 이해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리쿠르고스가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불명확하기 때문이며, 둘째로 플루타르코스가 살았던 시대 그리고 그의 시대적 관점이 명징하게 도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플루타르코스가 기원 후 2세기, 즉 자신의 시대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과거의 인물, 리쿠르고스를 추적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현재의 문제점과 갈등을 해결하거나, 이를 공정하게 고찰하기 위해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 게 아니라, 다만 역사가로서 과거 사실을 충실히 서술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리쿠르고스의 삶』이 문학 유토피아에 포함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과거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하는 물음은 근본적으로 “지금 여기의 문제점과 유사한 범례 내지 해결책은 과거에 존재했는가?” 하는 물음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예의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즉 플루타르코스가 서술한 리쿠르고스 문헌은 사실과 판타지 사이를 오가고 있다는 사항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리쿠르고스의 삶』에서 가상 속의 진리 내지는 진리 속의 가상이라는 특성을 전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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