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자의 맹신으로서의 유토피아. 크리스토프 하인의 '원탁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
“아르투스: 우리를 괴롭히고 방해하는 것은 희망에 대한 굶주림이야. 모드레: 성배는 너희들이 평생 추적하는 망상일 뿐이지. 카이에: 누구도 원치 않는 미래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희생해 버렸네. 란셀로: 원탁의 기사들은 백성들에겐 바보, 백치, 그리고 범인들의 집단에 불과해. 파르치발: 성배는 없어. 있다면, 우린 우리의 마음속에서 찾아야 해.”
1. 폭풍 전야, "원탁의 기사들"
구동독 출신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크리스토프 하인 (1944- )의 원탁의 기사가 드레스덴 극장에서 초연된 날은 고르바초프가 개혁 정책을 추진한 지 4년째 되는 해인 1989년 3월 24일이었다. 한마디로 폭풍 전야의 불안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하인의 극작품은 처음으로 공연되었던 것이다. (역주: 하인의 극작품들은 -기회주의적 지식인의 모순적인 성격 구조를 풍자한 작품, 「라쌀은 헤르베르트씨에게 소냐에 관해 묻다 (Lassalle fragt Herrn Herbert nach Sonja)」를 제외한다면- 한결같이 변혁기 내지 폭풍 전야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를테면 「크롬웰 (Cromwell)」 (1980)은 농민 혁명의 투쟁을, 「아Q의 진정한 이야기 (Die wahre Geschichte des Ah Q)」 (1983)는 1922년 중국의 신해혁명 당시의 상황을, 「통과 (Passage)」 (1987)는 1942년 프랑스 에스파냐 국경에서 탈출 상황을 다루고 있다. 전환기의 상황에서 인간의 내적 심리적 태도 그리고 도래할 미래에 대한 입장 차이 등을 예리하게 묘파하는 것 - 이것이 바로 하인 문학이 지향하는 일차적 관건이다.) 이때는 불과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기 불과 칠 개월 전이었으나, 이 시기에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예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당수의 작가들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1977년 이후부터 서독으로 이주하였고, 많은 젊은이들도 이주를 결심하고 있었다. 나머지 작가들은 1985년 이후부터 공공연하게 문화 정책의 다양성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크리스토프 하인 역시 1987년 작가 회의석상에서 “인쇄 허가 조처”, 즉 검열이 예술 창작에 얼마나 커다란 악재로 작용하는가를 과감하게 지적한 바 있다. (역주) Chr. Hein: Die Zensur ist überlebt, nutzlos, paradox, in: ders., Die fünfte Grundrechenart. Aufsätze und Reden 1987 - 1990, S. 104 - 107.) 그렇지만 50년대 출생의 젊은 작가들은 거의 사회주의의 이상에 대해 완전히 등을 돌렸으며, 뒤늦게 서구의 실험 문학 내지는 포스트 모던한 예술적 경향을 추종하였다. (역주: 폴커 브라운과 플렌츠라우어 베르크 출신의 젊은 작가들 (우베 콜베, 사샤 안더슨, 파펜푸스-고렉, 얀 팍토어 등) 사이의 의견 대립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로써 작가들 사이에는 정치적 예술적 제반 문제에 관한 견해 차이가 온존하였고, 작가들과 일반 대중 사이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이질적 견해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쩌면 하인의 말대로 고르바초프의 개혁 운동은 20년 전에 시작되었어야 옳았는지 모를 일이다. (역주: Chr. Hein: Unbelehrbar - Erich Fried, in: ders., Texte, daten, Bilder, Darmstadt 1990, S. 20 - 36, Hier S. 25.) 구동독의 정체 현상은 너무나 오래 지속되었다. 그렇기에 ‘개혁’은 -적어도 독일 땅에서는- 현저하게 약화된 반면, 대신에 ‘개방’만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헝가리, 체코에서의 민주화 운동이 비교적 성공을 거둔 까닭은 그곳에는 서 베를린과 같은 도피처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역주: “폴란드인이나 체코인들에 비해 동독의 지식인들은 재빨리 수건을 던지고, (구서독으로) 떠나겠다고 쉽사리 선언할 수 있었지요.” Chr. Hein: Die alten Themen habe ich noch, jetzt kommen neue dazu, in: ders., Texte, Daten, Bilder, a. a. O., S. 42.) 바클라프 하벨 (Vclav Havel) 같은 작가에게는 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고향’이 주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미약한 쥐 한 마리는 쥐구멍 하나도 없는 모서리에 갇히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고양이를 물어뜯으려고 한다. 이렇듯 구동독을 제외한 동구의 지식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감옥에서 모든 억압을 버틸 수 있었는지 모른다.
