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고대 문헌

서로박: 플루타르코스의 리쿠르고스의 삶 (1)

필자 (匹子) 2020. 9. 20. 05:29

1. 전설과 신화 사이에서 진실 찾기: 기원전 5세기경부터 스파르타는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아테네와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플라톤이 아테네를 하나의 도시 국가로 설정하고, 하나의 바람직한 이상 국가를 설계하였다면, 스파르타를 이상적으로 서술한 사람은 플루타르코스 (Plutarch, 45 - 125)였습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리쿠르고스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비로운 입법자의 출신, 여행지 그리고 죽음 그리고 그가 제정한 법 규정 등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면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간과 그의 업적을 고려할 때 불일치점들이 많이 속출합니다. 이는 스파르타에 두 사람의 리쿠르고스가 살았기 때문입니다. (Pauly 7: 579).

 

입법자 리쿠르고스 외에도 또 다른 리쿠르고스가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은 기원 후 6세기에야 비로소 밝혀졌습니다. 플루타르코스가 리쿠르고스의 삶을 집필할 때 역사적 고증에 바탕을 두었는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지어냈는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에 의해서 정해진 법 그리고 여러 가지 제도가 이상국가의 법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상기한 사항을 고려할 때 우리는 리쿠르고스의 삶을 하나의 명징한 진리가 아니라, 추측 내지는 비유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2. 도시국가 스파르타의 다섯 가지 특징 (1): 고대 국가인 스파르타의 법 그리고 국가의 체계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특징을 알려줍니다. 첫째로 초기 도시 국가의 법 체제와 실제 삶을 재구성하기란 힘들고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스파르타 국가와 법에 관한 수많은 전설을 마구잡이로 지어내어, 실제 사실과 혼합시켰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스파르타의 입법에는 다른 도시 국가와는 구별되는 특징이 엿보입니다. 가령 스파르타 사람들은 이중 왕권의 체제를 고수했다고 합니다. 즉 두 명의 왕이 기원전 2세기까지 도시국가를 다스렸지요. (Schutz: 58f.).

 

또한 스파르타에서는 다른 도시 국가와는 달리 귀족 계층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스파르타의 강건한 시민은 모두 귀족으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언급되어야 하는 사항은 모든 법을 시행하는 기관은 다섯 명의 감독관, 즉 “에포로스ἔφορος에 의해 다스려졌습니다. 이들은 게루지아와 왕권을 견제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헌법 재판관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예컨대 기원전 403년에 파우자니아스 왕은 세 명의 에포로스를 설득하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군사 정책을 실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우리는 스파르타의 중대사의 결정이 오로지 왕권에 의해서 수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Kagan: 29).

 

3. 도시국가 스파르타의 다섯 가지 특징 (2): 셋째로 스파르타 초창기의 왕권은 매우 작은 범위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왕들은 오로지 예외적 비상사태에 자신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만, 평상시에는 다른 두 계층 사람들에게 권력을 위임하곤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에포로스” 그리고 게루지아 (원로원)의 현자들이 이 바로 그 두 계층입니다. 넷째로 스파르타의 인구는 다른 도시국가에 비해서 훨씬 적은 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스파르타의 남자들은 많은 적과 대적하기 위하여 무예를 익히고 군사훈련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인접 주민들, 노예들 그리고 외국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스파르타에서는 남녀 차별이 온존했으나,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여성의 권한이 보장 받았습니다.

 

4. 플루타르코스의 삶 (1): 플루타르코스는 로마 제국의 번성기에 살았습니다. 그는 카이로네이아 출신으로서 동생 람프리아스와 티몬과 함께 그곳에서 성장하였습니다. 플루타르코스의 집안은 그곳의 상류층에 속했는데. 교육열이 비교적 높은 편이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아버지, 아우토불로스보다는 할아버지인 람프리아스를 몹시 애호하였습니다. 그는 부모의 도움으로 견문을 익히기 위해서 자주 여행하였습니다. 주로 아테네에서 공부하면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 사이의 논쟁 서적을 집필하기도 하였습니다.

 

공부를 마친 뒤에 플루타르코스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기원후 70년에 결혼하여 카이로네이아에서 관직을 얻어서 건설부의 관리로 활동했습니다. 기원 후 95년에 플루타르코스는 델피에 있는 아폴론 신전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카이로네이아에서 학교를 건립하였습니다. 이곳에서의 주요 과목은 철학이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플라톤의 윤리학, 정치학, 수학 그리고 음악 그리고 천문학이 주요 과목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5. 플루타르코스의 삶 (2):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대부분의 삶을 카이로네이아에서 보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여행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의 여러 곳은 물론이며, 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에페소스 등과 같은 소아시아 등지를 여행하였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에서 많은 군중 앞에서 그리스어로 연설하였습니다. 그는 라틴어 또한 능숙하게 구사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로마에서 그는 많은 친구들과 사귀게 됩니다.

