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주 13

(명시 소개) 이정주 시집: 홍등

시인은 수십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자신의 기억과 갈망의 편린을 시구 속에 담아 왔습니다. 시인은 어느 상황을 포착하고,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것을 서술합니다. (그러나 행과 행 사이에 숨어 있는 처절한 감정의 여운이 은밀히 드러날 때 나는 놀라운 시적 페이소스에 감복하곤 했습니다.) 상황 속에는 수많은 체험들이 마구 뒤엉켜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은 현재의 상황일 수도 있고, 과거의 기억의 편린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 홍등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삿짐을 싣고 트럭이 지나간다. 점 보는 집이 지나간다. 얼굴 찢긴 후보들이 지나간다. 허벅지를 드러내고 화투를 치는 여자들이 지나간다. 붉은 등 아래 담배를 물고 서 있는 여자도 지나간다. 붉은 등이 그립던 날들과 엥겔스가 옳다고 ..

19 한국 문학 2023.06.06

(명시 소개) 기억과 갈망의 몽타주 (2) 이정주의 시세계

(앞에서 계속됩니다.) 4. 이정주는 『현대시학』 2007년도 7월호에 최근작들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시인은 중의적 표현 기법 내지 복합적인 장면 배열 등을 지양하고, 어떤 사소하지만, 생략될 수 없는 관점을 집요하게 투시한다. 가령 「러브레터」에서 시인은 어느 노동자의 일상을 마치 카메라의 렌즈 속처럼 들여다본다. 인간의 존재는 과학 기술에 의해서 장악되고, 인간이 행하던 모든 일은 이제 기계에 의해서 영위될 뿐이다. 최근작에서 시인은 유연한 시각을 견지하고, 약간의 체념적인 톤을 드러내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예술적으로 포착하려는 의지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필자는 최근작 10편 가운데 「물가로 갈 것인가 도서관으로 갈 것인가」를 가장 관심 있게 읽었다. 물가에서 “숭어”와 “새”가 죽임의 두려움에..

19 한국 문학 2023.01.30

(명시 소개) 기억과 갈망의 몽타주. (1) 이정주의 시세계

1. 독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다른 공간에서 다시 태어나는 행위이다.” 마르크에 의하면 또 다른, 가능한 공간에 대한 열망이 결국 화가로 하여금 붓을 들게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어째서 이정주의 시를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일까? 가장 훌륭한 공간에서 머물면서 지고의 행복을 느끼려는 욕구야 말로 시인으로 하여금 창작에 몰두하게 하는 것일까? 2. 흔히 사람들은 이정주의 시가 초현실주의적 실험 정신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이는 틀리지 않지만, 그 자체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정주의 시 속에는 과거의 특정한 정신 사조와 비교할 수 없는, 어떤 독특함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독특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즉 ..

19 한국 문학 2023.01.30

(단상. 526) "손가락과 닭대가리", 2022년 대선 유감

1. 선거 판세는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이번 대선 결과는 부동산 폭등과 코로나19로 인해 소시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져다준 필연적 귀결이다. 정권교체의 여론은 처음부터 강렬했다. 안타까운 것은 30만에 해당하는 무효표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안철수 후보에 투표한 사람들로 추정된다. 2. 이재명이 아니라, 이재명 할아버지가 온다 하더라도 이길 수 없는 국면이었다. 윤석열 후보가 여러 가지 하자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당선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윤 후보에게 바라건대 시스템에 의해서 특정인을 감옥에 쳐넣겠다는 생각을 씻어버리고 오로지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초심을 견지하기를 바란다. 이재명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 앞으로도 계속 사무실에 CCTV를 설치하고 어떠한 뒷돈을 받지 않는 염개한..

3 내 단상 2022.03.11

서로박: (2) 기억과 갈망의 몽타주. 이정주의 시세계

(앞에서 계속됩니다.) 4. 이정주는 『현대시학』 2007년도 7월호에 최근작들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시인은 중의적 표현 기법 내지 복합적인 장면 배열 등을 지양하고, 어떤 사소하지만, 생략될 수 없는 관점을 집요하게 투시한다. 가령 「러브레터」에서 시인은 어느 노동자의 일상을 마치 카메라의 렌즈 속처럼 들여다본다. 인간의 존재는 과학 기술에 의해서 장악되고, 인간이 행하던 모든 일은 이제 기계에 의해서 영위될 뿐이다. 최근작에서 시인은 유연한 시각을 견지하고, 약간의 체념적인 톤을 드러내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예술적으로 포착하려는 의지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필자는 최근작 10편 가운데 「물가로 갈 것인가 도서관으로 갈 것인가」를 가장 관심 있게 읽었다. 물가에서 “숭어”와 “새”가 죽임의 두려움에..