2. 다의적 비유 극
한마디로 말해 하인의 "원탁의 기사들"은 -한스 마이어가 주장한 바대로- 종말론적인 분위기와 해방의 역사 사이에 머물고 있는 작품이다. (역주: Hans Mayer: Der Turm von Babel. Die Erinnerung an die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Frankfurt a. M. 1992, S. 252.) 기법 상으로 볼 때 그것은 이오네스코 이후의 현대의 전망을 잃은 실험극의 유형에 속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낙관주의적 리얼리즘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 하인의 원탁의 기사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온존했던 시대의 마지막 시기에 동서독의 국경선 사이에서 정확히 이해될 수 있는 다의적 비유 극이다.
주지하다시피 아르투스 왕의 전설은 지금까지 거의 종말극의 소재로 원용되어 왔다. 리햐르트 바그너의 "파르시팔 (Parsifal)", 장 콕토의 "원탁의 기사들 (Les Chevaliers de la Table Ronde)" 등은 전설적 소재를 세기말적인 비극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종말 극으로 이해된다. 바그너의 작품이 공동체의 이상에 대한 절망적인 부르짖음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장 콕토의 작품에서는 마술사 메를린이 등장하여 세상을 폐허로 만들고 있다. 이로써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황량한 시대적 불안 등이 장 콕토의 작품에서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그러나 하인의 작품은 이와는 다르다.
"원탁의 기사들"에서 하인은 자신이 추구하던 연대기 서술자의 객관적 시각을 계속 견지하고 있다. (역주: 하인은 창작에 임하는 자신을 “연대기 서술자”라고 명명한 바 있다. Siehe K. Jachimcyak: Gespräch mit Chr. Hein, in: Sinn und Form, 40. Jg., 2/ 1988, S. 342 - 359, Hier S. 347f. 이러한 태도는 사물에 대한 객관적 서술을 강요 (?)하는 리얼리즘의 철칙과는 달리 이해되어야 한다. 하인의 견해에 의하면 작가는 작품 주제상의 해답 내지는 해결 방안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대신에, 이러한 작업을 독자에게 유보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는 ‘한 가지 해답을 강요하는 자’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작품 속에서는 경비한 범위 내에서 작가의 주관적인 견해가 용해되어 있다고 한다.) 제반 등장인물들은 “희극 작품”이라고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하게 사고하며, 비극적으로 행동한다.
본고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극작품의 핵심적 문제로 설정하고자 한다. 인간의 이상은 어째서 기존 사회주의 사회내의 제반 원칙을 통해서 실현될 수 없는가? 성배를 찾는 인간의 끝없는 노력은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한가?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미리 말해두지만- 이상에 대한 포기 내지는 체념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데올로기로 화한 유토피아가 더 이상 효력을 상실했다면, 보다 나은 개인적 사회적 이상은 어떻게 수정될 수 있는가? 하고 하인은 반문하고 있다. (역주: 가령 하인이 1990년에 발표한 단편 「Kein Seeweg nach Indien」은 「인도로 향하는 항로는 없다」로 번역될 게 아니라, 「인도로 향하는 항로가 아니다」라고 번역되어야 옳다. 이 작품에서 하인은 구동독의 사회주의의 방향을 인도로 향하는 “바보 선”으로 희화화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작가의 시각이 기존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향하고 있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전체적 비판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Chr. Hein: Kein Seeweg nach Indien, in: Texte, Daten, Bilder, a. a. O., S. 13 - 19.)
이로써 하인의 문학은 중세의 소재를 원용하여 반 유토피아의 시대정신을 확정하려는 일련의 포스트모던한 시도와는 전혀 다르다. 하인은 역사를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소재로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문학은 역사를 인용함으로써 탈 역사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포스트모던한 경향과는 거리가 멀다.
(계속 이어집니다.)
* 출전: 박설호: 무지한 자의 맹신으로서의 유토피아, 크리스토프 하인의 "원탁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in: 박설호, 떠난 꿈, 남은 글, 한마당 1999, 342 - 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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