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5) 무지한 자의 맹신으로서의 유토피아. 하인의 '원탁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필자 (匹子) 2025. 2. 3. 10:29

(앞에서 계속됩니다.)

 

9. 성배의 상징, 유토피아

 

성배가 상징하는 바는 하인의 극작품에서 핵심을 이루는 대목이므로, -등장인물의 논의와는 다른 차원에서- 다시 한 번 비판적으로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 하인의 작품은 모든 아름다움과 선의 문제를 종교적 차원과 관련시키지는 않는다. 이미 언급했듯이 "원탁의 기사들"에는 시간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역사극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려는 극작가의 의도와 관련된다. (역주: 대부분의 극작품은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극작품속에 담긴 역사적 소재가 아니라, 극작품의 집필 시기이다. “안티고네는 극장에서 현재 공연된다. 그러므로 연극 사 내지는 극장 사에 관한 질문은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 Chr. Hein: Schlötel oder was solls. Stücke und Essays, Darmstadt 1986, S. 177.) 그렇기에 우리는 성배 (聖盃)를 찾아다니는 기사들의 사상적 정치적 입장을 신앙, 특히 기독교적 믿음이라는 주제와는 다른 별개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에 비하면 다음과 같은 물음은 대답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즉 성배는 -한스 마이어Hans Mayer의 가설대로-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것일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이 이상적으로 살 수 있는 바람직한 사회의 이념으로서의 엥겔스의 개념, “과학적 사회주의”에 하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역사의 궁극적 목표로서 처음부터 확정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유효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기존 사회주의 사회에 온존한 제반 모순점들은 새로운 의미의 어떤 구체적 유토피아를 얼마든지 창출해낼 수 있다. (역주: 하이너 뮐러와 같은 작가는 엥겔스의 개념, “과학적 사회주의 der wissenschaftliche Sozialismus”를 “우둔한 사고”로 간주하였다. 그 까닭은 엥겔스가 -뮐러의 견해에 의하면- 역사의 궁극적 목표를 확정 (確定)시키며,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추호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Siehe Heiner Müller: Gesammelte Irrtümer 3, Texte und Gespräche, Frankfurt a. M. 1994, S. 108.) 그렇기에 성배가 의미하는 바를 사회주의로 규정한다는 것은 편협한 감이 없지 않다. 물론 우리는 -폴커 브라운이 "과도기의 사회"에서 해명하려고 시도한 바 있듯이- 공산주의적 이념을 성배에 대한 하나의 특정한 예로 인정할 수는 있다. (역주: Siehe Hans Mayer: a. a. O., S. 255.)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 유토피아의 충분조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몇몇 연구자들은 성배를 이와는 달리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가령 베른트 피셔는 하인의 다른 작품 "아 Q의 진정한 이야기 (Die wahre Geschichte des Ah Q)"의 주제와 관련하면서, 성배에 관한 문제를 “이상주의적 천년 왕국의 메커니즘에 관한 물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역주: Bernd Fischer: Christoph Hein. Drama und Prosa im letzten Jahrzent der DDR, a. a. O., S. 144.) 그밖에 크리스틀 키이비츠는 그것을 “유토피아의 필연성에 관한 문제”와 관련시킨 바 있다. 성배의 신화는 -키이비츠의 견해에 의하면-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악한 표현이며, 권력 유지의 목적으로 신학적 사실을 정치적으로 도용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독단론자들은 현실적 감각을 상실하고 무언가를 선택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이다. (역주: Christl Kiewitz: Der Stumme Schrei. a. a. O., S.267f.)

 

"원탁의 기사들"은 사회주의적 이상에 관한 논의 내지는 정치적 패러디를 담고 있는가? 아니면 천년 왕국의 메커니즘에 관한 물음을 시사하고 있는가? 혹은 하인의 작품이 유토피아의 필연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리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연구자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주어진 시대적 현실과의 관련성 속에서 작품을 파악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통일된 독일의 상황은 아르투스 왕국이 외부의 적 (敵)인 자본주의자, 클링조어에 의해 몰락한 것 같이 보일 뿐이다. 그렇기에 "원탁의 기사들"에 대한 관심은 1989년에 비해 현저하게 약화된 것 같이 보인다. 또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즉 훌륭한 문학 작품은 일견 모호한 느낌을 풍기나, 그 자체 다양하고 새로운 주제들을 포괄하고 있다. 카프카의 작품들이 시사하는 다의적 주제들을 생각해 보라.

