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 13

서로박: (5) 무지한 자의 맹신으로서의 유토피아. 하인의 '원탁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앞에서 계속됩니다.) 9. 성배의 상징, 유토피아 성배가 상징하는 바는 하인의 극작품에서 핵심을 이루는 대목이므로, -등장인물의 논의와는 다른 차원에서- 다시 한 번 비판적으로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 하인의 작품은 모든 아름다움과 선의 문제를 종교적 차원과 관련시키지는 않는다. 이미 언급했듯이 "원탁의 기사들"에는 시간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역사극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려는 극작가의 의도와 관련된다. (역주: 대부분의 극작품은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극작품속에 담긴 역사적 소재가 아니라, 극작품의 집필 시기이다. “안티고네는 극장에서 현재 공연된다. 그러므로 연극 사 내지는 극장 사에 관한 질문은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 Chr. Hein: Schlötel oder..

45 동독문학 2025.02.03

서로박: (1) 무지한 자의 맹신으로서의 유토피아. 하인의 '원탁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무지한 자의 맹신으로서의 유토피아. 크리스토프 하인의 '원탁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  “아르투스: 우리를 괴롭히고 방해하는 것은 희망에 대한 굶주림이야. 모드레: 성배는 너희들이 평생 추적하는 망상일 뿐이지. 카이에: 누구도 원치 않는 미래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희생해 버렸네. 란셀로: 원탁의 기사들은 백성들에겐 바보, 백치, 그리고 범인들의 집단에 불과해. 파르치발: 성배는 없어. 있다면, 우린 우리의 마음속에서 찾아야 해.”  1. 폭풍 전야, "원탁의 기사들" 구동독 출신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크리스토프 하인 (1944- )의 󰡔원탁의 기사󰡕가 드레스덴 극장에서 초연된 날은 고르바초프가 개혁 정책을 추진한 지 4년째 되는 해인 1989년 3월 24일이었다. 한마디로 폭풍 전야의 불안한 시대..

45 동독문학 2025.01.30

볼프 비어만: 스스로 변하는 자만이 지조를 지킨다

https://www.youtube.com/watch?v=KD6KclGtKKk   스스로 변모하는 자만이 지조를 지킨다 나는 피 헤집고 거대한 빛 밖으로 헤엄쳤네.호기심 어린 채 배에서 나왔지.나는 동물이었고, 또한 인간이었어.처음부터 게슈타포에게서심문 당하는 걸 어설프게 배웠네.부끄럼 없이 젖을 빨면서모유와 함께 바로 그 진리를:스스로 변모하는 자만이 지조를 지킨다. 함부르크를 떠나온 나는이미 16세 때 약속의 땅으로 향했지.그때 백만 여명이 나와 같은 길을택했어, 다만 정 반대로 방향으로.나는 집을 떠나고 싶었어.집으로! 여행은 새로운 게 아니야.젊은이는 하나의 조국을 찾는 법.스스로 변모하는 자만이 지조를 지킨다. 그래, 저쪽에 도착했지. 마치 눈먼어린아이처럼 악의 없이 열광했어.또한 즉시 보았지..

서로박: 하인의 '낯선 연인' (5)

18. 주변 인물들과 가부장적 남성 중심사회 (1): 클라우디아가 분열된 이중적 자아를 지닌 채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까닭은 그미가 구동독이라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고 애틋한 사랑의 삶에 관한 어떠한 구체적 사항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동독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내세우면서 평등한 삶을 추구해 왔지만, 사회 심리적 측면에서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삶을 추구하려는 남녀들을 전혀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방해해 왔습니다. 오로지 여성에게만 금욕과 순결을 요구하는 가부장적 자기기만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가해 왔습니다. 다른 한편 레닌과 같은 권력을 지닌 남자들은 모든 창녀들을 달콤한 마돈나라고 아름답게 포장하곤 하였습니다. 이에 관해서 클라라 체트..

45 동독문학 2022.05.20

서로박: 하인의 '낯선 연인' (4)

15. 분열된 이중 자아의 원인 (2) 여성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구동독의 이데올로기: 둘째로 클라우디아가 성격 갑옷을 착용하면서 분열된 이중 구조의 성격을 드러내는 까닭은 구동독의 가부장적 금욕주의 뿐 아니라, 여성 학대라는 사회적 경향 때문입니다. 1953년 6월 17일 구동독에서 동베를린 노동자 데모가 끝났을 때 지배 계층은 다음과 같은 강령을 모든 학교에 하달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랑과 성은 하나의 타부, 즉 금기 사항이라고 말입니다.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은 이 세상에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여성의 성을 차지하고 학대하는 가부장들의 성폭력밖에 없다는 말을 뜻합니다. 가부장적 성폭력은 오랫동안 구동독에서 지배의 수단으로 작용해 왔습..

