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노빈 21

박설호: (1) 동학 그리고 에코페미니즘

“최시형의 경물(敬物)은 인류세의 시대에 노아의 후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주 내지는 비상 보트에 승선할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필자) ........................... 1. “도올은 동양학의 걸물이다.” (김경재): 젊은 시절 도올 김용옥의 『여자란 무엇인가』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목 자체가 처음에는 나를 불쾌하게 했습니다. “여자란 누구인가?”라고 묻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원래 “무엇”이란 사물, 객체 그리고 대상을 지칭하므로, 여자를 그런 식으로 규정하는 게 기분 나빴습니다. 그렇지만 책에는 여성 혐오와는 정반대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성의 문제는 하느님에 대한 따님의 인권을 회복하는 문제다.” 이 말은 열사람의 영웅, 일남구녀(一男九女)..

2 나의 잡글 2024.09.26

서로박: (2)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앞에서 계속됩니다.) 7. 우리는 제 1권이 동시대 영국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풍자한다는 사실을 접할 수 있다. 릴리푸트의 수상, 플립너프는 당시의 자유당의 정치가,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을 빼박은 인물이다. 월폴은 휘그Whig 정당의 당원이었는데, 보수정당을 견제하며, 중상주의의 정책을 실행에 옮긴 사람이다. 실제로 스위프트는 휘그 당에 가입한 다음에 이에 환명을 느끼고 정치적 경력을 포기한 바 있다. 플립너프가 말할 때, 걸리버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의 말을 무시한다.  콩알만한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하찮게 느껴졌던 것이다. 릴리푸트 왕국이 화염에 휩싸였을 때, 주인공 걸리버는 오줌을 누면서 왕궁의 불을 끈다.어쩌면 작가 스위프트는 여기서 앤 여왕의 정치 참여에 은근히 ..

35 근대영문헌 2023.11.26

서로박: (2) 존재와 존재자, 혹은 수운과 화이트헤드

(앞에서 계속됩니다.) 6. 신 그리고 자연 (Spinoza), 존재자 그리고 존재 자체 (Heidegger), 신 그리고 창조성 (Whitehead), 존재 그리고 초월의 존재 (Tillich)는 서로 포함(包含)하는 관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것들은 단순히 이원론의 관계로 고착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서로 이질적인 내용을 지닌 채 양단적(両断的)으로 배척하는 게 아니라, 상호 조화롭게 영향을 끼쳐서 제각기 변해나가는 양단적(両端的)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양단(両端), 다시 말해서 서로 이어질 수 있는 두 개의 끝을 가리킵니다. 7.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를 포함(包含)하며 양단적(両端的)으로 작용하는 상제로서의 신과 지기로서의 기운은 서로 통합하고 조우하며 아..

23 철학 이론 2023.10.14

서로박: 이성 국가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타자를 이해하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취해야 한다.” (장 작 루소) 친애하는 J, 타자를 이해하려면, 타자에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타자와 무조건 동일시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판적 거리감이지요.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일이야 말로 학문 행위에 가장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판단하지 말고, 이를 견지하되 타자에 접근하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무엇을 깨닫고 자신의 태도를 어느 정도의 범위 내에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송두율: 불타는 얼음, 후마니타스 2017, 116쪽 이하.) 윤평중 교수의 책 『극단의 시대에 중심 잡기』 (생각의 나무 2008), 그리고 『국가의 철학. 한반도 현대사..

2 나의 잡글 2023.09.19

(단상. 471)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Divide et impera"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루이 14세라고 한다. 그는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 Diviser pour régner"하고 말하곤 하였는데, 나중에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이 말을 인용하였다. 모든 것을 구분하는 것은 남성적 시각적 요소론적인 사고에서 유래한 것이다. (윤노빈) 무언가를 정복하려는 자는 눈으로 대상을 깔본다. 그리고는 이 대상을 구분하고 분할한다. 대상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그 대상을 소유하고 정복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분하고 분할하는 것은 악마의 소행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구분하고, 이간질하며 서로 싸우게 만드는 자는 사악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호모 아만스는 이러한 구분을 처음부터 배격한다. 성을 남..

