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토마스 브루시히의 우리 같은 영웅들

필자 (匹子) 2021. 12. 26. 18:35

친애하는 H, 브루시히는 이 작품에서 30대 중반에 해당되는 남자, 울츠트를 등장시킵니다. 구동독이라는 나라 자체가 주인공에 의하면 패러디의 대상입니다. 클라우스 울츠트는 -50년대 이후에 태어난 구동독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는데- 사회주의 운동에 관해 어떠한 관심도 표명하지 않습니다. 가령 맑스는 주인공에게는 100마르크 지폐에 그려진 자이고, 엥겔스는 50마르크 지폐에 그려진 자일뿐입니다. 주인공의 톤은 스페인의 악한 소설을 연상시킬 정도로 유머러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렇기에 독자는 이 소설을 (상기한 두 편의 작품과는 달리)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자칭 미래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클라우스 울츠트는 1968년 8월 소련군의 탱크가 프라하로 진군할 때 거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소련군 탱크의 굉음에 놀랐고, 이로 인해 울츠트는 자궁 속의 태포가 찢어지는 바람에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귄터 그라스 G. Grass의 "양철 북"에서 오스카가 계단에서 넘어진 뒤 성장을 멈추었듯이, 울츠트의 다친 페니스 역시 성장하기를 멈춥니다. 울츠트는 어느 날 계단에서 떨어졌는데, 이때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빗자루에 그의 사타구니가 심하게 찔렸던 것입니다. 문제는 울츠트가 이른바 사회주의 통합당 제 1서기, “에리히 호네커를 위해” 헌혈한 다음에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클라우스 울츠트는 성적으로 매우 수치심을 드러냅니다. 이는 (부모의 영향 때문에 나타난 것인데) 궁극적으로는 근엄하고 경직된 사회주의적 권위와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습니다. 가령 울츠트의 어머니는 “고추는 오줌 눌 때만 사용하는 거란다”라고 아들의 질문에 냉담하게 대답할 뿐입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그를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아이로 취급했고, 어머니는 온갖 일로 시시콜콜 간섭하였습니다. 성에 대한 과잉된 수치심 그리고 음담패설을 즐기면서 희희낙락거리는 태도는 그 자체 성도착의 증세나 다름이 없습니다. 울츠트는 성도착증에 시달립니다.

 

나중에 울츠트는 스타지에 가담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동료들이 얼마나 고루하고 우둔한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동료들에게서 성에 관한 지식을 약간 섭렵한 (?) 울츠트는 여러 명의 여성을 사귀게 됩니다. 음탕한 마리나, 뚱뚱한 “소시지 부인” 그리고 음악과 꽃 그리고 “암스테르담”을 좋아하는 젊은 아가씨, 이본이 바로 그들입니다.

 

섹스는 울츠트에게는 오로지 어머니에 대한 거역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울츠트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성을 철저히 은폐했을 뿐 아니라, -울츠트의 표현에 의하면- “자식이 미래에 누려야 할 자연스러운 사랑의 삶을 깡그리 망쳐 놓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울츠트는 실제 삶에서 성과 사랑을 정상적으로 결합시키지 못합니다. 가령 그는 발정 난 암고양이처럼 덤비는 마리나에게 유혹 당합니다. “이렇게 탄복할만한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 그칠 줄 모르고 덤벼들다니!” (S. 203).

 

울츠트는 마리나의 부엌에서 겁탈 당했는데, 결국 얻은 것이라곤 임질뿐이었습니다. 사랑과 성행위는 주인공에게 서로 다른 차원에서 이해될 뿐입니다. 나중에 울츠트는 “소시지 부인”을 겁탈하려 하나,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며, 경험 없는 이본에게서 아무런 성욕을 느끼지 않습니다.

 

소설 마지막 장, "구제된 남근 der geheilte Pimmel"은 볼프의 작품 "나누어진 하늘 Der geteilte Himmel"을 패러디하기 위한 것입니다. 1989년 11월 4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울츠트는 우연히 계단에서 떨어지게 되는데, 이때 그의 남근은 장대하게 부풀어 오릅니다. 말하자면 구동독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는 바로 그날, 울츠트는 성의 질병에서 벗어난 셈입니다. 브루시히의 이러한 입장은 동독 전체를 고립된 사이코의 집단으로 매도한 마츠의 그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한스 요아힘 마츠는 자신의 책 『사이코의 섬』에서 동독의 전체주의적 사회 구조를 분석하며, 여기서 어떤 정신 병리학적 비정상의 특성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토마스 브루시히는 작품 속에서 구동독 문화 전체를 매도하고 이를 병적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독이 붕괴했다고 해서 모든 사회주의 문화 전체를 매도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동독 문학의 가상적 유토피아적 기능은 다른 학문의 실제 분석적 기능과는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소설 속에서 재미있는 대목은 무엇보다도 크리스타 볼프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볼프는 1989년 11월 구동독의 젊은이들에게 “출국하지 말라”고 호소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크리스타 볼프를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노회한 작가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브루시히의 견해에 의하면 볼프는 개혁적이기는 하나, (카타리나 비트를 가르친 피겨 스케이팅 트레이너) 유타 뮐러와 마찬가지로 특권 의식을 지닌 인간형에 불과할 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볼프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사실에 근거한 냉정한 비판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브루시히의 볼프 비판은 비아냥거림 내지 특권층에 대한 심리적 반발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가 개인의 제반 입장은 구동독의 정치적 예술적 입장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볼프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무척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같은 영웅들"을 국가 이데올로기와 관료주의적 정치에 대한 “진지한 패러디”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브루시히의 작품은 결국 (페니스에서 시작되어 페니스로 끝나는) 수치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만을 들려줄 뿐입니다. 한마디로 브루시히에게는 구동독이란 사회주의적 신기루로 향하는 “바보들의 배 Narrenschiff”였습니다.

 

크리스토프 하인 역시 「인도로 향하는 항로가 아니다. Kein Seeweg nach Indien」에서 사회주의의 신기루를 암시하고 있습니다만, 하인의 비판은 인도로 향하려는 사람들의 의지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도로 향하는 항로가 근본적으로 없는 게 아니라, 현재 사람들이 채택한 길은 인도로 향하는 항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브루시히는 처음부터 스타지와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통하여 국가 자체를 “바보들의 배”로 풍자했습니다. "우리 같은 영웅들"에서 어떤 더 나은 삶에 관한 꿈에 대한 최소한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허영재 교수님의 번역으로 이미 한국에서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