19 한국 문학 2021.08.20

서로박: (1) 기억과 갈망의 몽타주. 이정주의 시세계

1. 독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다른 공간에서 다시 태어나는 행위이다.” 마르크에 의하면 또 다른, 가능한 공간에 대한 열망이 결국 화가로 하여금 붓을 들게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어째서 이정주의 시를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일까? 가장 훌륭한 공간에서 머물면서 지고의 행복을 느끼려는 욕구야 말로 시인으로 하여금 창작에 몰두하게 하는 것일까? 2. 흔히 사람들은 이정주의 시가 초현실주의적 실험 정신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이는 틀리지 않지만, 그 자체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정주의 시 속에는 과거의 특정한 정신 사조와 비교할 수 없는, 어떤 독특함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독특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즉 ..

19 한국 문학 2021.08.20

서로박: 그 언덕에 세워진 이정주 시인의 탑 (8)

8. “제 몸 버릴 곳 마땅치 않아” 나: 마지막으로 명시들 그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시는 아무래도 「절터」라고 생각됩니다. 이제는 자신이 없으므로 그 언덕에 탑을 세운 거다 그래도 자신이 없으므로 탑 가득히 불을 피워 넣은 거다 불쏘시개로 제 손을 밀어 넣은 거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니 손가락이 무너진다 무너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 달도 무너진다 제 몸 버릴 곳 마땅치 않아 절을 짓는 거다 절도 받아주지 않으므로 떠도는 거다 어깨 움츠리며 탑 하나 무너진 달 속으로 들어서는 거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작품을 탄생시킬 때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마치 호랑이가 토끼 한 마리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듯이, 예술가는 하나의 틀 속에서 가장 완전한 작품을 창조해내려고 합니다. 인용 시에서 “탑”과 “절”은 불교..

19 한국 문학 2020.08.27

서로박: 그 언덕에 세워진 이정주 시인의 탑 (6)

6. “힘이 들어가면 파이야” 너: 다시 숙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훌륭한 시편들이 많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숨은 시인의 사회”와 관련되는 두 가지 중요한 테마를 다루어야 할 것 같은데요? 나: 시 예술과 시인에 관한 사항 말이지요? 너: 그렇습니다. 여섯째로 분류되는 시편들은 오늘날 거의 외면당하는 시인의 존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점」,「여물」,「숨은 시인의 사회」,「러브레터 2」,「조류독감」*,「어디쯤 가고 있을까」,「우물」,「금」,「들판」 등의 시가 여기에 속합니다. 그밖에 일곱째로 분류되는 작품 속에는 시와 예술에 관한 작가의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꼬까울새」,「다비」*,「습관에 관하여」,「그 나이에도 시를 쓰는 군요」,「아니오,.. 네 그렇습니다」,「단수」,「벚나무 아래서」,「독」..

19 한국 문학 2020.08.27

서로박: 그 언덕에 세워진 이정주 시인의 탑 (5)

5. 죽음과 바깥의 다른 세상 너: 예리한 지적이로군요. 넷째로 삶과 죽음을 성찰하는 시편들로서 우리는 다음의 시를 들 수 있습니다. 「민박」, 「터미널」, 「난중일기 卵中日記」, 「죽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죽는다」, 「부활」*, 「나비」*, 「강으로 가는 길 1, 2, 3」, 「태산」, 「마부」 등이 있지요. 다섯째로 자아의 고독 그리고 단 한 번의 삶에 관한 문제를 다룬 작품들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작품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노출」, 「부활」*, 「껍데기 벗겨지다」, 「귀가」, 「집」,「혼자 두는 바둑」 등이 이에 해당하지요. 이 작품들 가운데 특히 「난중일기 卵中日記」가 나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내 어머니도 마야부인 무우수 아래 누우셨지 나를 낳으며 웃으셨지 바람 불고 나뭇잎들 떨어지며..

19 한국 문학 2020.08.27

서로박: 그 언덕에 세워진 이정주 시인의 탑 (3)

3. “그대, 시 뽑는 기계” 너: 이번에 간행된 시집을 소재의 측면에서 어설프게 여덟 가지로 분류해보았습니다. 1. 기억과 관련되는 아름다움의 비밀을 추적한 작품들, 2. 실용적 가치 내지 재화만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품들, 3. 물화된 삶과 인간 소외를 지적하는 작품들, 4. 삶과 죽음에 관한 성찰을 다룬 작품들, 5. 자아의 고독 그리고 단 한 번의 삶에 관한 문제를 다룬 작품들, 6. 버림받은 귀한 존재, 혹은 소시민으로서의 시인을 다룬 작품들, 7. 시와 예술에 관한 성찰을 다룬 작품들, 8. 사랑과 결혼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 이러한 분류가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나: 네. 작품에 대한 일차적 접근으로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작품이 한 가지 사항 속에 국한..

19 한국 문학 2020.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