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3) 바이틀링의 기독교 공산주의

필자 (匹子) 2023. 3. 31. 08:23

(앞에서 계속됩니다.)

 

11. 바이틀링의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 두 번째로 바이틀링이 추구한 바람직한 국가 공동체의 상에 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는 바이틀링이 이에 관해서 세부적으로 치밀하게 구성적으로 개진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기인합니다. 첫째로 바이틀링의 경제 시스템은 엄격한 공동체 중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유재산제, 유산의 권한, 화폐 그리고 시장 등이 철폐되어 있습니다. 유산의 권한을 없앤다는 것은 이를테면 귀족과 같은 시민 사회의 특권층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발상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화폐 그리고 시장의 철폐는 이윤추구의 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바이틀링의 유토피아는 사회주의의 계획 경제 구도와 인접해 있습니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구도와 관련하여 바이틀링이 푸리에의 새로운 사회적 질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푸리에의 공동체 시스템 속에서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의식주의 질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푸리에의 경우 의복과 음식 그리고 거주지에 대한 사유 재산은 제각기 독립적으로 노동과 화폐 그리고 재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푸리에는 노동 대신에 화폐 그리고 인간의 재능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는 바이틀링의 견해에 의하면 결코 조화로운 시스템을 실현시키지 못하게 하는 취약점이라고 합니다. (Weitling I: 245). 물론 인간의 내면에서 서로 모순되는 정념들은 노동, 돈 그리고 능력이라는 세 가지 다른 관심사에서 비롯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개별 인간에게는 이러한 세 가지 서로 다양한 관심사가 존재하며 그 강조에 있어서 편차가 드러나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결코 조화로운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고 바이틀링은 주장합니다.

 

12. 바이틀링의 푸리에 비판: 푸리에는 무엇보다도 개별 인간들에게 자본과 사유재산을 용인하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엄청난 잘못이 파생되리라고 바이틀링은 주장합니다. 골치 아픈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활개 치는 이윤 추구의 거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설령 푸리에가 처음부터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 속에 상인 계급이 형성되어, 종국에 이르러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회적 질서 하의 공동체 내에 사유재산을 인정한다는 것은 새 옷에다가 낡은 옷감 조각을 얼기설기 첨가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현재 혹은 미래의 사람들은 푸리에의 시스템을 바라보고 조소를 터뜨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특히 문제는 가난한 하층민들이 사유 재산이 용인되는 공동체 내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푸리에의 사회적 질서는 차제에 병들게 되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인민들은 팔랑스테르 공동체에 소속된다고 하더라도 공동체 사람들과의 빈부 차이로 인하여 결코 그곳에 동화되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13. 바람직한 공동체의 전제 조건: 만약 푸리에의 팔랑스테르 공동체에 관한 협동적 삶에 관한 계획이 인류의 안녕이라든가 수많은 빈민 계층의 상태를 향상시키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능성을 처음부터 용인해야 한다고 바이틀링은 주장합니다. 첫째로 만인은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려는 경우 스스로 자유로운 결정권을 지녀야 하며,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경제적 수단을 미리 소유해야 합니다. 둘째로 모든 공동체 사람들은 처음부터 서로 경제적 생활수준의 차이를 지니지 말아야 합니다. 공동체는 처음부터 경제적 균등화는 아니라 하더라도, 구성원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경제적 평등을 실현시키게 하여, 구성원들로 하여금 심리적 위화감을 느끼지 말도록 조처해야 합니다. 셋째로 만인은 혼자 고립되어 살아가는 것보다 공동체에서 더욱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협동 교육 프로그램, 농업과 수공업에서의 공동 생산 프로그램 등이 개발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14. 자본주의와는 무관한 생산과 소비에 관한 바람직한 질서: 바이틀링은 새로운 공동체 사회를 위해서는 한 가지 사항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생산 소비 과정과는 전혀 다른, 생산과 소비에 관한 바람직한 질서입니다. 이러한 질서는 사회 내의 개별적 구성원이 능력을 발휘하고 무언가를 갈구하는 데 있어서 평등한 규칙을 준수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균형과 평등의 질서는 결코 돈이라든가 상업적 시스템에 의해서 방해되거나 파괴되지 말아야 하는 무엇입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바이틀링은 푸리에의 사상을 근본적 관점에서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한 공동체의 새로운 삶에 관한 푸리에의 이념에서 많은 부분을 수용하고 있다는 사항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고찰하면 바이틀링은 푸리에를 비판하려고 한 게 아니라, 푸리에 추종자들의 약간 변화된 입장을 강도높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15. 어떻게 하면 노동에 대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바이틀링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습니다. 긍정적 욕망이라든가 삶을 즐기려는 욕구, 생업을 영위하려는 욕망이라든가 지식을 쌓으려는 열정 등은 원칙적으로 상품의 판매와 구매가 허용되는 시스템 속에서는 안타깝게도 저열한 무엇으로 변질되고 만다고 합니다. 가장 잘 조직화된 사회는 자칫 잘못하면 개인의 안녕이 아니라, 사회의 보편적 안녕만을 위하는 구성적인 방향으로 향하게 될 위험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원래 푸리에가 의도했던 정념 내지 쾌락 자체는 역으로 억압될 수도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본주의의 매매 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바이틀링은 확신하였습니다.

 

그밖에 바이틀링은 푸리에와 마찬가지로 노동이 즐거워야 하고 개별 사람들이 노동의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노동에 있어서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루에 다양한 일을 행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를테면 바이틀링은 푸리에와 마찬가지로 노동 예비군과 같은 조직이 결성되어서 철도, 운하, 교량 등과 같은 사회 간접자본을 건설하게 하는 사업을 깊이 숙고하였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