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1) 바이틀링의 기독교 공산주의

필자 (匹子) 2023. 3. 31. 08:20

아래의 글은 필자의 다음과 같은 책에 실려 있습니다. 박설호: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3, 메르시에에서 마르크스까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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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와 가난한 노동자: 빌헬름 바이틀링은 소시민 출신으로서 독일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다가 독일의 혁명가의 대열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는 프랑스의 신학자, 펠리시테 라므네 Félicité Lamenais의 영향을 받아, 죽을 때까지 작은 것이 위대하다.”라는 기독교 정신을 고수하며 살았습니다. 라므네는 가톨릭의 입장에서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는 게 옳다고 확신했으며, 자유주의의 시각에서 종교적 관용을 부르짖은 신앙인이었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종교적 갈등의 시기에 관용을 주창하는 것은 그 자체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라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바이틀링이 간행한 두 권의 대표적 저작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화로움과 자유의 보장(1842), 가난한 죄인의 복음서(1843) 두 권의 책을 통하여 바이틀링은 노동자 수공업자 출신의 작가 가운데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특히 첫 번째의 책은 3판까지 연속적으로 간행되었고, 발간 즉시 프랑스어, 노르웨이어 그리고 헝가리어로 번역되어 책으로 간행되었습니다. 1844년 마르크스는 파리에 머물고 있을 때 이 책을 접할 수 있었는데, 잡지 전진에서 두 권을 미래에 활동할 대단한 거물이 간행한 데뷔작이라고 호평하였습니다. 하인리히 하이네 그리고 포이어바흐 등은 바이틀링의 조화로움과 자유의 보장을 독일 혁명의 신앙지침서라고 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미리 말씀드리건대 바이틀링의 유토피아는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와 가난한 노동자 사이의 만남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이틀링이 추구한 가난한 노동자는 붉은 영웅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2. 바이틀링의 삶 (1): 빌헬름 바이틀링은 1808125일 마그데부르크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그데부르크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었는데, 프로이센에 주둔하던 프랑스의 장교에 의해서 겁탈당한 뒤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프랑스 장교의 이름은 기욤 테리용이었는데, 나중에 나폴레옹 군대를 따라 러시아로 진군했는데, 그곳에서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빌헬름은 어머니, 크리스티안네의 바이틀링이라는 성을 따르게 됩니다. 그의 유년 시절은 참으로 비참했으며, 먼 훗날 그가 맞이한 죽음 역시 궁핍한 정황 속에서 비롯한 결말이었습니다. 바이틀링은 재단사 조수로 일하다가 1936년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거기서 멸시당하는 자들의 동맹에 가입합니다. 이 동맹은 독일에서 혁명적 지조를 표출하다가 프랑스로 망명한 수공업 노동자들의 단체였습니다. 동맹의 노동자들은 대체로 프랑스의 초기 사회주의자, 바뵈프 그리고 필리포 부오나로티에 의해서 전해진 사회 혁명 이론을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멸시당하는 자의 동맹은 조국을 떠나 방랑하는 독일 노동자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자신의 영향력을 서서히 높여나가게 됩니다.

 

3. 바이틀링의 정치 활동 (1): 1836년에 빌헬름 바이틀링은 연맹의 대표로 선출되는데, 이때부터 그룹은 거대한 단체를 결성하게 되었으며, 명칭 또한 정의로운 자들의 동맹으로 바뀝니다. 정의로운 자들의 동맹은 내용적으로 모반에 관한 지엽적인 전략으로부터 벗어나서 사회적 변화의 선동을 더욱더 강조하게 됩니다. 1839년 프랑스에서는 7월 혁명이 발발하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루이 필립이라는 시민의 왕을 권좌에서 내쫓기 위해서 폭동을 일으킵니다.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세력이 바로 정의로운 자들의 동맹이었습니다. 그러나 폭동이 끝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당국은 혁명에 가담한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바이틀링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정의로운 자들의 동맹을 영국의 런던으로 이전하도록 조처합니다. 이때 정의로운 자들의 동맹이 영국의 런던에서 자리를 잡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마르크스와 엥겔스였습니다.

