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고대 문헌

서로박: 플루타르코스의 리쿠르고스의 삶 (2)

필자 (匹子) 2020. 9. 20. 05:33

10. 스파르타 시민들을 위한 리쿠르고스의 토지 분배: 정책의 발의, 심의 그리고 이행에 관한 문제를 언급한 다음에, 리쿠르고스는 사회적 문제를 다룹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시민들 사이의 빈부의 차이를 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봉토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게 시급했습니다. 자고로 사유재산은 사회 전체에 사악한 영향을 끼치는 법입니다. 부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과도하게 지니게 되면, 부패한 생활을 영위하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국가의 안정에 악재로 작용한다고 리쿠르고스는 확신하였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서로 다른 크기의 토지를 지니고 있으면, 수확량 역시 차이가 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시민들 사이에는 가진 자에 대한 질투심, 가진 자의 오만한 마음, 사기 그리고 속임수 등과 같은 범죄가 속출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범죄를 차단시키기 위해서 리쿠르고스는 토지의 균등한 분배 정책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만인이 공평하게 토지를 하사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리쿠르고스는 일부를 왕권 소유로 설정한 다음에 나머지 땅을 스파르타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입니다.

 

11. 천민과 노예들은 땅을 하사받지 못했다. 혹자는 리쿠르고스가 스파르타 전체 땅의 3분의 2를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하고, 혹자는 절반의 땅을 시민들에게 분배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간에 스파르타에 거주하는 시민들만 이러한 혜택을 받았을 뿐, 천민, 노예 등은 한 조각의 토지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근대의 시대에 사회주의자들이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를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선구자로 찬양했지만, 리쿠르고스는 결코 가진 것 없는 자, 노예, 수인 (囚人)들의 옹호자가 아니었습니다. 노예, 수인 그리고 이와 유사한 신분을 지닌 하층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파르타의 법적 체제로부터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리쿠르고스는 소시민과 자본가 계급의 경제적 수준을 평탄하게 만들어서 시민들의 협동 정신을 고취시킨 다음에 국가의 힘을 강성하게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가 의도적으로 고대 사회에 온존했던 계급과 계층 차이를 완전히 극복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다른 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계층 내지 신분의 차이를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철칙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12. 금화와 은화의 철폐: 리쿠르고스의 세 번째 정책은 돈과 관련되는 정책입니다. 리쿠르고스는 무엇보다도 돈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데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동산의 정책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그는 스파르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채택된 것은 하나의 간접적 정책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금화와 은화를 철폐하고, 대신에 철전을 도입하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집안에 돈을 보관할 생각을 저버리고, 돈이 유통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재산을 절도하거나 강탈하지 않게 됩니다. 뇌물 공여 역시 불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스파르타, 즉 라케다이몬에서는 여러 범죄가 점차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나라와의 무역 역시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스파르타 사람들이 금화 은화가 아니라, 철전을 사용하게 되자, 이를 비웃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외국 상인들은 스파르타 사람들과 사치품을 교역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스파르타의 항구에는 더 이상 많은 상선이 입항하지 않았으며, 사치품 거래도 현저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사치품, 공예품은 서서히 사라지고, 꼭 필요한 것들, 이를테면 침대, 의자, 테이블, 소박한 그릇 등의 거래가 활성화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인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13.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스파르타 인들의 노력: 고대의 유토피아는 대체로 근엄한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특히 근엄한 생활방식을 중시했습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시민의 미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유자적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아테네의 미덕이 유유자적함이라면, 스파르타의 미덕은 근엄함과 절제였습니다. 근엄한 생활방식은 도덕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 당시 스파르타가 처한 현실적 상황에서 비롯한 덕목이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지속적으로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았으므로, 언제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한 나라가 언제나 전쟁의 위협에 처해 있다면, 그 나라는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전시 체제를 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스파르타의 지도자는 시민들에게 땅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소득을 평등하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는 전쟁 상태의 경제체제에서는 필연적인 정책이 공평하게 하사받은 시민들은 나라를 위해서 얼마든지 몸을 바칠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동일한 재산 분배는 반드시 나라를 수호해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을 배가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스파르타는 리쿠르고스의 이러한 정책을 통하여 자국인들의 불타는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었습니다.

 

14. 공동 식사의 세 가지 의미: 리쿠르고스는 사치 풍조를 근절하고, 부에 대한 탐욕을 근절하기 위한 세 번째 방안을 발표합니다. 그것은 공동 식사의 생활방식입니다. 첫째로 이러한 생활방식은 실제로 부에 대한 탐욕을 근절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스파르타의 모든 시민들은 공동으로 식사합니다.

 

따라서 비싼 식탁에서 동물을 잡아먹거나, 배고프다는 이유로 밤에 몰래 부엌으로 들어가서 단 음식을 즐기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습니다. 장시간 수면을 취하는 행위, 따뜻한 물에 목욕하는 일, 너무 많이 휴식을 취하는 행동 등은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의 사항입니다. 즉 리쿠르고스가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 식사를 통해서 사적으로 부를 축적하지 못하게 했으며, 소박한 삶을 영위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축재 (蓄財)란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도 언급한 바 있지만 마치 먹을 것을 모으는 “쥐”의 인색한 행동과 같다고 합니다. (Fortenbaugh: 244).