3 내 단상 2023.05.30

박설호: (2) 에른스트 블로흐 읽기 (III) 서문

(앞에서 계속됩니다.) 제 3부에 실린 글은 얼핏 보기에는 블로흐 연구와 무관하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연구 대상은 다를지 몰라도, 독자들은 논의의 전개 및 방법론에 있어서 에른스트 블로흐를 유추할 수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첫 번째 글 「이반 일리히의 젠더 이론 비판」은 미발표의 논문으로서 일리히의 저작물 『젠더』를 비판적으로 구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필자는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하려 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일리히의 과거 지향적 관점이 퇴행의 반동적 세계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젠더에 대한 일리치의 시각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추상적이고 전근대적이라는 점입니다. 「원시 사회는 암반위에 있고, 문명사회는 절벽을 기어오르는가?」는 김유동 교수의 『충적세 문..

27 Bloch 저술 2023.04.22

박설호: "인간은 막힘없이 피어나는 우주의 꽃이다." 윤노빈의 '신생 철학'

1. 『신생 철학』은 현세에서 고통당하며 목숨을 이어가는 분들의 피와 땀과 관계되는 문헌입니다. 그것은 식자들을 위한 현학 서적도 아니고, 부유층 자제를 위한 교재도 아니며, 배부른 자세로 주문을 외는 사제들을 위한 교리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억압과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진 채 살아가는 인간을 위한 지침서와 같습니다. 윤노빈의 『신생 철학』은 세상에서 가장 핍박당하는 민족, 그것도 배달의 민족을 위한 충직한 조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책은 모든 인위적(人僞的)인 억압, 강제 노동, 감금, 고통, 죽임 등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여기서 벗어나, 새로운 해방 (Exodus)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윤노빈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메시아사상, 페르시아에서 유래하는 ..

23 철학 이론 2023.03.07

(단상. 493) 새로움에 대한 모험

아도르노는 말했다: “어떤 음악이 마음에 들면, 인간 동물은 그 음악만 좋아하고 다른 새로운 음악을 듣기를 거의 포기한다.” 어느 소설가는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남자든 여자든 자기에게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발견한 사람은 더 이상 새로운 사람을 사귀려 하지 않는다.” 윤노빈 교수는 레닌의 말을 인용하며 말했다: “인간 동물은 주인에게 꼬리치고 타인을 향해 컹컹 짖어대는 강한 보수성을 지니고 있다.” 하이너 뮐러를 인용하며 나는 말한다: “좋은 예술은 새로움에 의해 합법화된다고 한다. 허나 처음에 그것은 인간에게 불편함을 안겨다 준다. 새로움은 불편함이요, 불편함은 혁명적이다.” 새로움에 대한 모험 - 이것이야 말로 자기 발전의 방식에 관한 패러다임이다.

3 내 단상 2021.09.17

서로박: 부마항쟁과 라보에시 (2)

그래, 독재자는 누구를 사랑할 수도, 사랑 받을 수도 없다. 우리는 70년대 말경에 라보에시의 책을 간행할 계획을 품고 있었다. 이는 그 자체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게 아닌가? 라보에시는 유신 말기와 광주 사태의 숨 막히는 역사적 변화 과정을 그야말로 예언적으로 시사해주었던 것이다. 어느 날 친구는 서울에 거주하는 묘령의 여대생으로부터 면도날 들어 있는 백지 편지 한통을 받았다고 했다. 추후 알게 된 소문이지만 부산의 많은 학생들이 면도날 편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수염 깎지 않는 남쪽 대학생의 외모를 질타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면도날은 “데모하지 않는 부산의 대학생들이여, 차라리 남근이나 잘라버려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북녀 (北女)들의 잔인한 독려 때문이었..

2 나의 잡글 2021.06.16

서로박: 부마항쟁과 라보에시 (1)

“자네 번역은 엉터리야.” 윤노빈 선생님은 1981년 초 부산에서 출국을 앞둔 제자에게 그렇게 일갈하였다. 1980년 5월에 부산의 어느 출판사는 나의 번역서, “보에시, 노예근성에 대하여”를 간행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그 소책자를 거의 잊고 살았다. 1989년 여름, 마치 오디세우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10년간의 방랑을 끝내고 귀국하여 낙향하였다.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까까머리 제자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이때 그 소책자가 흩어진 서가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러나 반가움은 하나의 순간적 감정에 불과했다. 소책자를 다시 읽었을 때, 거기서 많은 오역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윤 선생님의 말씀은 엄연한 사실로 확인되고 있었다. 나의 얼굴은..

2 나의 잡글 2021.06.16