 

 

4. 바이틀링의 정치 활동 (2): 바이틀링은 공산주의 계급투쟁이라는 명제를 강하게 내세웠습니다. 이로써 그는 생시몽의 이론 그리고 조합 운동으로 퍼져나가던 푸리에의 이론으로부터 서서히 등을 돌렸습니다. 바이틀링은 노동자들의 관심사 그리고 일반 시민들 내지 부유한 시민들의 관심사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감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정치적 권력 구조를 해결할 수 있는 혁명 뿐 아니라, 계층 간의 경제적 갈등을 전폭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사회 혁명,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특히 후자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고 바이틀링은 확신하게 됩니다. 노동자들의 고유한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그들이 계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847년에 바이틀링이 미국으로 떠난 뒤에, 사람들은 정의로운 자들의 동맹을 공산주의자들의 동맹으로 개명하기에 이릅니다.

 

5. 바이틀링의 삶 (2): 바이틀링과 마르크스는 미래 사회에 관한 견해 차이로 인하여 서로 갈등을 빚게 됩니다. 두 사람의 의견대립으로 인하여 한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이틀링의 추종자들이 공산주의자 연맹에서 제외된 사건이었습니다. 바이틀링은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 미국의 뉴욕으로 떠나, 1848년 혁명이 발발했을 때 독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1848년에 발생한 독일 혁명에서 바이틀링은 결코 커다란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합니다. 사회적 변화에 더 이상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바이틀링은 1849년 말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 주재 독일 노동자의 연맹을 결성합니다.

 

1851년 그는 아이오아에 있는 클레이튼 카운티 공동체와 합류합니다. 공동체는 이미 4년 전에 하인리히 코흐가 이곳의 땅을 구매하여 창립한 바 있는데, 그 자체 사회주의의 삶을 추구하는 조합이었습니다. 1851년 말경에 바이틀링이 자신의 모든 것을 마쳐 발전시킨 아이오아의 공동체는 미국 주재 독일 노동자 연맹과 합병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바이틀링은 재정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되고, 1854년에 공동체 사람들과 심한 의견대립 끝에 아이오아 공동체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1854년 공동체는 해체되고 맙니다. 바이틀링은 그해에 카롤리네 퇴트와 결혼하였고, 이후 뉴욕에서 재단사로 일하면서 평범하게 살다가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6. 마르크스와 엥겔스와의 견해차이: 그렇다면 어째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바이틀링의 입장을 거부하고, 그를 사회주의 운동 과정에서 제거해야할 지식인으로 간주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바이틀링의 사고가 처음부터 사해동포의 사회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이틀링의 사고는 만인은 형제다.”라는 국제주의적 낙관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낙관주의적 태도는 마르크스의 눈에는 두 가지 취약점을 지닌 것 같았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주어진 사회 내의 계급갈등의 본질을 고찰하여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과는 부합되지 않습니다. 사해동포의 낙관주의는 거시적 차원에서 고찰할 때 국가중심의 제반 정책을 부인하게 하는 아나키즘의 경향을 부추깁니다. 둘째로 바이틀링의 낙관적 태도는 프루동과 같은 아나키즘 사상과 결탁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연합 전선을 위한 구체적 정책 설정을 음으로 양으로 방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해동포주의는 그 속성상 사회의 특정 계급의 이권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스탈린이 사회주의의 정책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국가를 초월한 시계 시민으로서의 유대인 공동체의 슬로건을 무너뜨리고, 유대인을 배제한 민족 중심의 국가주의를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도 상기한 사항과 관련됩니다. (Lustiger: 72). 한마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의 약자로서의 노동자 운동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바이틀링의 국제적 사해동포주의를 하나의 방해요인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바이틀링은 다만 전략적 차원에서 아나키스트와의 공조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바이틀링의 이러한 태도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눈에는 아나키즘과의 전략적 합작이 아니라, 아나키즘의 본질로 비치게 됩니다. 자그마한 전략 하나가 결국 마르크스와 바이틀링 사이의 근본적 입장차이로 비화되었는데, 이는 결국 두 사람 사이의 오해와 불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