 

10. 사회적 이상, 유토피아, 자기 소멸 기능

 

유토피아의 사고는 오늘날 어떻게 수정되어 새로운 가치를 지닐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사회주의에서 긍정적 요소로서의 유토피아의 사고를 추출해내는 작업과 관계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견해가 제기될 수 있다. 첫째는 ‘시스템으로서의 사회주의는 고유한 이상들을 포기했다’는 견해를 지칭한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가령 기독교가 종교 재판으로 축소화될 수 없듯이, 우리는 사회주의를 끔찍한 스탈린주의로 제한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기에 사회주의에서는 여전히 사회 변혁을 위한 긍정적 유토피아의 요소가 온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와는 대립되는 견해이다. 이에 비하면 사회적 정의와 협동에 관한 이념은 허상에 불과했다고 한다. 기존 사회주의는 공동적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다가, 결국 개개인들의 자유 내지는 인권 등을 박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역주: 예를 들자면 프란시스 후쿠야마, 쟝 보들리야르, 요아힘 C. 페스트는 사회주의를 유토피아 내지는 이상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현대에서 유토피아의 사고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Inge Münz-Koenen: Ende der Utopie = Ende der Geschichte?. Der Ort des Sozialismus in den Modernisierungsprozessen, in: WB., 39 Jg., 1/ 1993, S. 17.)

 

문제는 후자에 있다. 유토피아를 부인하는 사고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째, 유토피아를 부정하는 자들은 자신의 견해가 주어진 제한된 현실적 여건들에서 도출된 결론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지구상의 모든 세계에 조금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적용하려는 오만한 태도를 취한다. 둘째, 유토피아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유럽과 북미에서의 포만한 삶 그리고 과학 기술에 의한 유토피아의 대치 가능성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다.  (역주: Francis Fukujama: Das Ende der Geschichte. Wo stehen wir? 1991; Jean Baudrillard: Das Jahr 2000 findet nicht statt, 1991.) 셋째, 그들은 유토피아의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경고한다. 심지어 요아힘 페스트는 ‘붉은색의 사회주의’를 ‘고동색의 나치즘’와 동일화시키고 있다. (역주: 페스트가 사용하는 유토피아의 개념은 (기존 사회주의 내지 국가 사회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내용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것은 자유주의적 사고이다. Joachim C. Fest: Der zerstörte Traum. Vom Ende des utopischen Zeitalters, 1991 a. a. O., S. 95. 페스트의 비판은 (부르크하르트 슈미트가 비판한) ‘순수 유토피아의 개념으로 집약된다. 이로써 페스트는 구체적 유토피아를 기술주의적 계획과 혼동하고 있다. Burghart Schmidt: Kritik der reinen Vernunft, Stuttgart 1988, 1장을 참고하라, S. 17 - 62.) 그리하여 유토피아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제 1세계에서는 유토피아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은근히 동조하게 된다.

 

유토피아의 사고는 부분적으로 취약점이 담겨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 가능성으로서의 구체적 유토피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유토피아는 주어진 역사에서 파생된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적 객관적 가능성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점, (무언가를 회의하고 의심해 보는) 비판 정신이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어떠한 한이 있더라도 수정과 개선을 허용하려고 하지 않는 점 등에서 부분적 취약점을 발견해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날에 필요한 새로운 사고로서의 유토피아는 정확히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마치 효모 내지는 촉매와 같은 유토피아의 자기 소멸 기능이다. 유토피아의 사고는 실현에 근접하게 될 때 제 기능을 다하고 소멸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기 소멸뿐이 아니라, 변화된 현실 속에서 새롭게 떠오른 새로운 사고를 잉태한다. (역주: 예컨대 크리스토프 하인의 소설 "용의 피 (Drachenblut)"에서 주인공 클라우디아는 자신의 사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사진 속에는 시들어가는 무엇, 즉 사멸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희망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고착된 상으로서의 모습은 적극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용인하지 않는다.)

 

어쩌면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지 모른다, 모든 것을 나중에 결과론적으로 결론 맺기는 쉽다고, 격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는 순간에는 모든 게 어렵고 난감하게 보인다고. 그렇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경험 내지 체험을 바탕으로 현재 현실에 대한 입장을 성급하고도 확고하게 내세우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자신의 경험과 체험이 현재 삶을 살아가는 데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금석은 모든 경우에 유효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 과거의 경험, 다시 말해서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가져다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현재 삶의 제반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과거의 삶은 현재의 그것과 동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의 지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파괴될 정도로 오늘날 전체주의적 파괴 메커니즘은 발전된 것을 생각해 보라. 하인의 극작품, "아Q의 진정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러 가지 파국을 겪고 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식은 몰락 다음에 도래한다. 모든 것을 완전히 알고 있는 자들은 죽은 사람들이니까”. 유토피아는 때로는 무지한 자의 맹신으로서 기능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보다 더 중시해야 할 것은 유토피아의 자기 소멸 기능이다.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