 

친구는 그에게 플루타르코스라는 로마식의 이름을 선물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칭하지만, 정작 역사가라기보다는, “전기 집필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고 합니다. 플루타르코스의 전집은 방대한 분량으로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처럼 방대한 책을 집필한 고대 작가는 이전에는 거의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6. 리쿠르고스,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의 삶』은 유토피아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진리가 부분적으로 가상적 판타지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역사적 사항을 완전무결하게 고증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흐릿한 역사적 여백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그렇기에 『리쿠르고스의 삶』은 “하나의 판타지가 가미된 역사적 문헌”이라고 명명될 수 있습니다. (Jens P: 461).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리쿠르고스는 기원전 9세기의 스파르타를 개혁하려던 정치가였습니다.

 

스파르타의 정치적 권력을 장악했을 때, 리쿠르고스는 이미 수년간 크레타, 소아시아, 이집트 등지를 여행한 다음이었습니다. 여행을 통해서 그는 다른 나라에서 활용되는 여러 가지 유형의 법과 제도를 학문적으로 익혔습니다. 특히 이집트 여행은 그에게 법 규정에 관한 지침을 얻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습니다. 마치 의사가 병든 육체와 건강한 육체를 비교하듯이, 리쿠르고스 역시 다른 나라의 훌륭한 법령을 고려하면서, 스파르타의 무질서하고 잘못된 법 체제를 수정하려 했습니다. 예컨대 잘못된 법 가운데 한 두 개만 수정하려고 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새로운 법을 탄생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잘못된 법과 개혁법을 뒤섞어서 짜깁기 식으로 시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7. 쿠데타를 통한 권력 장악: 리쿠르고스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는 델피의 신탁에 적힌 글귀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레트라 Rhetra”라고 명명합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제우스와 아테네의 성스러운 국가를 건립하여, 부족과 공동체를 결성하라. 30명의 제후들과 현자들을 데리고 ‘게루지아γέρυσια’라고 하는 원로원을 만들어라. 인민들로 하여금 이따금 바비크라 그리고 크나키온 사이에서 인민회의를 개최하도록 하라.” (Plutarch: 6).

 

어느 날 새벽을 틈타서 리쿠르고스는 30명의 명망 높은 스파르타의 시민들이 시장에 모이도록 조처합니다. 30명의 시민들은 리쿠르고스가 시키는 대로 무기를 거머쥐고, 반대파를 급습한 다음에 왕궁으로 향합니다. 그들은 위협을 가하면서 왕으로부터 개혁에 대한 동의를 얻어냅니다. 이러한 조처를 통해서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왕명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자가 됩니다. (Berneri: 40). 말년에 그는 인민회의에 참석하여,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훌륭한 법을 준수하라고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또한 자신의 법이 올바른지를 신탁에 물었습니다. 신탁의 답변에 만족한 그는 스파르타로 되돌아가는 대신에 그곳에 머물면서 어느 날 곡기를 끊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자신의 법이 대대손손 전해질 것을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8. 게루지아 (원로원), 정책 심의 기관: 리쿠르고스는 독재의 권력을 휘두르는 끔찍한 참주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60세 이상의 현자들 28명으로 하여금 원로원을 구성하게 하였습니다. 리쿠르고스는 원로원과 군주가 함께 정치를 수행하는 제도를 창안했습니다. 원로원은 국가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기관입니다. 원로원이 존재해야만, 왕의 권한이 어느 정도 축소화될 수 있다는 게 리쿠르고스의 판단이었습니다.

 

원로원은 인민회의의 지지를 받습니다. 당시에는 직접 민주주의의 방식이 가능했습니다. 모든 스파르타 사람들은 인민회의에 참석하여 자신의 견해를 직접 피력할 수 있었습니다. 참석자들은 발언권을 얻을 수 있지만, 안건에 대한 결정의 권한을 지니지는 않습니다. 원로원이 인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하나의 정책을 만들면, 군주가 이를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습니다. (Tommen: 97).

 

라쿠르고스는 인민과 왕 사이에 수평적 관계가 성립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민 의회가 왕궁의 회의실이 아니라, 실외에서 개최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만약 인민회의가 왕궁에서 개최되면, 회의 참여자는 조각상, 그림 그리고 벽화 등에 신경을 쓰게 되고, 이로 인하여 안건과 관련되는 중요한 논의 대신에, 온갖 불필요한 발언 그리고 의사 결정을 방해하는 잡다한 말들이 오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9. 원로원의 기능: 원로원은 왕의 권한과 인민의 권한을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지금까지 법은 오로지 왕의 명령에 의하며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원로원은 왕의 권한을 일부 행사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왕권의 횡포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혼란을 예방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의 개념은 현대적 의미의 민주주의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요약하자면 28명의 현자들로 구성되는 원로원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왕과 인민 사이의 이해관계를 소통시키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놀라운 것은 리쿠르고스가 인민의 권익보다도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다는 사항입니다. 인민의 견해는 리쿠르고스에 의하면 어리석은 백성들의 얄팍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제후 내지 현자의 견해보다도 올바르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리쿠르고스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기합니다. “만약 인민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현자들과 제후들은 이를 거절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인민의 잘못된 결정은 채택되지 않고, 파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의 안녕에 위배되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신께서 위탁한 올바른 견해를 인민이 함부로 뒤집을 수는 없는 일이다. (Swoboda: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