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1)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설

필자 (匹子) 2023. 4. 2. 11:38

1. 위대한 종교 개혁자, 라스카사스와 토마스 뮌처: 서양의 종교 개혁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서 라스카사스LasCasas와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가 손꼽힙니다. 그 이유는 라스카사스와 뮌처가 종교의 개혁과 정화 운동을 넘어서서, 주어진 현실의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고 민초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라스카사스는 가톨릭 사제로서 신대륙에서의 인디언 학살과 제국주의의 비리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수없이 대서양을 횡단하였습니다. 뮌처는 16세기에 독일 농민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상의 천국을 선물하려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힘없고 가난한 인민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시대의 가장 끔찍한 모순을 고발하며 이를 시정하려고 고군분투했다는 점에서 루터와 칼뱅을 앞서기에 충분한 분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라스카사스와 뮌처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신을 변모시키고, 그들의 사상과 행동을 첨예하게 실천해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바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를 위해서 죽음의 위협조차도 개의치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비하면 루터와 칼뱅은 신학을 연구하고 성서해석에 몰두했으나, 굶주리며 살아가는 인민의 참혹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으며, 자신을 희생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그들이 하층민의 시각으로 세상을 고찰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2. 토마스 뮌처의 사상적 깊이: 조아키노 다 피오레에 의해서 설정된 천년왕국설의 혁명적 정신은 토마스 뮌처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독일 농민 혁명으로 실천되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사상을 수미 일관적으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루터의 체제옹호적인 기회주의와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뮌처의 사상과 실질적인 운동은 먼 훗날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의 영향력 넘치는 책,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상세하게 언급된 바 있는데, 뮌처의 삶과 사상은 현대에 이르러 유토피아의 토론의 쟁점으로 점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천년왕국설과 메시아사상은 어떠한 이유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과 관계되는가?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은 어떠한 측면에서 유토피아 모델 설정과 관련되는가? 천년왕국설에 내재한 유토피아의 요소가 국가 소설에 담겨 있는 유토피아 모델과 구분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는 일련의 물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하임: 289 이하). 어쨌든 현대의 학자들은 만하임 이후에 뮌처를 종교적 유형의 혁명 운동의 대변인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렇지만 모어 등과 같은 유토피아주의자들이 합리적으로 설계한 이상국가의 상 그리고 뮌처의 천년왕국설에 바탕을 둔 혁명 운동 사이에 어떤 커다란 간극이 자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3. 뮌처의 강인하고 짧은 삶 (1): 뮌처는 학문을 통해서 인민을 계도하려는 인문주의자라기보다는, 깊은 신앙을 지닌 강직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14세기 영국의 종교 개혁자이자 급진 후스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존 위클리프 John Wycliffe 그리고 15세기 영국의 농민혁명가, 존 볼 John Ball과 유사합니다. 그의 관심사는 학문적으로 뜨거운 논쟁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실제 현실의 변화를 위한 천년왕국설에 입각한 종교적 그리고 사회적 혁명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뮌처의 마지막 7년 동안의 삶입니다. 이것은 6년 동안의 두 차례 잠행의 시기 그리고 1년 동안의 두 차례 거사의 시기로 나누어집니다. (최재호: 105 이하). 1518년부터 1522년까지가 첫 번째 잠행의 시기이며, 1522년부터 15254월까지가 두 번째 잠행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잠행의 시기에 뮌처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안티크리스트를 외부의 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1525년에 뮌처는 로마 가톨릭교회 그리고 루터와 같은 사이비 종교 개혁자들을 안티크리스트라고 규정합니다. 이들은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이율배반적인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4. 뮌처의 강인하고 짧은 삶 (2): 첫 번째 잠행의 시기에 뮌처는 종교 개혁의 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츠비카우에서, 나중에는 프라하와 튀링겐 지방의 소도시, 알트슈테트에서 프로테스탄트 설교자로 일했습니다. 1519년 뮌처는 마르틴 루터와 만난 게 틀림없습니다. 당시에 루터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요한 에크와 신학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때 뮌처는 거기서 청강한 것 같아 보입니다. 뮌처는 처음에는 루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1520년에 츠비카우에 있는 성 마리엔 교회의 설교자 자리를 얻게 되었으며, 뒤이어 카타리엔 교회의 목사직을 수락하게 된 것도 루터의 추천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뮌처는 보헤미안 지역의 급진 후스 종파의 하나인 타보리티 파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타보리티 파는 일체의 수사 직을 용인하지 않고, 신을 믿는 종파였습니다. 그러나 뮌처는 몇 년 후에 루터와 끝내 결별을 선언하고, “선택받은 자들의 동맹을 결성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택받은 자들의 동맹이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신앙공동체를 가리킵니다.

 

5. 뮌처의 강인하고 짧은 삶 (3): 뮌처는 직분, 재산, 나이 그리고 성별 등과 무관한 신앙인끼리의 만남을 무엇보다도 중시했습니다. “기독교인이 한 명만 있으면, 기독교인은 없다.Unus Christianus nullus Christianus.”라는 말을 수미일관 추종하였습니다. (블로흐 2009: 399). 기독교 신앙은 같은 신도와의 만남과 집회를 중시하며, 무엇보다도 교회라는 단체를 통해서 수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와 뮌처의 믿음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문헌으로 여기고, 이를 중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루터에 의하면 성서에 담겨 있을 뿐, 고위 수사들의 표리부동한 설교 속에 담겨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뮌처는 신앙인의 마음속에 태동하는 성령의 존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요한의 복음서1613절 이하에 언급되어 있는 성령의 존재를 굳게 믿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에크하르트 선사, 요한네스 타울러 등의 신비주의 사상과 슈바벤 경건주의의 신앙과의 관련성 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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