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서로박: 그 언덕에 세워진 이정주 시인의 탑 (6)

필자 (匹子) 2020. 8. 27. 11:19

 

6. “힘이 들어가면 파이야”

 

: 다시 숙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훌륭한 시편들이 많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숨은 시인의 사회”와 관련되는 두 가지 중요한 테마를 다루어야 할 것 같은데요?

: 시 예술과 시인에 관한 사항 말이지요?

 

: 그렇습니다. 여섯째로 분류되는 시편들은 오늘날 거의 외면당하는 시인의 존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점」,「여물」,「숨은 시인의 사회」,「러브레터 2」,「조류독감」*,「어디쯤 가고 있을까」,「우물」,「금」,「들판」 등의 시가 여기에 속합니다. 그밖에 일곱째로 분류되는 작품 속에는 시와 예술에 관한 작가의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꼬까울새」,「다비」*,「습관에 관하여」,「그 나이에도 시를 쓰는 군요」,「아니오,.. 네 그렇습니다」,「단수」,「벚나무 아래서」,「독」,「얼굴」,「말」,「화공」,「절터」, 「절」,등이 이에 해당하는 작품들이지요. 상당히 많군요. 따라서 『숨은 시인의 사회』는 전체적으로 시인의 사명과 시 예술에 관한 사항을 주제화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일단 첫 번째 사항에 관해서 말씀 나누기로 하지요. 자본주의 소비 사회는 물화되어 있으며, 황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를테면 「여물」에서 “신경숙의 단편소설”은 마치 하나의 비디오테이프처럼 “우엉 잎사귀에 싸” 먹히는 여물처럼 취급되고, 시 역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망각의 시대에 사람들은 찰나의 쾌락만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러브레터 2」에서도 나타나듯이, 인간의 감정은 마치 순간적으로 작동되는 기계의 인위적인 쾌락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자고로 시인들은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이끌어갈 수 있는 역량과 정서적 강점을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치로부터, 경제적 활동으로부터 소외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그들의 자학으로 이어지고, 시인으로서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이를테면 「금」에서는 고인이 된 “영유 형”이 등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뭘 아나/ 이렇게 사는데.” 시인들의 식견과 판단은 올바르고 영특하지만, 그들의 견해는 지금 이곳에서 외면당하기 일쑤입니다.

 

: 횔덜린은 시인의 존재를 “자기 집속의 이방인”에 비유했지요?

: 그렇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유한 집에서 이방인으로 간주되고 있지요. 가령 오디세이가 거지 차림으로 자신의 고향 집에 들어섰을 때, 타 지역의 장수들은 마치 집주인들처럼 아내 페넬로페와 청혼하려고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있다가, 다음과 같이 일갈합니다. “누가 이따위 방랑 거지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가?” 하고 말입니다.

 

손님이 주인으로 행세하는 격이지요. 그렇듯이 시인은 오늘날 자신의 고향 집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오늘날 이 땅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자들은 땅값 상승으로 순식간에 돈방석에 앉은 졸부들 아닙니까? 그렇기에 시인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에서도 나타나듯이-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고, 노숙자의 옆에서 기웃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 몇몇 시작품들은 시인의 존재를 무조건 미화하는 것 같지는 않는데요?

나: 그렇습니다. 일부 시인들의 소시민근성을 비판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끼리끼리 그룹 지어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정어리들이 떼 지어 헤엄치면 상어의 먹잇감이 되지 않듯이, 작은 그룹 속에 안주한 시인들은 편안함을 느끼곤 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편안함은 시인들의 시각을 근시안적으로 만들고 그들의 비판정신을 마취시키는 하나의 마약처럼 작용합니다. 이는 「숨은 시인의 사회」 그리고 「들판」에서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작품은 시인들의 변절, 직업 변화, 절필, 사업 실패, 죽음 등을 객관적 시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눈알이 아프도록 울고 나니, 들판이 보였다. 무밭에서 무들이 뽑혀져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 온전히 숨을 수 있을까.” (「숨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연). 시 「들판」에서 시인은 생존의 문제 뿐 아니라, 그 때문에 (혹은?) 같은 동료를 “동시에 외면”하는 “한 무리 얼굴들”, 즉 집단 이기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습니다.

 

: 그밖에 언급할만한 시는 어떤 게 있을까요?

: 일곱째 부류에 속하는 대부분의 시는 아름답고 깊은 의미를 독자에게 전해줍니다. 보들레르와의 대화를 담고 있는 「그 나이에도 시를 쓰시는 군요」, 청마 유치환과의 선문답을 다루고 있는 「아니오... 네 그렇습니다」는 시심의 심층부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 힘들어 보이는군

네, 잘못 든 길은 힘을 많이 뺏아 가지요

시가 그렇게 힘든가“

아니오... 네 그렇습니다

온몸으로 써도 잘 모르는데. 전 그냥

재미있는 놀이로만 생각했지요

그 벌을 받고 있는 거지요

청마의 눈동자가 바닥을 쳐다본다

온몸으로 쓸 필요가 없네 그저 재미있는...

그래 그거야 그렇지 않으면 억지지

힘이 들어가면 파이야 (...)

 

: 청마 유치환은 시적 자아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온몸으로 쓸 필요가 없네. 그저 재미있는/ 그래 그거야 그렇지 않으면 억지지/ 힘이 들어가면 파이야”.

 

: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의지를 과도하게 드러내지 말라, 유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시작에 임하라,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작위적이며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여기서 이정주 시인의 고뇌어린 시론이 은근히 드러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