 

둘째로 소박한 식사는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풍요로움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듭니다. 상다리 부러질만한 찬란한 식사는 오히려 육체를 병들게 만듭니다. 셋째로 공동 식사는 스파르타 시민들의 협동심과 단합에 커다란 도움으로 작용했습니다. 공동 식사는 약 15명씩 그룹을 지어서 행해집니다. 참여자는 일정한 양의 밀가루, 포도주, 치즈, 약간의 무화과, 혹은 돈을 갹출해야 합니다. 주로 재산을 많이 지닌 사람들이 더 많은 음식을 제공하는데, 여기에는 별도의 규칙은 없습니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사냥에 참가한 사람들이라든가 제사를 지낸 사람들은 일정 분량의 고기를 식탁에 올리기도 합니다. 공동 식사는 다음의 사항을 스파르타 시민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즉 모든 재산은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라는 가르침 말입니다.

 

15. 스파르타 인들의 사랑과 동침: 리쿠르고스는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교육 받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결혼 역시 개인적 사안이라기보다는 국가의 관심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 내에서의 사랑이 무조건 애국심에 의해서 묵살되어야 한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국가를 위한 결속의 정신은 매우 중요하며, -나중에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에서 그대로 드러나듯이- 남녀의 가족으로 인하여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을 뿐입니다. 시민들 사이에서 빈부 차이가 감소해지듯이, 남자들은 동성에 대한 질투심을 떨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가령 스파르타의 남자들은 마치 에스키모 인들처럼 가장 애호하는 친구에게 아내를 내주면서, 동침을 권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친구의 아내가 젊고 매력적일 경우 동침하게 해달라고 그 친구에게 부탁하기도 합니다. 리쿠르구스는 일부일처제를 완전히 파기하지는 않았지만, 국가를 위해서 일부다처의 풍습을 한시적으로 수용했습니다. (Saage 28f). 이는 무엇보다도 강건한 자식을 얻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지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훌륭한 아이들이 태어나면, 스파르타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침략당하는 조국을 수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한 남녀들은 동침의 의사가 없을 경우에는 각방을 쓰면서 따로 취침합니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 결혼한 다음에도 친구들과 어울리며 무술을 익히면서 살아갑니다.

 

16. 사랑의 삶에 있어서의 남성 중심주의: 남자들은 더 좋은 후사를 얻기 위해서 친구의 아내와 동침할 수 있지만, 여자들은 반드시 남편만을 섬겨야 하며, 남편이 원하는 대로 다른 남자와 살을 섞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태어난 아기를 오로지 사랑과 희생정신으로 잘 교육시켜야 합니다. 이는 남존여비의 풍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자의에 의해서 남편 외의 다른 남자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리쿠르고스가 정치적인 이유에서 정한 이러한 규칙은 결코 방종한 삶을 도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풍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스파르타의 여성들의 정조의식을 흐릿하게 만들게 하였고, 사람들을 성적으로 방탕하게 만듭니다. 헬레니즘의 시기부터 그리스인들은 비로소 혼외정사를 끔찍한 악덕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상기한 이유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여성 비하의 내용을 담은 계율은 마치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예컨대 “여자는 공동체 내에서 침묵을 지켜야 한다.Aἱ γυναίκες ἐν ταίς ἐκκλησίαις σιγάτωσαν” “여성은 마치 담즙과 같다.Πάσα γυνὴ χόλος ἐστίν.” 등과 같은 저열한 속담도 상기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남존여비의 사상은 특히 로마 시대에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고대 로마와 고대 그리스의 삶은 역사학적으로 세분화되는 게 바람직합니다.

 

17. 스파르타의 가부장주의와 군사적 정황: 스파르타의 사랑의 삶에 있어서 남성 중심주의를 논할 때 우리는 스파르타의 정치적 군사적 정황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도시국가 스파르타는 내적으로는 그리스의 다른 도시 국가들과 대적하고 있었으며, 외적으로는 페르시아와 같은 적의 침공을 대비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스파르타는 군사력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전사의 덕목은 격정과 기개를 뜻하는 “튀모스θυμος로 정착되었습니다. (손병석: 293).

 

언젠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리쿠르고스는 처음에 여성들을 더 나은 존재로 교육시키려고 했지만, 중도에 이러한 정책을 포기하였다고 말입니다. 여기에는 여성을 거침없고 방종한 존재로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남성중심적인 선입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여성이 거침없고 방종한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남자들이 전쟁터로 나가서 전투에 몰두하는 동안 여성들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여성 지배에 혈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리쿠르고스는 판단했습니다. 그렇기에 여성들도 군사 훈련을 받고, 군대 조직에 배치되어 적과 싸울 것을 강조했습니다.

 

18. 몸을 강건하게 하기 위한 여성들의 나체 춤과 체조: 리쿠르고스는 여성들로 하여금 과감하게 나체로 춤을 추게 하는 조처를 내렸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댄스 공연, 체조 훈련 등을 개최하게 하였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은 벌거벗은 채 남자들 앞에서 체조하거나 춤을 추어야 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모든 여성성 내지 여성의 부드럽고 유약한 특성을 근절시키기 위함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남자들로 하여금 나체로 진행되는 여성들의 춤과 체조를 통해서 결혼에 대한 욕구를 부추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행사가 성적 수치심 내지 음탕한 욕망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습니다. 여성들의 나체 춤과 체조를 바라보면서 얼굴을 붉히는 젊은 사내들에게는 어떤 벌칙이 가해지곤 했습니다. 성욕을 드러내는 젊은이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심한 모욕의 말을 감내해야 했으며, 추운 겨울에 벌거벗은 몸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약 수십 킬로미터의 길을 행군하는 형벌을 달게 받아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