45 동독문학 2022.05.19

서로박: 하인의 '낯선 연인' (3)

9. 클라우디아의 냉담한 태도: 지금까지 여주인공은 헨리와 교우했지만, 깊이 빠져들기를 거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미는 스스로 사랑에 빠져 들까봐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신의 자의식을 침해하기 때문입니다. 헨리는 그미에게 친구이자 애인이지만, 낯선 남자에 불과합니다. 비록 정기적으로 그와 만나 동침하지만, 그미는 헨리가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것을 처음부터 거부합니다. 한마디로 클라우디아는 자신의 고유한 감정에 이끌리지 않으려고 하며, 나아가 남들로부터, 특히 남자들로부터 기만당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타인에게 따뜻한 정을 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 전체를 타인에게 떠맡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간헐적으로 외로움이 엄습하고, 사랑하는 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은 경우가 없는 것은 아..

45 동독문학 2022.05.18

서로박: 하인의 '낯선 연인' (1)

1. 기이하고도 놀라운 명작: 친애하는 H, 문학 작품은 일견 뜬금없는 공상적 이야기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주어진 사회의 깊은 문제를 은근히 보여주는 수단입니다. 만약 특정한 작품이 주어진 사회의 핵심적 난제를 교묘하게 꿰뚫고 있다면, 그 작품은 명작의 반열에 오를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오늘은 크리스토프 하인의 중편소설 「낯선 연인 Der fremde Freund」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982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하인의 두 번째 산문으로서, 동독에서 발표된 이후에 서독에서 “용의 피 Drachenblut”라는 제목으로 루흐터한트 출판사에서 간행되었습니다. 크리스토프 하인은 1944년생의 구동독 출신의 작가로서 대학에서 철학과 논리학을 공부한 뒤에 80년대 초까지 주로 극작품을 집필해 왔습니다..

45 동독문학 2022.05.16

서로박: 하인의 바이스케른의 유고 (2)

주인공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14년 동안 시간 강사로 일하면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 자체가 상징적입니다. 독일어로 “스톨츠 stolz”는 “자부심 있는”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부르크 Burg”는 “성 城”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아닌 게 아니라 주인공은 “자존심 강한 꽉 막힌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교수자격 취득 논문 Habilitation”의 과정을 끝내지 않았으니, 정식으로 교수가 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강사 수당으로 그리고 간간이 발표하는 서평의 원고료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갑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보다도 더 가난합니다. 학자로서의 미래는 불확실한 셈이지요. 교수가 되기에는 59세라는 나이는 악재로 작용합니다. 심신이 쇠약하여 ..

48 최신독문헌 2022.05.14

서로박: 하인의 '바이스케른의 유고'(1)

친애하는 H, 오늘날 모든 가치는 돈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거 사람들은 공부하여 출세한 다음에 금력을 차지하였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하여 세계적인 스포츠맨 혹은 인기 있는 연예인이 매달 벌어들이는 거액의 정확한 액수를 정확히 압니다. 또한 그들은 교수가 한 달에 몇 백만 원의 월급을 받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젊은이들은 책 속에 파묻혀 하루하루를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통 크게 돈 벌면서 살아가는 게 더 낫다고 여기지요. 한마디로 지식인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나름대로의 어떤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지만,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자본의 시대에 돈의 힘은 너무나 어마어마..

48 최신독문헌 2022.05.14

서로박: 토마스 브루시히의 우리 같은 영웅들

친애하는 H, 브루시히는 이 작품에서 30대 중반에 해당되는 남자, 울츠트를 등장시킵니다. 구동독이라는 나라 자체가 주인공에 의하면 패러디의 대상입니다. 클라우스 울츠트는 -50년대 이후에 태어난 구동독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는데- 사회주의 운동에 관해 어떠한 관심도 표명하지 않습니다. 가령 맑스는 주인공에게는 100마르크 지폐에 그려진 자이고, 엥겔스는 50마르크 지폐에 그려진 자일뿐입니다. 주인공의 톤은 스페인의 악한 소설을 연상시킬 정도로 유머러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렇기에 독자는 이 소설을 (상기한 두 편의 작품과는 달리)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자칭 미래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클라우스 울츠트는 1968년 8월 소련군의 탱크가 프라하로 진군할 때 거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소..

45 동독문학 2021.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